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역사의 흐름과 세계의 질서에서 중국의 위치는...?

중은우시 2022. 9. 19. 15:44

글: 북유독립평론(北遊獨立評論)

 

우리는 중국역사를 해석할 때, 아마도 하나의 고착된 인식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유(漢儒, 한족+유학)을 절대주류로 하는 단일구조제국, 즉 '중원중심론(中原中心論)'이다. 그렇게 하여 다른 더욱 개괄적인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하고 관찰해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히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중국의 고대사는 아마도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원한족, 초원민족, 서역 및 설역고원민족이 공동으로 싸우면서 융합하고, 상호간에 만들어낸 다원일체의 대륙제국이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다원호구론(多元互構論)"이다.

 

이런 시각으로 중국의 근현대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다원호구"의 중앙제국은 근대 서방 해양민족과의 직접적인 접촉에서 혹은 피동적으로 혹은 주동적으로 세계질서에 편입되었고, 서서히 대륙제국에서 해양질서와 대륙질서의 중개의 신분으로 바뀌어갔다.

 

동시에 세기가 바뀌면서, 서방이 혁신경제로 전환하면서, 제조업이 우연히 중국에 맡겨지게 되고, 이렇게 하여 초대규모의 동아시아제조중심이 형성된다. 이렇게 하여 중국은 순조롭게 '경제무역쌍순환구조'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우리가 중국이 세계질서중 차지하는 지위를 살펴보는데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다.

 

우리는 먼저 이 틀을 가지고 중국역사를 다시 해석해보기로 하자.

 

1

 

만일 우리가 '한유' 정통의 중국역사관을 버린다면, 초원, 서역, 고원, 해양과 같이 이전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시아지역도 중국개념을 형성하는 거대한 시야에 들어올 수 있고, 우리는 통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중원한족왕조와 초원유목민족간에 더 이상 침략과 반침략의 단일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상호삼투와 융합의 과정이 있다.

 

비록 이 과정에서 아주 잔혹한 전쟁과 살륙을 피하지 못했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중국역사의 특유한 현상만도 아니고, 세계 모든 민족의 초기역사에서 발생한 일이다.

 

반드시 주의하고 일깨워야할 것은 이 중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하나의 가치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소위 '중국'은 단순히 중원 '한유'의 중국이 아니라. 그것은 마찬가지로 몽골, 만주, 회족, 장족등 모든 민족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정치존속실체인 것이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역대중국정치질서상의 여러가지 합법성문제를 해석할 수가 없게 된다.

 

여기서 한마디 추가하자면, 소위 '역사관'이라는 것은 바로 일종의 해석틀이다.

 

필자는 이전에 말한 바 있다. 좋은 해석틀이라는 것은 그것이 완벽한 틀이어서 모든 역사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한 가지 일만 하면 된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경쟁상대를 이길 정도로 해석력이 비교적 강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의 내재적인 논리를 정리할 때, 우리는 반드시 재정체제, 지리기후 및 기술변천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구속적인 요소들이 중국역사의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초원제국과 중원왕조간의 '상살관계(相殺關係)'는 아마도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문명발전수준의 차이로 하나의 야만과 하나의 문명간에 야만민족이 강탈로 살아가면서 재물이 없으면 남하하여 문명지역을 강탈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런 이해는 아마도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단순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중원과 초원의 관계는 모두 지리, 기후와 재정체제의 거대한 영향을 받는다.

 

먼저, 정신상태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사람은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중원한족도 먹을 것이 있어야 하고, 유목민족도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단지 이들은 생산방식과 생존논리가 서로 다를 뿐이다.

 

농경민족의 장점은 자급자족에 있다. 날씨만 좋고, 자연재해만 없다면, 한족은 먹는 것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유목민족은 다르다. 지리조건이 그들의 생활재료가 아주 부족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주 신기한 400밀리미터의 강수라인이 중국을 남북의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남쪽은 농경지구이고, 북쪽은 초원지구이다.

 

재미있는 것은 장성(長城)의 위치가 거의 400밀리미터 강수선과 겹친다는 것이다. 비록 현대기술이 없지만, 구체적인 원인은 말하지 못했지만, 중국 고인들은 여전히 장기간의 생활상식으로 그 중의 비밀을 통찰했던 것이다.

