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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중국은 세계관을 바꿀 수 있었던 4번의 역사적 기회를 모두 놓쳤다.

by 중은우시 2023. 2. 3.

글: 갈조광(葛兆光)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복단대학의 교수 갈조광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얘기할 주제는 고대의 중국인들은 어떻게 세계를 인식했는지, 이런 세계인식의 관념과 방법이 역사상 바뀌어질 기회는 없었는지, 이런 관념과 방법은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입니다.

 

간단하게 얘기해보면, 고대에 특히 선진(先秦, 진시황의 천하통일이전)시대에 이미 고대중국인들은 중국을 인식하는 약간의 특색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고대 중국인의 상상 속에서 천하는 구주(九州)와 그 주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주는 소위 기주(冀州), 연주(兖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양주(梁州), 옹주(雍州)이다. 대체로 현재 중국의 핵심지역혹은 주로 한족인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다음으로 무엇이 주변인가. 그것은 그들이 보기에 주변에 사는 야만인들이다. 거기에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 포함된다. 고대 중국인의 생각 속에서 이 오방지민(五方之民)의 본성은 고쳐지지 않는다. 문명인은 문명인이고, 야만인은 야만인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생각은 야만인들은 문명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주변의 이들 오랑캐들은 문명인 화하에 공물을 바치고, 신하로 복속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선진시대부터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거치면서 점차로 고착화된다. 약간은 오늘날 말하는 유전인자같은 것이 되어서 중국의 전통적인 한족의 심리에 남아있게 된다.

 

이런 고대인들의 "천하관(天下觀)" 혹은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세계관(世界觀)"은 중국의 상징이 되었다. 나중에 한당송원명청을 지나면서 유씨가 황제가 되건 이씨가 황제가 되건 조씨가 황제가 되던, 혹은 주씨가 황제에 오르든 심지어 비한족이 오르든 예를 들어서 쿠빌라이가 황제가 되든 애신각라씨가 황제가 되든 모두 이런 세계에 대한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바뀔 기회도 없었을까? 기실 있었다. 당연히 2천여년동안 중국이 대외교류를 하고, 국제환경이 변화하며, 제국의 강역이 변경되면서 4번은 이런 천하관, 세계관을 바꿀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을 중국에서 벗어나 새로이 눈을 열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다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유감스럽지만, 결국 중국의 이런 세계를 인식하는 관념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얘기할 주제는 중국인 혹은 전통중국인의 세계인식에 있어서의 곡절과 좌절이다.

 

먼저 첫번째 기회를 얘기해보자. 첫번째 기회는 중고(中古)시기 개략 기원1세기에서 7세기였다. 중국의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힐 수 있었고, 불교세계관이 도입되었다. 중고시디, 세계지식에서 가장 중요한 원천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족중국인이 활동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장건이 서역으로 간 것이라든지, 나중에 반초가 서역으로 간 것이라든지, 거기에 서부북부의 각종 비한족, 예를 들어 흉노, 선비, 돌궐, 회흘등이 한족중국의 핵심지역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중국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크게 넓혀주었다.

 

다른 하나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세계에 대한 지식에 아주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불교는 중국 밖에서 왔고, 외래의 불교는 중국에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불교도들은 인도로 가서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 그들도 중국의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었다.

 

이 때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으므로, 중국은 부득이 자신의 주변을 다시 바라보아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 불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문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도가 보기에 인도의 문명과 불교의 문명은 심지어 중국보다 뛰어났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닌 것이고, 인도야말로 세계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최고의 문명이 아니고, 인도야말로 최고의 문명이었던 것이다. 가장 위대한 인물은 중국에서 탄생하지 않았고, 인도에서 탄생했다. 바로 석가모니가.

 

이는 한죽중국에 아주 큰 문화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부득이 눈을 떠서 세계를 바라보아야 했다. 특히 4세기에서 6세기에 중국으로 온 불교도와 인도로 간 중국의 불교도들이 여러가지 중국이외의 세계에 대한 글을 쓰고, 일부 세계기, 외국전같은 서적들도 번역했다.

