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중은우시 2023. 7. 7. 22:50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平), 박일파(薄一波), 진갱(陳賡), 소경광(蕭勁光)등 20명의 고위장군들(이들중 17명은 1949년이후 중장이상의 계급을 받는다)은 함께 미군운송기를 타고 연안을 출발하여 산서의 여성장녕(黎城長寧)공항에 도착한 후, 내전전선으로 나간다.

 

1940년 5월, 주덕(朱德)은 태행산을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1946년 연안을 떠나 섬북(陝北)으로 가서 내전전선에 나간다.

 

1940년 6월, 서향전(徐向前)은 산동을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1946년 연안에서 섬북으로 가서 내전을 지휘한다. 

 

1942년 3월, 하룡(賀龍)은 산서서북에서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연안을 떠나 진수군구(晋綏軍區)로 돌아가고 8월 17일부터 내전에 투입된다.

 

1943년 1월(혹은 9월), 유백승(劉伯承)은 태행산을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1945년 8월 25일 유백승, 임표, 진의등 20명의 고위장군들은 미군운송기를 타고 연안에서 출발하여 산서 여성장녕공항에 도착한 후, 내전전선으로 나갔다.

 

1943년 8월, 섭영진(聶榮臻)은 진찰기(晋察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1945년 9월 9일, 연안에서 진찰기군구로 되돌아가고 9월 11일 내전에 투입된다.

 

1943년 9월, 팽덕회(彭德懷)는 태행산을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1945년 2월부터 7월까지 "화북좌담회(華北座談會)"에서 "백단대전(百團大戰)떄 실력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엄중한 비판을 받는다.(1959년 여산회의떄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연안에서 너는 나를 40일간 엿먹였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1946년 연안에서 내전에 투입된다.

 

1943년 11월, 진의(陳毅)는 회남(淮南)을 떠나 연안으로 가서 정풍운동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1945년 8월 25일, 진의, 임표, 유백승등 20명의 고위장군들이 미군운송기를 타고 연안에서 출발하여 산서의 여성장녕공항에 도착한 후, 나뉘어 내전전선에 투입된다.

 

나영환(羅榮桓)은 계속 산동에서 "항일"하며, 정풍운동을 영도하고, 연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섭검여(葉劍英)은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10대원수: 주덕, 팽덕회, 임표, 유백승, 하룡, 진의, 나영환, 서향전, 섭영진, 섭검영.

 

10대대장: 속유(粟裕), 서해동(徐海東), 황극성(黃克誠), 진갱(陳賡), 담정(譚政), 소경광(蕭勁光), 장운일(張雲逸), 나서경(羅瑞卿), 왕수성(王樹聲), 허광달(許光達)

 

상장: 왕평(王平), 왕진(王震), 왕굉곤(王宏坤), 왕건안(王建安), 왕신정(王新亭), 위국청(韋國淸), 오란부(烏蘭夫), 등화(鄧華), 섭비(葉飛), 감사기(甘泗淇), 여정조(呂正操), 주양재(朱良才), 유진(劉震), 유아루(劉亞樓), 허세우(許世友), 소진화(蘇振華), 이달(李達), 이도(李濤), 이천우(李天佑), 이지민(李志民), 이극농(李克農), 이취규(李聚奎), 양용(楊勇), 양지성(楊至成), 양성무(楊成武), 양득지(楊得志), 초화(肖華), 초극(肖克), 송임궁(宋任窮), 송시륜(宋時輪), 장종손(張宗遜), 장애평(張愛萍), 진사구(陳士榘), 진재도(陳再道), 진백균(陳伯鈞), 진기함(陳奇涵), 진석련(陳錫聯), 주환(周桓), 주사제(周士第), 주순전(周純全), 조이륙(趙爾陸), 홍학지(洪學智), 종기광(鍾期光), 하병염(賀炳炎), 곽천민(郭天民), 당량(唐亮), 염홍언(閻紅彦), 팽소휘(彭紹輝), 한선초(韓先楚), 부종(傅鍾), 부추도(傅秋濤), 뇌전주(賴傳珠), 황영승(黃永勝), 사부치(謝富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