 

이런 강수선은 천연적으로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활동구역을 구분해주었다. 그것은 유전자나 혈통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지리기후적인 원인으로 생산방식의 거대한 차이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남방의 농민이 이 선을 넘어서, 시간이 오래 흐르면 유목민이 된다. 그리고 원래의 유목민이 이 선을 넘어 남하하여 중원으로 들어가 오래 살게 되면 역시 농민으로 바뀌게 된다.

 

한인과 유목민족이 정말 그렇게 큰 차이가 있었을까? 사실은 아마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기본지식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유목민족이 남하한 진정한 원인과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기후변화 혹은 생활자료의 결핍이 발생하면, 북방민족은 생존을 위해, 무역 혹은 전쟁으로 해결해야 했다. 

 

이 두 가지중에서 확실히 무역은 비용이 훨씬 적게 들고, 사람들의 '추리피해(趨利避害,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피하다)'의 심리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점이라면 중원지구에 제후할거가 나타나면, 각각의 소국은 상호정벌하기 때문에, 앞다투어 초원민족과 거래를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마(戰馬)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중원이 통일되어 강대해지면 왕왕 무역에 간섭하고 심지어 무역통로를 폐쇄해 버린다.

 

무역으로 생존하는 사람들에게 일단 무역이 막히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발로 생각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에 소위 '왜구'가 창궐했다. 기실 왜구는 대다수가 해외무역에 의존하여 생활하던 연해의 중국인이었다. 그 내재적인 논리는 아주 분명하다. 네가 무역을 못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결국 왜구는 어떻게 사라졌는가? 척계광에 의존해서 없앤 것이 아니고, 해금(海禁)을 풀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상인이 될 수 있다면, 바보가 아니라면 목이 날아갈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중원이 통일되어 강대해졌을 때, 왕왕 초원민족이 대거 중원을 침입하게 된다. 이는 마치 중원왕조에게 덧씌워진 마법의 족쇄와도 같다. 

 

누굴 탓할 것인가? 역사의 오해인가?

 

모르겠다. 아마도 역사는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생산력이 저하되고, 기술이 낙후되고, 생존방식이 단일하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없을까?

 

다만, 우리는 최소한 한 가지는 인정해야 한다. 문명이 보급되고, 기술이 진보하고, 생산방식이 발전하면서, 대규모의 생존위기는 기본적으로 이미 인류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것을.

 

2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이 신기한 강수선은 초원민족과 농경민족의 생활방식을 갈라놓았다. 길고 그들이 경제질서와 정치질서에서 상호 통합하지 못하게 막았다.

 

역사적으로, 초원민족의 군사역량은 왕왕 중원에 들어와 제국의 정치질서를 보호하는 중요한 원천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인식해야할 점은 순수한 한족왕조는 한번도 장성남북을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초원민족만이 그것을 해냈다.

 

원인은 두 가지이다:

 

1. 초원제국의 전투력이 웅원제국보다 강하다;

2. 중원제국의 재정능력은 초원의 군사역량을 먹여살리는데 충분하여, 정순환을 형성한다.

 

초원은 연맹제의 정치질서를 답습했고, 통치자의 신분은 대칸(大可汗)이다. 중원지구에서 사용한 것은 유가방식의 통치이고, 통치자의 신분은 황제이다. 동시에 두 가지 통치방식에 정통해야 비로소 장성남북을 아우르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한손에 군사, 한손에 재정.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질서의 붕괴로 이어진다.

 

그래서, 대청(大淸)이 "호로무백년지운(胡虜無百年之運)"의 마의 저주를 깨고 통치를 268년간이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뛰어난 이원제국의 통치수단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즉 초원방식에도 정통하고, 중원방식도 알았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수단을 가졌다고하여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지속으로 안정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면, 최종적으로 안정적인 경제질서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기술혁명이 있어야 한다.  이점을 바로 고대중국과 같이 '내권화(內卷化)'된 사회에서는 실현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내권화"인가?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승다육소(僧多肉少)" 중은 많은데 고기는 적다는 것이다. 노동력이 아주 많아서, 기술혁명을 추진할 내재적인 동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술혁명으로 인한 공업경제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직 농업경제에만 의존해서는 충분한 취업자리를 만들어주기 힘들다. 이리하여 악순환이 일어난다. 전체 사회는 저수준의 발전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권화"이다.

 

이것은 마치 대륙제국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구는 어쨌든 둥글고, 근대의 지리적 대발견으로, 또 다른 논리의 해양질서가 신속히 중앙제국의 주변으로 밀려들어왔다. 중앙제국이 글로벌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3

 

대륙질서가 토지에 중대하게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해양질서가 의존하는 것은 또 다른 생존논리이다: 상업무역.

