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로(思蘆)
<두개 세계의 전쟁: 동서방 2,500년의 싸움(Worlds at War: The 2,500 year struggle between east and west)>는 미국의 역사학자 Anthony Pagden이 2008년에 쓴 책이다. 이 책의 동서방은 유라시아대륙의 동서부분 즉 유럽과 아시아를 의미한다. 광의의 서방은 유라시아대륙을 넘어, 영미를 대표로 하는 서방문명이다. 작자는 페르시아-그리스전쟁부터 동서방간의 전쟁사를 이야기한다. 동서방간에 존재하는 영원한 적의 및 지속적인 충돌의 근원을 분석한다. 동서방의 실력이 교차하는 역사와 원인에 대하여 상세히 분석했다.
작자는 많은 서방의 문명은 동방에서 기원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서방문명의 발원지는 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지역이고, 서방의 기독교도 중동의 유대교에서 기원했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기원은 중동이다. 심지어 나중에 유럽 확장주의의 핵심특징이 되는 보편주의도 페르시아의 제국확장에서 기원한다. 십자군정벌의 이념도 역시 이슬람교의 성전이다.
책에서 페르시아-그리스전쟁의 쌍방과 오늘날 동방, 서방의 대치가 약간 비슷하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방대한 동방독재주의, 다른 한편으로 분립된 도시국가(규모와 자원이 극히 유한하나. 자유로운 개인으로 사기가 높다). 쌍방의 병력대비는 10:1이상이다. 역사상, 정신역량의 규모수량에 대한 우세가 지금처럼 명백한 적도 없었다.
그리스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의 가장 큰 특징을 맹종과 반항정신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통치자를 경외하며, 그를 신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비록 페르시아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용맹하고, 흉악해보이지만, 실제로는 탐욕스럽고 노비근성이 심하며, 존비(尊卑, 아랫사람 윗사람)를 따지며, 사고가 편협하며 개인적인 능동성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라기보다면, 그들은 단지 한 무리의 양떼라고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동방인들은 공포로 움직이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민족으로 본다. 동방통치자의 통치수단은 서방의 군주국가처럼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공화국처럼 여러 미덕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수단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한 페르시아의 장군은 그의 그리스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페르시아인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왜 대응책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친구, 신이 결정한 일을 사람이 어떻게 막겠는가.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총사령관의 명령을 들어야만 한다. " 동방인들이 바꿀 수 없는 사정에 직면했을 때의 피동적인 심리상태를 말해준다. 또한 페르시아인들이 국왕에게 좋지 않은 진상을 얘기해야 했을 때의 두려움도 드러난다.
헤로도토스는 말한다.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그리스전쟁에서 패배하기 전에, 일찌기 한차례 '정체변론(政體辯論)'이 있었다고. 그들은 그리스인의 민주적통치방식을 채택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거절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페르시아전통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페르시아인들은 기꺼이 '이민족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이집트의 방식에 한해서였다. 만일 자신의 전통을 버려야 한다면, 그들은 불평불만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여겼다. 이런 종족중심주의는 그들을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 외부의 여하한 방식의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전통과 습속에서의 결점도 보지 못한다. 또한 그것을 고치거나 환경에 적응하도록 만들 수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최종적으로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서방에 생활하는 각 민족들은 자주 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공통점도 있다. 그들은 자유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긴다. 그들은 법률에 복종한다. 그리스인은 자유롭게 논쟁을 하고, 모든 사람은 법률 앞에 평등하기 때문에, 우수한 전사가 될 수 있었다. 노예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책임을 도피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자신의 뜻과 이익에 위배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자유인은 설사 그들의 도시를 위하여 싸울 때라도 실제로는 여전히 그들 자신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테르모필레, 마라톤과 살라미스전투는 유럽의 영원한 자유를 확보해주었다. 만일 크세르세스가 승리했다면, 페르시아인들이 그리스를 점령하고, 그리스도시국가는 페르시아제국의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의 희극도 없고, 그리스의 과학도 없으며,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소크라테스도 아이스킬로스도 없었을 것이다.