 

한가지 이야기를 해보겠다. 남조(南朝)때 불가와 유가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전통적인 중국인의 인식 속에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었고, 낙양이 중국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낙양이 대지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낙양에 대응하는 것은 하늘의 중심이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낙양무영(洛陽無影)". 즉 낙양이라는 곳에 막대기를 꽂으면,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떴을 때, 중심과 중심이 만나는 것이므로 막대기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대중국인들은 이것이 당연한 진리라고 여겼다. 낙양이 바로 천하의 중앙이다.

 

그러나, 불교도들이 보기에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낙양은 일년중 하지(夏至) 딱 하루만 태양이 정오때 막대기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는 모두 알다시피 북회귀선이남의 지역에서는 태양이 하늘중앙에 떠 있을 때 대나무를 꽂으면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시간이 북회귀선의 낙양보다 훨씬 길다. 그러므로 이 논쟁이 가져온 하나의 문제는 바로 누가 천하의 중심이냐는 것이다. 천하에 너만이 중심이냐는 것이다.

 

이 논쟁은 100여년간 지속된다. 나중에 모두 알다시피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 아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불교도들과 논쟁하지 않고, 그 일은 한켠으로 미뤄놓고, 여전히 자신의 관념을 견지했다. 여전히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중국이 천하최대의 제국이며, 주변은 모두 아주 작은 오랑캐국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중국에 새로운 세계관과 지식을 가져다 준 것이다. 송나라때까지.

 

그리고 불교도가 편찬한 <불조통기(佛祖統紀)>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는 세 폭의 아주 진귀한 지도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불교도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세계의 세 개의 중심이다. 하나는 동진단(東震旦), 즉 중국이고, 하나는 서역(西域), 즉 지금의 신강, 중앙아시아일대이며, 세번째가 인도이다. 이 세폭의 지도는 나란히 놓았다. 이것은 기실 많은 정도로 전통중국의 세계관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유금스럽게도 불교는 중국을 정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정치는 항상 종교보다 위에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의 지식은 점차 주변화되고, 중국은 세계관을 바꿀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럼 두번째 기회는 무엇이었을까? 두번째 기회는 송(宋)나라때이다. 모두 알다시피 한,당은 세계제국이고, 천하를 웅시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달랐다. 송나라때는 세계의 형세가 바뀐다. 송나라는 당나라와 비교하자면 강역이 절반으로 줄었다. 북방에는 거란이 있고, 나중에는 여진이 있다. 동쪽에는 송나라에 신복하지 않은 고려가 있었다. 고려는 오랜동안 기실 거란에 신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멀리에는 바다건너 일본이 있다. 서쪽에는 당항족이 건립한 서하가 있다. 서남에는 토번과 대리가 있다. 남쪽에는 안남이 있다. 쪼그라든 대송제국은 점차 아시아각국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중고시대의 한,당의 방대한 자아중심의 천하제국은 이때 이미 역사속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게 된다. 당시의 중국은 이미 축소되어 있었다.

 

필자의 기억에 전종서(錢鍾書) 선생이 아주 멋진 비유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송나라때 중국은 이미 8자의 대상(大床)에서 3자의 행군상(行軍床)으로 바뀌어 있었다. 밖에는 강대한 여러 나라들이 병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송나라는 바다를 등지고 나라를 세웠고, 중심을 남으로 옮겼다. 바로 이때, 송나라는 분명하게 내외의 관계를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내(內)와 외(外)를 구분하고, 점차 새로운 세계인식을 가지게 된다. 

 

첫째, 당시의 한족중국인은 분명 외국존재의 합리성을 인정했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오랑캐가 아니라 자신과 대등한 국가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모두 알고 있었다. 거란과 여진이 건립한 요와 금은 심지어 지위가 한족의 송보다 높다는 것을. 송나라사람들은 점차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즉 우주에는 음이 있고 양이 있다. 천하에도 중(中)이 있고 외(外)가 있다. 이것이 첫번째이다.

 

둘째, 사람들은 과거의 관념을 바꾼다. 과거 중국인들은 지리적으로 구주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천문학적 의므에서 천상의 28성수(星宿)는 모두 중국의 '분야(分野)'와 일대일로 대응되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두 곳에 모두 중국만 있었다. 그러나 이때 송나라사람들은 중국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외부의 세계는 아주 크다. 대지의 위에 하늘의 아래에 아주 많은 외국의 이민족이 있다. 28성수에 대응하는 분야부터 중국도 있고 외국도 있다. 이것이 두번째이다.