 

근대세계질서는 완전히 영국이 주도하는 글로벌경제무역체제하에서 건립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낄 것이다: 영국은 조그마한 섬나라인데, 어떻게 그렇게 큰 역량을 지니게 되었을까?

 

그들이 처음부터 전세계를 압도하는 군사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런 역량을 그들이 가진 적은 없다. 그들이 처음부터 글로벌무역을 할 질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사회, 소정부의 민간자치형태;

둘은 보통법의 법률체계의 보유.

 

우리는 아래에서 각각 설명해보기로 한다. 왜 이 두 가지가 해양질서의 개척에 그렇게 중요했는지.

 

대륙경제가 항상 주기적인 쇠퇴를 맞이한 것은 방대한 관료시스템과 군사력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필요한가? 돈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국고로 돈이 흘러들어와야 한다. 일단 재정체계가 무너지면, 대륙제국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근대이전의 대륙제국의 확장은 모두 극한이 있다. 왜냐하면 관리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에 그들의 재정수입으로는 장기간 그런 체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과 같은 해양제국은 어떻게 운용되었는가?

 

농경,목축경제시기에 섬나라가 너무 좁아서, 대륙제국처럼 강대한 육군으로 외적을 방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전체 정치질서는 국왕과 지방귀족이 공동통치하는 구조를 가졌다. 대다수의 공공의제는 모두 민간에서 제기하고, 의회의 의사결정을 거쳤다. 중앙은 권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사회자치조직은 조직능력이나 재정능력이나 모두 강대했었다.

 

농경,목축경지시기에 관하여, 중세기 유럽의 보편적인 사회형태는 필자의 다른 글 "야만의 노르만이 서방문명을 만들었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래서, 근대 지리적 대발견과 산업혁명이후 이들 강대한 사회역량은 신속히 해외시장을 개척한다. 즉 영국의 근대 해외확장은 정부행위가 아니라, 민간행위이다. 여기에 투입되는 거대한 비용은 정부가 부담할 필요가 없었다. 민간역량에 의존하여 진행하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영국근대의 식민지는 대다수가 자치의 모델을 취한다. 점령하지 않을 수 있으면 최대한 점령하지 않는다. 그저 일부 항구와 해상교통거점만 통제하면 된다. 예를 들어, 홍콩, 싱가포르, 희망봉, 지브롤타등등. 왜 그랬을까? 무역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현지인의 통치를 도와줄 수 있으면 절대로 관리를 파견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이다.

 

해양논리와 대륙논리가 다른 점은 그들의 목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해양질서의 관건단어는 무역이다. 그러나 대륙질서의 관건단어는 토지이다.

 

네가 무슨 화려한 정치이론을 만들어내더라도, 너는 결정적인 요소는 결국 모두 인간의 두 가지 욕구에 귀착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생존과 자유

 

대륙의 생존모델은 토지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지가 극히 중요하다. 해양의 생존모델은 무역이다. 그래서 개방이 극히 중요하다.

 

국제정치의 충돌은 대부분 여기에서 파생한다.

 

만일 이에 대하여 깊이있는 통찰력이 없다면, 그저 통속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역사에 대해 해석할 능력이 없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사회소정부의 자치전통외에, 영국인에게는 질서를 타파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다 - 보통법

 

세계에서 채용되는 두 가지 법률체계는 보통법계와 대륙법계이다. 두 가지 아주 간명한 단어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보통법은 "발견"한 것이고, 대륙법은 "발명"한 것이다.  

 

중국에서 채택한 것은 대륙법계이고 동시에 "제정법률, 규범신민(制定法律, 規範臣民)"의 법가전통에 익숙하기 때문에, 영미의 보통법 사고는 아주 낯설다. 중국인 대다수는 잘 모르고 있다. 법률은 분명 사람이 '발명'하고 '제정'한 것인데, 어떻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것은 서방역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전에 중세기 노르만족의 전통을 얘기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중세기 여러 봉건왕국의 권력구조는 파트너쉽관계로 계약을 기초로 한다고. 원인은 바로 중세기의 서로 교착하는 권력국면에서 어느 한 세력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봉건할거. 왕권과 교권이 오랫동안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각 측은 모두 서로 계약을 준수하지 않으면, 더 이상 게임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왕의 실력은 어떤 때는 대귀족만 못했다. 그래서 오래 시간이 흐르다보니 자연스럽게 '왕도 법의 아래에 있다'는 규칙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국왕이 법률에 복종하길 원해서가 아니라, 힘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법은 바로 이런 계약을 기초로, 계속 변화하여 이루어진 법률체계이다. 하나하나의 판례로 형성된다.