갈리아인이건, 스페인인이건, 아니면 이집트인이건, 모두 그 유명한 문구를 얘기할 수 있다: "나는 로마시민이다(civis Romanus sum)". 그러면 더 이상 자신의 출신지방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로마시민도 불공정한 재판하에서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인민에 호소할 수 있고,' 황제는 바로 그 대표자이다. 고대세계에서 로마시민만이 인신보호령과 유사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고, 함부로 재판받아 처형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로마인들이 전세계로 확장해간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주민들이 로마인의 품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마치 나중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법률적으로, 로마시민의 신분은 통일된 신분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사항이 있다. 그것ㅇ느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권리에 상당한다. 법률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의 자유와 정의의 기초였다. 다만 권리(그것은 아마도 서방세계 모든 정치와 법률단어중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의 개념은 결국 로마인들이 발명한 것이다.
정복은 쉽다, 그러나 통치는 어렵다. 통치는 피통치자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설사 그들이 억지로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로마인은 자신이 방대한 제국을 장기간 관리해온 경험에 따라, 복잡한 법률체계를 만들어 낸다. 제국의 확장과 더불어, 그것은 전체 유럽의 법률이 된다. 이는 로마인들의 위대한 지식성과이다. 그리스인들이 도덕철학과 자연과학분야에서의 성과에 비견될 수 있다. 로마법은 십이동판법에서 기원한다. 그이후 모든 관습법은 입법의 기초가 필요하고, 성문법전의 형식으로 반포된다. 그것은 로마와 나중에 영미로 대표되는 모든 서방국가내에서 승계된다. 법률은 세속적이고 독립적인 것이다. 이 점은 아시아의 절대다수의 민족의 법률과 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율법과 중국황제의 조서와 다르다. 로마법은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조정할 수 있따. 그 원인은 나중에 로마의 법학자들이 여러번 강조하는 걱처럼 '법률은 사실에서 오기 때문이다' 법률의 기초는 관습과 실천이다. 즉 "인민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이다(vox populi, vox dei)" 신의 목소리로 인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초는 이론이 아니라. '사물의 경험'이다. 사실과 존재의 성격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수정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은 비록 인류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근거하는 것은 성문의 관습법이 아니라 신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치기가 어렵다. 신, 특히 하나의 종교내에서의 신은 고치는 것에 익숙치 않다.
대부분의 기독교도는 하느님이 사람에게 자유롭게 이성을 운용하도록 허락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행복과 인류의 성취를 달성할 수 있는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진정 중요한 것은 이성과 자유의지, 개인선택의 권리와 능력이지, 신의 명령은 아니다. 기독교는 세속적인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한다. 유대교이건 고대의 다신교이건 유사한 구분은 없다. 어느 정도 모순적인 점이라면,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두개의 본질적으로 세속적인 것과 이교도의 개념이 계속 기독교의 핵심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전인류의 보편주의와 개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포함한다.
서방의 다툼은 약점이 아니다. 진보는 내부충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일 칸트가 말하는 '비사회의 사회성'이 없다면, 즉 모든 사람에게 경쟁욕망이 없다면, 과학진보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여하한 진보도 없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유럽인들은 장기간 피하지 못한 불안정성은 바로 그들에게 최대의 장점이 되었다. 그들의 전쟁, 끊임없는 내부투쟁, 종교논쟁, 이런 것들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지식발전의 필수조건이다. 아시아의 이웃국가들과는 달리, 지식의 증가는 그들로 하여금 형이상학적인 탐구태도로 자연을 대하고, 이는 역으로 그들에게 그들 생활하는 세계를 개조하고 통제할 능력을 가져다 주었다. 로마역사학자인 살루스티우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공화국을 유지한 것은 문명세계의 통일이 아니라, 로마내부의 평민계층과 귀족계틍의 투쟁이었다. 자유는 충돌하면서 번영한다. 그것은 진보와 인류환경의 지속적인 개선을 가져다 준다. 과학, 지식과 예술은 경쟁을 장려하고, 변론의 가치를 인정하고, 암기가 아니라 이해를 중시하고, 사람의 자유로운 교류를 격려하는 사회에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이런 품성을 가졌고, 여러 중요한 방면에서 그리스인의 계승자인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유럽의 천부(天賦)가 된다.
