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중국의 정보통신

니광난(倪光南): 비극적인 중국반도체의 길.....

중은우시 2023. 3. 24. 12:27

글: 하영기(夏潁奇).

2021년 12월 15일 중관촌

1978년이래, 수백만의 해외유학생들이 출국했고,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했다. 이는 개혁개방의 중요한 내용이다.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와서 중국의 과학기술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여기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니광난(倪光南)에 대하여 써보기로 한다.

 

1981년 나는 오타와대학 기계학과의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과학원 컴퓨터연구소의 한 방문학자가 왔는데, 이름이 니광난이었다.

 

만나보니, 용모는 청수(淸瘦)하며, 농담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말도 어눌했다. 나는 어떻게 과학원의 사람들은 모두 이러냐고 생각했다. 골드바흐의 추측을 연구한 천징룬(陳景潤)처럼.

 

당시 우리같은 국비유학생들은 대사관에서 매달 생활비로 313캐나다달러(당시 캐나다달러와 미국달러는 기본적으로 비슷했다)를 받았다. 임차료로 150달러를 내고, 식사하고 생활하는데 80달러를 쓰고나면 남는 80여달러의 돈을 모아서 TV와 냉장고를 구매했다.

 

그때는 유학해서 공부하여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것 말고 두 가지 사심도 있었다: 하나는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집안과 조상을 빛내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가전제품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매달 313캐나다달러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때 나는 국내에서 받는 급여가 39.5위안이었고, 10년동안 똑같았기 때문이다!

 

니광난은 얼마를 벌었을까? 연봉43,000캐나다달러였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았을까? 대사관에 따르면, 캐나다과학원(NRC)의 원장이 중국을 방문하여 니광난과 교류했고, 그 자리에서 그에게 객좌연구원으로 2년간 와달라고 초청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와 같은 정부에서 자금지원하는 채널을 통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캐나다 사람들은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 외국교수에 대한 대우를 그대로 해준 것이었다.

 

당시 오타와의 중국유학생과 방문학자는 모두 합쳐서 20명이 되지 않았는데, 서로 잘 알았고, 함께 만나서 고향생각을 하곤 했다.

 

니광난은 보통 참가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또 한명의 청화대학의 '자비유학생' 쩡(曾)군이 왔다. 그는 Lee교수가 청화대학을 방문했을 때 마음에 들어했고, 그에게 전액장학금을 주면서 오타와로 데려온 것이다.

 

나는 공항으로 쩡군을 마중나갔다. 그는 50달러를 가지고 왔다. 나는 니광난에게 부탁했다: "우리 중에는 당신이 돈이 있는 편이니, 그에게 좀 빌려줄 수 있겠느냐?" 니광난은 두말 하지 않고 바로 돈을 빌려주었다. 쩡군은 나중에 박사가 되어 핵발전소의 안전전문가가 되었으며, 나중에 국제원자력기구의 전문가팀장이 된다.

 

나는 니광난에게 과학원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컴퓨터를 한다고 했는데, 다른 구체적인 내용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2년이 지났다. 1983년 니광난은 귀국해야 했다. 나는 그를 배웅했는데, 깜짝 놀랐다.

 

국제선항공노선에는 단지 30킬로그램의 화물만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물건은 산더미만했다. 큰상자, 작은상자 모두 원래의 포장 그대로였다. 나는 그에게 무슨 가전제품을 이렇게 많이 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돈은 모두 이들 설비를 사는데 썼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가져갈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컨테이너로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아들에게 장난감을 같이 부치자고 했고, 두 개의 A4복사지 종이상자를 주었다. 또 다른 츄(邱)군도 두 개의 종이상자를 같이 보냈다. 츄군은 나중에 과기부의 수석과학자가 되었고, 컴퓨터의 밀레니엄버그문제를 해결하는 책임을 맡았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니광난은 모든 돈을 연구설비를 사는데 썼다. 컴퓨터연구소로 가져가서 컴퓨터연구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건 8만달러어치나 되었다. 1983년에 컴퓨터연구소에 8만달러가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모든 '개인돈'을 공용으로 썼다. 이건 너무나 이타적이 아닌가? 과학자의 흉금은 나를 아주 자잘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수십년동안, 내가 알고 있는 해외유학생은 수천수만이다. 그러나 모든 재산을 털어서 과학연구를 위해 컨테이너를 가득 채울 정도로 연구설비를 구매한 사람은 니광난 한 사람뿐이다.