 

그래서 '발견'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이들 판례와 법률이 나타내는 것은 어떤 개인이나 어떤 몇몇사람이 종이에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힘겨루기후에 이루어진 계약들이고, 역사의 강물 속에서 서서히 나타난 것이다.

 

반대로 대륙법은 유럽국왕이 날로 강해지면서 로마법의 방식으로 입법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실제로 전달하는 것은 국왕의 뜻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유럽대륙국왕은 이미 강대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어 귀족을 억누를 수 있었고, 군주전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강대한 왕권이 형성되지 못한다, 여전히 노르만의 대사회 소정부의 전통을 유지했고, 보통법계를 잘 보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보통법이 영국의 해외확장에 유리했을까?

 

이것은 바로 보통법은 '발견'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서로간의 힘겨루기, 타협의 산물이다. 천연적으로 보편성과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 습속들 사이에서 공통된 규칙을 찾아내는데 가장 뛰어나다.

 

영국인은 어디를 가더라도 영국법률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방국가에 영국법률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각자의 법률을 유보시켜주었다. 그리고 각자의 법률의 위에 있는 더욱 보편적인 일부 규칙을 찾아내서 모두가 받아들일 수있는 규칙으로 만들었다.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비유하자면, 대륙법은 강매강매(强賣强買)이다. 내가 가격이 얼마라고 하면 얼마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법은 자유거래이다. 서로 흥정을 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욱 환영받겠는가? 누가 더욱 보편성과 실무조작성을 가졌을까?

 

당연히 보통법이다.

 

그리하여, 영국은 각종 민간조직과 상인이 이 두 가지 질서무기를 가지고, 영국의 정치질서와 경제무역질서를 세계로 신속히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전세계에 퍼진 방대한 제국이 형성된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영국정부 자체는 그렇게 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영국정부는 그렇게 큰 돈도 없고, 이는 완전히 영국상인의 모험과 투자행위이고,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확장이 민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확장은 비용이 가장 적게 들면서 효과는 가장 좋았던 것이다.

 

4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리적 대발견과 기술약진으로 해양질서는 금방 중앙제국의 주변까지 밀려들어온다.

 

"내권화"된 중앙제국은 열강의 압박에 고통을 겪고 있었고, 계속하여 '내권화'를 벗어나 출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역사의 기회 앞에서 중국의 최선의 포지션은 해양질서가 아니고, 대륙질서에 남는 것도 아니며, 이 두 가지 질서의 중개와 축이 되는 것이었다. 

 

중국의 초대규모성은 중국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양, 대륙 및 해양육상중개의 3대부분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동부연해지구는 해양질서이고, 서부지구는 대륙질서이며, 중원핵심지역은 중개연결로 동부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부를 대륙지구로 퍼트리는 역할을 한다.

 

이 3대부분자체는 스스로 체계를 이루었고, 이는 중국의 다른 나라가 대체할 수 없는 핵심실력이다. 

 

중국이 세계질서에 편입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홍콩과 신장이 두 개의 관건포인트이다.

 

홍콩의 이원성은 중국으로 하여금 글로벌질서와 효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게 했고, 해양질서로부터의 강대한 자본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신장(유라시아내륙과 불가분의 역사적 관련이 있다)의 이원성은 중국으로 하여금 유라시아내륙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게 해주었다.

 

홍콩과 신장 바체가 가진 대체불가능한 이원성은 중국으로 하여금 양종질서로부터의 자원을 얻게 해주면서 해양질서와 대륙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진퇴가 자유롭게 되며, 이는 중국특징과 국가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포지셔닝이 되는 것이다.

 

5

 

미국학자 임마뉴엘 윌러스턴의 이론틀에 따르면, 이전의 세계경제질서는 '중심-주변'의 구조였다. 이 '중심'은 의문의 여지없이 서방선진국을 가리키고, 다른 국가와 지역은 '주변'이다.