물샐틈없는 신권(神權)은 사회를 저해한다. 오스만이 인쇄술을 도입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그렇게 인쇄된 코란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시계를 도입하게 된다면, 그들의 아잔(adhan)이나 오래된 의식은 권위를 상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이슬람교의 지위와 코란의 순결성에 위협이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적대시함으로 인하여 유럽의 의학과 다른 과학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슬림의 머리 속에는 데카르트,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작품은 루터와 칼뱅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모두 잘못된 것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일단 무슬림이 평등, 개인자유, 자아표현의 권리와 기타 서방세계의 단어를 지지하도록 설득당하게 되면, 그들은 이전의 생활방식을 원시적이고 잔인하다고 여기게 된다. 대화와 상호이해 자체가 또 다른 형식의 서방화이다.
동서방은 지리를 초월하여 관념상의 차이가 있다.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오랫동안 동방유목민들에게 통치되었다. 그리하여 아주 강력한 동방전제군주주의의 색채를 띄고 있어,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북방의 터키"라고 불렀고, 아시아의 일부분으로 여겼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그들 '동방'의 이웃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흡수했다. 그들은 무지하고, 싸우길 좋아했으며, 행동거지가 거칠어 볼테르가 말한 견해에 생생한 사례를 제공한다; 전제주의는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을 노예로 만든다.
중국문명은 정체되고 지나치게 형식을 중시하고 따져서, 혁신이나 발전할 수 없었다. 마치 알프레드 테니슨이 말한 것처럼 "유럽의 오십년은 중국의 천백년보다 낫다." 중국은 변하려 하지 않고 세상과 단절된 제국이었다. 각 행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오래된 체제의 원칙에 따라 통치된다. 그들 간에는 경쟁관계까 아니라, 극도의 복종관계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른 형식으로 전제군주에게 통치당했다. 그들의 정부계통은 종교 혹은 준종교의 속박을 받았다. 그들의 사회는 집단으로 구성되고 개인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무슬림은 그들의 코란을 보고, 중국인은 그들의 역사와 성인의 저작을 보았다. 공자는 자신이 절대로 정확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품은 모하메드의 작품과는 다르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중국사회는 이슬람사회보다 현대적이다. 다만 보스포러스해협에서 중국남해에 이르는 전체 아시아는 모두 자신의 얼굴을 철저히 과거로 향하고 있다.
시진핑은 천박하고 무지하며, 졸부의 심리상태를 지녔다. 조금 부유해지면 미친 듯이 날뛴다. 세계의 국면이 동승서강(東昇西降)이라고 여기고, 현재는 중국이 세계질서에 도전할 때라고 여기며, 세계패주의 지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와 현실을 돌아보면, 현대 동서방의 실력은 소프트파워에서나 하드파워에서나 동승서강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치인설몽(痴人說夢, 미친 자의 꿈이야기)에 불과하다. 오늘날 중국과 서방의 하드웨어실력을 비교해보면, 역사상의 페르시아제국, 몽골제국, 오스만제국처럼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소프트파워에서 본다면 동서방의 관념의 차이와 체제의 차이는 실질적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시진핑이 만일 미쳐날뛴다면, 옛날 페르시아전함이 살라미스해전에서 대패하고, 오스만제국이 비엔나포위후에 와해된 것이 바로 전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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