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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치파오(旗袍)"의 진실된 역사...

by 중은우시 2023. 3. 6.

글: 주한경(周漢卿)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 글은 관련전문가들이 쓰도록 남겨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났지만, 필자는 그 어느 전문가/역사학자/근대사전문가/의류전문가/지식인/작가들도 치파오의 진정한 역사를 쓰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정본청원(正本淸源)하기 위하여 남자인 필자가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치파오(旗袍)는 "장삼(長衫)/치파오(祺袍)"의 오해이다. 그 이름은 오랫동안 "치파오(祺袍)" 혹은 "장삼"으로 불려왔다. 영문으로는 cheongsam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장삼'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장삼'이 원래 이름이다. 그런데 왜 치파오(祺袍)로 바뀌었다가 다시 치파오(旗袍)로 바뀌게 된 것일까? 간단하다면 간단한데, 복잡하다면 복잡하다.

 

1644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한 후, 한족 남자의 복식은 "장포(長袍)"였다. 이는 관복과 전통한복(漢服)이 결합한 것으로 상의와 하의가 결합된 것이었다. 한족여자의 복식은 "삼(衫)"이었다. 이는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진 복장이다. "남포여삼(男袍女衫)"은 이백여년간 지속된다. 한족중에 남자는 삼을 입지 않고, 여자는 포를 입지 않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여장포(女長袍)는 기녀(旗女, 팔기의 여자)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회에서 컨센서스를 얻는다. 여자가 포를 입으면 반드시 기녀(旗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녀가 입는 옷은 분명히 '포'였다. '기녀(旗女)'와 '기포(旗袍, 즉 치파오)'는 중국인들의 사회에서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게 된다.

 

1912년 청나라가 무너지고 민국이 건립된다. 중국사회는 서방을 따라가서 남녀가 입는 옷에 이미 제한이 없어진다. "5.4신문화운동"시기에 서방의 여권주의가 중국으로 전래된다. 상해의 상류사회여성들은 남자의 의복을 입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이유는 이러했다: 남녀평등인데, 남자들이 입는 옷을 우리 여자가 왜 못입는가?

 

그리하여, 상해의 여자들이 남자의 '장포'를 입기 시작한다. 중국남자들은 이것을 '대역무도'한 일이라고 여겼고, 각종 신문에서는 상해여자들의 이런 행동을 비난했다. 다만 상해 조계지역은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었고, '장포'를 입은 상해여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때 장포는 '남녀평등'의 상징이 되어, 많은 여성들이 '장포'를 입기 시작한다.

 

다만, '남녀유별', '남포여삼'은 이미 수백년동안 지속되었고, 일찌감치 중국문화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중국남자들은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여자들이 입은 장포를 "장삼(長衫)"이라고 부르게 된다. "장삼"은 바로 이런 형태의 의복의 본명이다. 외국인들은 그 음을 따서 cheongsam이라고 번역한 것이고.

 

중국여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국인들도 남녀평등인데, 중국인은 왜 남녀유별인가. 우리 여자들이 입는 이런 옷은 너희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장포'라고 불러야 한다. 왜 이름을 고친단 말인가? '남녀유별'은 무슨 개소리인가. 우리 여자들이 입는 것도 '장포'이다.(이건 필자의 소설이 아니라, 확실히 민국시대의 신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하여, '여장포(女長袍)'가 상해 상류층여인의 복장이 된다. 1920년대, 중국과 서방의 관계가 점점 밀접해지면서, 상해의 여인들은 의복의 '미관(美觀)'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전에, 여자들이 입은 것은 남자의 '장포'였고, 몸매를 드러내지 않았기 떄문에 겉으로 보기에 남자들과 같았다. 만일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지만 않았더라면. 

 

이 시기 여성지식인들은 구미의 원피스와 중국의 장포를 결합시켜, 일종의 보기에 아름다운 복식을 설계해낸다. 특징은 장포와 비슷하지만, 허리부분이 좁고, 가슴부분이 드러나며, 발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여성지식인설계사는 이런 복장을 "장포"라고 불렀다.