 

니광난은 사람을 불러 몇개의 큰 나무상자를 만들었고, 다시 컨테이너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게 했다. 화물이 천진항구에 도착했을 때, 나의 처와 츄군의 가족들도 함께 아침 일찌감치 니광난과 함께 항구로 갔다. 그때는 고속철도 없었고, 길은 울퉁불퉁했다. 니광난이 어떻게 군대의 큰트럭을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방군전사가 운송을 도와주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나중에 내가 귀국하니, 니광난은 이미 원사(院士)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 '컨테이너'는 그로 하여금 롄샹한카(聯想漢卡)와 롄상시리즈마이크로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을 도왔고, 그는 두 개의 국가1등상을 받는다. 그 '컴퓨터회사'는이로 인하여 이름을 '롄샹'으로 지었다. 내 생각에 그 '컨테이너'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런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니광난의 롄샹은 롄샹의 니광난을 해임한다. 쫓겨난 수석엔지니어로서 그의 노동, 지혜, 제품과 지적재산권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투입한 '하드웨어' 컨테이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란 말인가?

 

못난 과학자가 아닌가. 지금도 내가 그에게 물으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입으로 '반도체, 반도체!'만 되뇌길 뿐이다.

그 후에 나는 중관촌관리위원회의 부주임이 되었다. 다른 능력은 없지만, 창업자를 위해 서비스했다.

 

니광난은 자주 청년창업자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마치 뭐에 씌인 것처럼 반도체와 운영시스템만 생각했다. 마치 말년의 아인슈타인이 '통일장'에 그렇게 집착했던 것처럼.

 

다시 그 후에 니광난은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리더레이(李德磊)를 만나 반도체사업을 한다.

 

그들은 다시 유명한 '벤처캐피탈의 대부'라는 실리콘밸리의 거물 오라클(Oracle)과 Cadence의 회장 Don Lucas를 끌어들인다. 나는 다시 부시장을 만나서, 그의 명을 받아 베이칭루(北淸路)에 집적회로학원(集成電路學院)을 건설한다.

 

오라클은 큰 컨테이너로 300세트의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선진적인 서버설비를 보내오고, Cadence는 가장 선진적인 EDA기술을 제공한다.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실렸있는 엔지니어가 중국으로 와서 현장지도를 했다(그때 중관촌과 실리콘밸리는 아주 가까웠다. 미중관계가 괜찮았었다....), 베이징시는 강의동, 실험실, 기숙사를 건설해주었고, 12만평방미터의 현장에서는 밤낮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목표는 3년내에 중관촌에 2000명의 고급 IC설계인재를 배양해내는 것이었다.

 

니광난과 리더레이는 고문으로 초빙되고, 관이위원회의 다이처장(戴處長)은 중국측 원장이 되고, 우리는 모두 개교식에 참석한다. 

 

여기까지 얘기하다보니, 탄식만 나온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원인으로 리더레이의 반도체회사는 실패했고, 사람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부시장의 IC학원도 실패했고, 12만평은 당교(黨校)에 넘겨주게 된다.

 

중관촌의 십여개 반도체회사는 속속 사업을 접고 업종을 전환한다. 무슨 감시카메라를 한다거나 지문인식가드나 안면인식쪽으로 넘어갔다. 어떤 사람은 캘리포니아와 와세다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도대체 왜?

 

니광난은 다시 외톨이가 된다. 매일 중관촌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반도체, 반도체!'라고 얘기한다. 보는 내가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나도 은퇴를 했고, 그와 길거리노점에서 만나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차로 모시겠다고 했더니 굳이 거절하고, 81세의 나이로 자전거를 타고 왔다. 나는 그에게 요즘 몸은 어떤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니광난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처도 몇년전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외국에 있다. 그래서 지금 혼자 산다. 중국과학원에서 분배해준 집은 계단을 걸어올라가야 하는데, 내가 걸어올라가기 힘들어 세를 주었다. 한달에 8천위안을 받는다."