 

셋째, 서방과 북방의 강력한 적국에 압박을 받았다. 사람들은 점차 중국이 가장 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서서히 '사이(四夷)에 대하여 즉 소위 야만족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된다. 그리고 송나라때는 교류중심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바뀌고, 육지에서 해상으로 바뀐다. 역외에 대한 지식도 갈수록 많아졌다. 송나라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사신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것을 가지고 대량의 외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송나라때 무역관리를 책임지는 시박사(市舶司)의 관리는 동해, 남해 심지어 더욱 먼 지방에 관한 기록문헌들을 남긴다.

 

이때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관점이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아주 아이러니하다. 송나라때의 이런 새로운 관념은 역사학내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나중에 역사에서 점차 사라져 버린다. 그 원인은 아주 복잡하다. 여기에서 자세히 애기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들이 주목할 것은 이후 송나라의 강역과 백성을 기본적으로 승계한 명나라도 여전히 천하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본국에 축소해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즉 화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런 세계관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세계관을 바꿀 세번째 기회는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세계제국을 형성한 몽골 원나라때이다. 당시의 몽골인, 아랍인, 페르시아인과 중앙아시아인은 세계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중국인들에게 아주 새로운 시야를 가져다 준다.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중국에서는 몽원(蒙元)시대로 부르는데, 그 시대는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몽골인이 통치아였다. 이는 세계관을 바꿀 기회였다. 당시 몽원은 전체 중국을 점령했고, 원나라의 비서감은 제국의 최고중앙문화기관이었다. 일찌기 대제국의 통일역사와 대제국의 통일지도를 만든 바 있다. 통일대상에는 한족중국도 포함되어 있었고, 몽골이 정복한 유라시아의 각각의 방대한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한 회회(回回)학자가 있었다 페르시아인으로 자말알딘(Jamal al-Din)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쿠빌라이 즉 원세조에게 글을 올린 바 있다. 변방지방의 사서와 지도를 모두 대도로 모으자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에게 아랍인, 페르시아, 중국남방인, 북방인을 모아서 대제국의 통일역사와 대제국의 통일지도를 만들자고 한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이 시기의 중국의 세계관은 이미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몽골인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세계문헌 속에 아주 중요한 초기의 지구의(地球儀)는 바로 원나라때 자말알딘이라는 페르시아인이 가져온 것이다. 이 지구의는 실제로 이미 중국인들에게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또한 30%가 육지이고, 70%는 바다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지구의에는 경위선도 있었다 '소방정(小方井)'이라고 불렀다. 소방정을 그리면 바로 경위선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육지위에 강과 호수등도 그렸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고, 새로운 세계지식이다. 지구는 둥글다. 이런 새로운 지식이 이미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만일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실제로는 조선인이 그린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도는 몽원시기의 것이고, 중국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도 이 지도와 마찬가지였다. 이 지도를 보면 아주 놀라운 점이 있다.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지도에 아프리카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아주 정확하게 아라비아반도가 그려져 있고, 유럽도 있다. 그 안에는 로마도 있고, 파리도 있고, 바그다드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새로운 세계지식은 몽골시대가 끝나면서 금방 사라져버린다. 중국전통의 중국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한족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주변의 사이는 오랑캐라고 보는 관념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미네소타대학 도서관에 보관중인 <곤여만국전도> 1602년

그렇다면 네번째로 중국의 세계관을 바꿀 기회는 무엇이었을까? 명나라말기 선교사들이 새로운 세계지도와 세계지식을 가져다 주었을 때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명나라중후기 즉 16세기말, 17세기초에 유럽의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온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마테오리치(1552-1610)이다. 그는 광동의 조경(肇慶)에서 산해여지도(山海輿地圖)를 하나 그린다. 그것은 유럽의 세계지도에 근거하여 그려낸 세계지도였다. 이 세계지도는 오늘날의 세계지도와도 이미 아주 비슷하다.

 

이 세계지도는 나중에 명나라중후기에 큰 영향을 끼친다. 나중에는 심지어 황제도 태감들을 시켜 이 지도의 모양으로 6폭병풍의 <곤여만국전도>를 그리게 했다. 이 <곤여만국전도>는 현재 남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바티칸, 한국에 각각 한폭씩 보관되어 있다. 