 

산업혁명이래, 중심인 서방선진국은 글로벌의 정치, 경제, 군사, 법률, 기술등 거의 모든 질서를 주도했고, 주변국가는 그저 중심국가의 시장과 원재료공급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서방국가의 강대한 종합실력과 질서유지능력으로 이 상황은 20세기말, 21세기초까지 지속된다. 이 구조는 중국의 신속한 굴기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서방국가는 혁신경제로 전환한다. 제조업은 대량으로 외주를 준다. 마침 이 역사단계에 중국은 분세제와 토지재정을 실시하며 거대한 규모의 공업개발구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 기회를 잡아, 중국은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수준으로 신속히 굴기한다. 그리고 서방제조업대이전에서 최대의 승자가 된다.

 

중국자체는 많은 인구와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어 글로벌제조업이 환중국해지구에서 전세계에 공급하는 제조업기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매체에서 자주 말하는 "세계공장"의 유래이다.

 

글로벌제조업의 대이전으로 나타난 결과는 이러하다:

 

서방국가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국가는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는 격리되어 버린다.

 

무슨 뜻인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가는 공업기초가 낙후되어 있어, 제조업기지를 형성하기 위한 각종 조건이 결핍되어 있어, 전체 생산프로세스에서 그저 원재료를 공급하는 최하단의 지위에 놓이게 된다.  

 

이전의 "중심-주변"의 구조에서, 연구개발, 제조, 판매는 기본적으로 서방국가가 독점하고 지배했다. 서방국가는 이들 원재료공급지의 국가와 거래하면서 원재료를 획득해왔다.

 

그러나, 제조업중심이 중국으로 이전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그들과 직접 거래하는 국가가 중국으로 바뀐 것이다. 서방국가는 그저 발주처로서 중국과만 거래한다. 이들 개발도상국은 단지 후방단계에서 중국과만 거래한다.

이것이 바로 "경제무역쌍순환구조"이다.

 

제1순환: 중국은 서방에 완제품을 수출한다. 서방으로부터 기술, 자금 및 각종 고급서비스업을 수입한다.

제2순환: 중국은 개발도상국에 완제품을 수출한다. 개발도상국에서 원재료를 수입한다.

 

두 개의 순환 가운데, 중국은 모두 중개 축의 지위에 있다.

 

비록 글로벌경제의 추진력은 여전히 서방이지만, 이는 제조업의 근본적인 수요와 구동력은 경제혁신으로 이끌어지기 대문이다. 이건 이해하기 쉽다. 수요가 없으면 어떻게 제조를 하겠는가?

 

다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글로벌제조업질서에서 과거 수십년간 중국이 중요한 단계를 형성했고, 이는 미국이 제조업의 미국회귀를 재촉하게 만드는 우려의 소재이기도 하다.

 

미국은 의식했다. 제조업을 장악하지 못하면, 반드시 중국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제조업을 대량으로 외주주는 것은 비록 짐을 더는 것이고, 효율을 올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리스크도 늘이게 된다.

 

미중간에 현재 정치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배후에는 실제로 경제, 무역, 공급체인과 하이테크상의 전방위적인 고려가 숨어있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판단은 모두 중국역사에 대한 새로운 구조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고대와 근현대에 세계와 진실하게 연결되는 방식을 정리한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긍정할 수 있다: 이러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은 우리를 속박하던 많은 낡은 개념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사용하는 도구도 옛날식이 아니고, 헛된 것이 아니고, 강대한 해석력을 지닌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미래와 세계에 대하여 더욱 많은 가능성을 개척하게 해줄 것이라고.

 

비록 당금의 세계는 태평하지 않고, 각국이 격렬하게 대항하면서 서로 상대진영에 맞서고 있고, 일부 탈동조화하는 현실 속에서 일찌기 큰 돈을 긁어모았던 중국의 '경제무역쌍순환축'의 최선의 포지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현재 문제는 이미 우리가 이 최선의 포지션에 위치하고 싶어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서방은 이미 중국이 '경제무역쌍순환축'의 최선의 위치에 포지셔닝하도록 놔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진영내에 공급체인은 자체건설하고자 시도한다.

 

미래의 세계는 새로 분리될 것이다. 글로벌통일시장은 분할시장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고, 쌍순환은 여러 개의 내순환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아마도 부득이 새로 또 다른 세계와의 통로를 건립하는 길을 찾아야할 것이다.

 

전체화는 이제 종결을 향해 가고 있다. 구질서는 와해되었다. 신질서는 아직 형성되는 단계이다. 우리는 어떻게 선택하고 대응할 것인지, 우리들의 지혜와 용기의 시험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