 

자신은 우다오커우(五道口)에서 1층의 3칸자리 작은 집을 빌려서 살고 있다고 한다. 아이가 돌아오면 잠시 같이 지낼 수도 있고, 제자가 방문하면 대청에서 토론회도 할 수 있다고 한다. 한달 임차료가 12,000위안인데, 자신의 원사급여가 1만위안이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파출부를 불러서 매일 정오에 식사를 준비해준다. 남은 것은 저녁에 먹고, 아침에는 스스로 우유와 달걀을 먹는다. 별로 많이 먹지도 못한다." 나는 그에게 보모를 쓰면 어떠냐고 말했더니, 너무 비싸다고 하면서 스스로 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낡은 자전거는 버려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겠는게, 어찌 팔십노인이 타고 다닌단 말이냐고 했더니, 그는 아이처럼 나를 향해 웃으면서 이리저리 흔들거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는 길에 안전할지가 걱정될 정도였다.

 

2018년 국가에서 니광난은 "최우수과학기술인"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TV다큐멘터리 <불로인생(不老人生)>을 제작했다. 내가 전화를 걸어 축하했더니, 그는 "늙은이가 우수하면 어떻게 우수하지 않으면 어떠냐. 나는 그저 반도체만 얘기할 거다."

 

오호

 

이것이 바로 40년전 컨테이너에 설비를 실어 보내 국가에 보답하려던 니광난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중국의 최고수준의 컴퓨터전문가 니광난이 아닌가

 

중관촌은 당신에게 그렇게 홀대했는데, 어떻게 원망의 말 한마디조차 없는가?

 

평생 조국의 핵심기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오해받고, 모욕당하고 조롱당한단 말인가?

 

"운명의 앞길이 머리가 부딛쳐 깨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

 

운명의 비극인물이다.

 

노원사가 이렇게 '낙백(落魄)'한 것을 보면서, 또한 계속하여 '반도체, 반도체'를 되뇌이는 것을 보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마음 속으로는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 장사영웅루만금(長使英雄淚滿襟)"(전쟁에 나서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다니, 영웅의 눈물이 옷깃을 오래 적신다)의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속인이다. 목까지 나왔던 말을 결국 하지 못하고 삼켰다: "옛날에 당신이 렌상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설사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그마한 방을 임차하고 저녁에는 남은 음식을 먹지는 않았을 것아닙니까? 다른 사람을 보십시오."

 

다행히 니광난 같은 사람들의 업적은 중관촌에 높이 솟아 있다.

 

일찌기 중관촌 왕용민(王永民)의 오필자형(五筆字型) 입력법, 니광난의 롄샹한카저장장치와 롄샹마이크로컴퓨터, 왕쉔(王選)의 컴퓨터한자레이저사진식자, 왕지즈(王緝志)의 쓰통(四通)한자인쇄기, 그리고 츄보쥔(求伯君)의 WPS사무용소프트웨어는 중국의 완전한 '컴퓨터한자화'시스템기술을 형성했고, 중국인들의 한자로 정보시대를 따라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중관촌의 제1세대는 너무 강했다. 위대한 공헌은 중관촌의 명성을 만들어냈다. 위대한 공로는 어떻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기술이 얼마나 발전하든, 롄샹, 바이두, 샤오미, 인터넷구매, 공유자전거, 배달, 틱독, 메이퇀, 핀둬둬, 이 모든 것의 원류는 중관촌선배들이 닦아놓은 길이라 할 것이다.

 

그저 니광난같은 사람들은 아주 가난하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조리 국가와 인민에게 바쳤다.

 

고산앙지(高山仰止)이다!

 

니광난에게 존경을!  중관촌의 선배들에게 존경을!

 

[후기]

 

이 글은 나의 역작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쓴 글 중에서 가장 널리 전파되고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글이다. 1시간반만에 쓴 원고이고, 오탈자도 고치지 않았는데, IT그룹, 지역그룹, 가정그룹, 은퇴그룹, 동창그룹, 먹고마시고놀고즐기는그룹, 각종공용계정에서 '순식간에 인터넷을 폭발시켰다'

 

국내외에도 1주일간 널리 퍼졌으며, 대다수의 댓글은 '보면서 울었다'라는 것이었다.

 

[재후기]

 

몇년전 니광난의 제자인 량닝(梁寧)이 쓴 <국산반도체칩과운영시스템에 관한 옛 이야기>라는 만자에 이르는 장문의 글에서 니광난의 당시 역사와 힘들었던 점을 언급했다. 

 

나도 댓글난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이 글을 읽으니,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 거의 소리내어 울 뻔했다. 패병지장(敗兵之將), 패장지병(敗仗之兵), 슬프지 않을 수 없다."(이 댓글은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아 제일 앞에 놓였다)

 

중국의 반도체길은

얼마나 비장(悲壯)하고

얼마나 간난(艱難)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