 

이 지도가 가져온 새로운 세계지식은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왜 그랬을까? 그 지도는 중국인들에게 다음의 몇 가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 세계는 아주 크다. 중국은 그저 아세아의 1/10이고, 아세아는 세계의 1/5에 불과하다.

 

둘, 대지는 전통중국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중앙도 없고, 그저 원이다. 원에서는 중심이 없다.

 

셋,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세계에는 나라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만국이 병립해 있고, 또한 여러 종류의 문명이 있다. 중국만 문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각각의 문명도 매우 발달되어 있고, 오직 중국만 유일한 문명국이고 나머지 주변은 야만국이었던 것이 아니다.

 

모두 유럽에서 동방으로 온 가장 중요한 사람을 세 가지 유형이다. 첫째유형은 바로 금방 말한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 새로운 신앙을 가져왔다. 둘째유형은 상인이다. 그들은 상품무역을 했고, 동방 즉 동아시아 내순환에서 글로벌 외순환으로 바꾸어 전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셋째유형은 식민지배자이다. 그들은 총포로 또 다른 정치제도와 국제관계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그중 선교사가 가져온 신지식은 기실 중국에 자신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런 계기도 중국을 자신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여전히 전통내에서 변화하는 것에 익숙했고, 양발을 전통밖으로 내딛어 전통을 밖에서부터 바꾸지 못했다. 이는 중국의 전통이 너무 강대했기 때문이고, 중국의 지식체계가 너무나 완전했기 때문일 것이며, 중국의 전통사상관념이 연원이 길고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세계관의 변화는 청나라말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즉 견선리포(堅船利炮)에 의해 중국인들이 어쩔 수 없이 바꿀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중국인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과거학자들이 말하는 중국이 근대로 나아가는 가장 큰 변화이다. 즉, '천하에서 만국으로'이다. 즉 스스로 천하의 중앙이라 여기고, 천하대국이라 여기며, 주변은 모두 오랑캐라고 여기던 것에서 천하에는 만국이 나란히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연결된 국제관계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변화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이런 내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우리는 중국의 세계인식에서의 곡절과 좌절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 첫째, 우리는 마땅히 전통중국의 세계에 관한 견해가 상당히 완고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전통중국인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일너 세계관은 유전인자처럼 문화의 유전인자가 되어 우리가 오늘날 세계를 바라보는데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렇게 여러번 세계관과 신지식이 전래되었지만, 중국에서 지식의 증가는 관념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관념의 변화에는 반드시 부득이 변하지 않을 수 없는 외부요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식사와 사상사는 반드시 함께 가지 않는다. 내부요인은 역시 외부요인에 의존해야 한다. 이 점은 아마도 옛날 존 킹 페어뱅크(費正淸)가 말한 '충격반응론'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아마도 아주 진부한 이론이지만, 진부한 이론이라고 하여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첫번째로 얘기하고 싶다. 

 

두번째, 전통중국세계관의 변화는 중국근대 국제환경과 큰 관계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억지로 끌려가는 피동적이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전통적인 천하중심, 천하제국의 관념은 지금까지도 철저히 바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념의 변화는 역시 외부세계의 충격이 필요하다. 중국고대의 사상전통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너무 일찍 성숙되었고, 아주 계통적이었다. 그래서 여하한 변화도 전체를 바꾸지 못했다. 어떤 나라 예를 들어 일본같이 외부에서 전래되면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신이 말한 '나래주의(拿來主義, 가져와서 쓴다는 뜻)'처럼. 그래서 중국인은이 왜 항상 "체(體), 용(用), 도(道), 기(器), 본(本), 말(末)"을 논했는지, 즉 중국인들은 항상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그래야 관념, 사상과 지식을 전체적으로 뒤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번째는 기실 나는 이런 느낌이 있다. 즉, 만일 중국인들이 중국을 벗어나 새롭게 세계를 이해하려면 여전히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중국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지 이 문제는 실제로 어떻게 자아를 정립하는지, 도대체 자신이' 천하'인지 '만국'인지 '천조'인지 '하나의 국가'에 불과한 것인지를 인식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전통적인 관념을 벗어나 바뀌려면 교재, 교과서와 교육시스템의 개입없이는 세계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모든 사람들을 세계공민의식을 갖도록 배양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