 

이렇게 허리가 좁은 장포가 세상에 나오자, 상해와 강남을 풍미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점차 중국의 모든 대도시로 퍼져간다. 북경까지 퍼졌을 때, "치파오/기포(旗袍)"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남포여삼" "기녀천포"는 수백년이 되었고, 일찌감치 중국인의 인식과 잠재의식이 되어 있었다. 특히 북경에서는 여자들이 장포를 입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리 속의 첫번째 반응은 바로 그 여자는 '기녀'일 것이라는 것이고, 그런 의복은 '기포'라는 것이었다. 

 

1927년이전의 중화민국수도는 북경이다.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수도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예를 들어, 도쿄의 방언이 일본의 국어가 되고, 북경의 방언이 중화민국의 국어가 된다. 북경의 국회, 북경의 정부, 북경의 매체, 북경의 사회여론은 중국사회에 거대한 영향력을 지녔다.

 

그래서, 북경인이 말하는 '치파오"는 이런 의복에 대한 공식명칭이 된다. 수도의 영향력과 권력으로 점차 전국으로 확산된다. "여장포"이건, "장삼"이건, 모두 '치파오'만큼 널리 쓰이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남방 사람들은 이에 불만이었다. 우리 남방사람들은 '반청반만'으로 일어났다. 우리가 설계한 이런 의복을 어찌 "치파오(旗袍)"라고 부른단 말인가? 안된다. 이런 의복을 "장포"라고 부르는 것도 안된다. 그렇다면 한걸음 양보해서 '장삼'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기포(祺袍)라고 불러도 좋다. 우리 남방의 여자들은 절대로 '치파오/기포(旗袍)'라는 단어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1928년, 남경국민정부가 건립되고, 국민정부는 북양정부의 법통과 법렬을 이어받고, 수도를 남경으로 정한다. 국민정부느 북경말을 국어로 받아들인다. 다만 성조는 남방과 북방을 결합시킨다. 국민정부는 치파오를 국복(國服)으로 받아들이지만, 명칭은 '기포(祺袍)'로 한다.

 

"기포(祺袍)"는 여장포의 정식명칭으로 지금까지 쓰여오고 있다. 다만 1949년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가면서 "기포(祺袍)"라는 단어도 대만으로 넘어간다. 중국대륙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치파오(旗袍)"라는 단어를 선택한다. 홍콩은 영국통치를 받아 이런 의복에 대하여 원래의 이름인 "장삼"을 계속 사용한다.

 

개혁개방후, 중국경제가 발달하고, 홍콩대만이 갈수록 중국본토에 의존하면서, 지식계와 영화드라마계도 마찬가지로 각종명칭을 중국대륙의 것으로 바꾼다. 보통화가 국어를 대체한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치파오(旗袍)'가 '장삼'과 '기포(祺袍)'를 대체해버린 것이다.

 

현재 필자와 '민국구인'들만이 여전히 '기포(祺袍)'라는 단어를 쓰고 있을 뿐이다. 

 

'기포(祺袍)'는 원래 여러 종료가 있었다. 해파(海派, 상해스타일)기포, 경파(京派,북경스타일)기포, 소파(蘇派, 소주)기포, 월파(粤派, 광동)기포, 현대기포등등. 다만 경파기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기포는 중국여성지식인들의 지혜의 산물이고, 만청과는 관계가 없다.

 

신문화운동으로 여성들이 남자의 장포를 입기 시작한다. 아래 사진을 보라:

 

1920년대 여성화된 장포(장삼,기포)는 아래 사진을 보라.

1930.40년대의 서구화된 여장포(장삼/기포)는 아래 사진과 같다.

21세기 현대여장포(장삼/기포)는 아래 사진과 같다.

민국초기 여성설계사들은 그들이 설계한 이런 의복을 '장포'라고 불렀다. 필자는 그들의 원래 뜻을 존중하여 이런 의복을 '장포'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이들 민국여성의 자유, 평등정신은 오늘의 중국인들이 아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