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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불교는 진시황때 중국에 전래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23. 3. 2.

글: 우공행자(禹貢行者)

 

서방세계에서 종교는 강력한 정신역량이고, 물질적인 건축물을 정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린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등은 모두 서방종교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러나 서방과 비교하면, 중국인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랐다.

 

중국고대역사상 신권(神權)은 왕권(王權)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의 종교관념은 서방과 비교할 때 많이 박약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고대의 종교건축물은 서방건축물같이 휘황찬란한 격조는 없으며, 비교적 겸허하고 드러내지 않는 내향적인 기질을 드러낸다.

 

1. 불교의 동전(東傳)과 불탑의 건립

 

이런 문화적 분위기하에서, 중국의 종교건축은 외래문화의 동전과정에서 비교적 기나긴 본토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불탑은 바로 여러 종교건축물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탑은 고대인도에서 탄생했으며, 최초의 기능은 사리(舍利)를 모시는 용도였다. <남해기귀내법전>에 따르면, "대사 세존이 열반한 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불로 화장했으며 마침내 크게 쌓인다" 이것이 가장 좋은 설명이다. 

 

아육왕(阿育王, 아유타왕)때 모두 84,000개의 불탑을 건설하여 부처의 사리를 수집한다. 그후 불탑은 부처 이미지의 상징이 되고, 불교건축의 표지가 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불교가 중국에 가장 먼저 전래된 것은 동한초기의 영평연간(58-75)일 것이다. 당시 서역에서 두 명의 고승을 모셔와 불교 사묘(寺廟)를 짓는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백마태경(白馬駄經)"(백마에 경전을 싣고 오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중국 최초의 불교사묘는 백마사(白馬寺)라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중국과 불교의 접촉은 동한보다 훨씬 이르다고 본다. 사마천의 <사기. 진본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금부득사(禁不得祠), 명성출서방(明星出西方)". 여기에서 '부득(不得)'이 무슨 뜻인지 사학자들도 전혀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추단했다. 여기서 '부득(不得, 중국발음으로 bude 즉, 부더)'은 바로 불교 Budha의 음역, 즉 불타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진시황이 민간에서 서방종교인 불타를 숭배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인도의 아유타왕의 재위기간은 진시황보다 조금 빠르다. 그는 84,000개의 불탑을 건립하고, 불교를 널리 퍼트렸다. 아마도 오늘날의 중국에까지도 퍼졌을 것이다.

 

6세기의 북위(北魏)떄 낙양(洛陽)은 불탑이 숲을 이룬 세계였다. 북위가 북방을 통일한 후, 일련의 한화(漢化)개혁을 실행하는데, 도성을 평성(平城, 지금의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긴다. 효문제(孝文帝)가 낙양으로 천도한 초기에, 사묘건설은 그다지 급속히 전개되지 않았다. 다만 선무제(宣武帝)이후 불교사찰의 수량은 급격히 증가하고, 불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다.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따르면, 당시 낙양성내에 불교사찰이 1,300여개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장관인 곳은 낙양의 영녕사(永寧寺)였다고 한다.

 

2. 불탑 중국화의 영녕사

 

낙양의 영녕사에는 중국최초의 고탑(高塔)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고대에 건축한 가장 높은 불탑이다. 양현지의 <낙양가람기>에는 영녕사의 불탑은 '높이 90장'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하면 140미터이다. 그러나 이 탑은 18년간 존속하다가 큰 불로 무너져 버린다. <위서>에 따르면, "불은 제팔급에서 새벽에 크게 일어났고, 불은 석달이 지나 꺼졌고, 어떤 불은 땅이 깊은 기둥으로 번져 일년내내 연기가 났다." 이를 보면 당시 얼마나 큰 불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영녕사가 불에 탄 것은 북위에 큰 손실이었다. 남북조시기에는 황제의 기복활동이 성행했는데, 사람들은 불법을 널리 퍼트림으로써 천하가 영원히 태평세월을 누리길 희망했다. 불법을 퍼트리는 기풍이 성행하면서 많은 물력과 인력을 석굴, 불사와 불탑의 건설에 쏟아붓는다. 이런 큰 배경하에서 건조된 영녕사는 더더욱 전국의 인력과 물력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잿더미로 화한다. 바로 영녕사가 무너진 그 해에, 북위의 경사는 업성(鄴城)으로 천도하고, 북위는 멸망한다.

 

1970년대에 고고학자들은 영녕사불탑의 지기(地基)를 발견한다. 불탑기지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불탑은 2개의 항토층(夯土層)기반이 있고, 동서로 너비가 근 100미터, 남북으로도 근 100미터이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지기의 면적으로 추산해보면, 영녕사는 비록 문헌에 기록된 것처럼 그렇게 과장되지는 않지만, 면적으로 볼 때, 중국고대에서 첫손꼽히는 불탑임을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영녕사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당시 영녕사내에는 대형 불상이 주조되어 있었고, 참배자들이 불탑을 돌면서 참배했다고 생각한다. 황실귀족들은 심지어 탑을 올라가 참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영녕사의 불탑이 이미 점차 중국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실 인도의 불탑은 원래 속이 차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지 불골(佛骨)을 매장하기 위한 용도였지 불상을 받들어모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더구나 탑을 오른다는 것은 없었다. 단지 나중에야 불상을 모시게 된다. 그런데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불탑의 안쪽에는 이미 예불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된다. 남북조에 이르러, 북위의 영년사는 탑을 올라가 부처에게 예불드릴 수 있는 불탑이 된 것이다. 이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후,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수당이후의 불교건축물에서, 불탑내에 부처를 모시는 것은 더더욱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비교적 전형적인 것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석가불공탑(釋迦佛公塔)이다. 즉 우리가 응현목탑(應縣木塔)으로 잘 알려진 것이며 그 안에는 여러 개의 대불이 모셔져 있다. 이렇게 탑을 올라가서 부처에게 예불을 드리는 사례는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서안의 대안탑(大雁塔)과 소안탑(小雁塔)이 그러하다.

 

결론

 

최초의 백마태경으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북위에서 영녕사를 건립하면서, 불교 내지 불탑이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은 바로 일련의 중국화되는 과정이었다. 불탑은 속이 차있는 것에서 속이 비어있는 것으로, 처음에는 탑을 오르지 못하다가 탑에 올라가서 부처에게 예불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바뀐다. 이는 모두 불탑이 중국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배후의 사상은 바로 중국인들이 "등고망원(登高望遠, 높이 올라가 멀리 바라보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