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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방방(方方): 사람과 로봇의 분계선(分界線)

by 중은우시 2023. 2. 24.

글: 방방(方方)

 

어느날 오전, 우연히 한 오락프로그램을 보았다. 프로그램에서 두 명의 MC가 3명의 예쁜 여자연예인들에게 게임을 시키는 내용이었다. MC들은 5개의 동물그림이 있는 카드를 내놓는데, 각각 사자, 원숭이, 토끼, 소와 말이었다.

 

MC는 이렇게 말한다. 전란의 시대에 피난을 가야 한다. 반드시 이 5마리의 동물을 버려야 하는데, 순서를 정해달라, 가장 먼저 어느 동물을 버리고, 가장 나중에 어느 동물을 버릴 것인지.

 

3명의 여자들은 각각 5개의 동물중 버릴 순서를 정했다. 앞의 4마리는 서로 달랐는데, 다섯번째 동물은 모두 세 명이 같은 선택을 했다. 즉 말을 남긴 것이다. 모든 여자들은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설명했다.

 

마지막에 왜 말을 남겼는지에 대하여는, 여자들이 일치하여 이렇게 말했다: 말은 빨리 달려서 나를 태우고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선택을 마친 후, MC는 이렇게 알려준다. 이건 자그마한 시험이다. 모든 동물은 한 가지씩을 의미한다. 당연히 MC는 이것은 단순한 게임이라고 강조한다. 그후 그들은 카드를 뒤집어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을 밝힌다.

 

이 다섯 마리의 동물은 각각 부모, 친구, 애인, 자존심과 사업을 의미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동물이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는 지금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가지는 기억한다: 말은 사업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니, 어떤 여자는 가장 먼저 버린 것이 부모였고, 어떤 여자는 가장 먼저 버린 것이 자존심이었으며, 또 어떤 여자는 가장 먼저 버린 것이 사랑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은 모두 사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MC들이 이렇게 묻는다: 만일 여러분들이 각각의 동물 배후의 의미를 알았더라도 그렇게 선택했겠는지. 이때 그녀들의 대답은 이제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그런데 놀랍고, 무섭고, 가슴이 서늘하며, 유감스럽게도 그녀들은 모두 아무런 망설임없이 "역시 똑같이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녀들이 자신의 '사업'을 자존심이나 사랑이나 우정이나 심지어 부모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여자에 있어서, 나는 그녀들이 자신의 '사업'을 가지려고 한다는데는 찬성한다. 왜냐하면 여자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공간을 가지지 않으면 영원히 사회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업에서 용감하게 활약하는 여성들을 사람들은 여강인(女强人) 혹은 철의 여인이라고 칭송하고, 나도 여전히 그런 여자들을 존경하고 옹호한다.

 

그녀들은 단순히 남자라는 나무에 들러붙어사는 그런 여자들보다, 그저 애교를 부리고 순진무구한척하면서 남자들의 도움이나 받으려 하는 소위 '동방여성'들보다는 천배 만배 존중받을만하다.

 

이 점을 보면, 한명의 여자로서 사업을 자존심보다 중시하는 것(MC의 말로 이 자존심이라는 것은 단지 겉모습이라고 하였다), 친구보다 중시하는 것 심지어 애인보다 중시하는 것까지는 억지로라도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업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버릴 정도라면 나는 정말 동의하지 못하겠다.

 

우리의 혈육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어른으로 길러주었다. 우리가 어른이 된 후에는 부모들이 이미 기력을 다하여, 그들은 이 세계의 약자가 되었다. 오작 자녀들만이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일찌기 비바람을 맞으면서 우리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광경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우리는 굷지 않게 해주었던 광경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똥오줌을 받아내며, 물과 음식을 주면서 우리를 길려준 고생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일찌기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는 것을. 그들이 우리를 길러준 은정과 댓가와 비교하면, 사업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믿는다. 만일 부모에게 이런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면, 그들은 반드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라도 자신의 자녀를 보호할 것이다.

 

기실, 우리도 이들 세 여자의 이기심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여러 해동안, 우리의 교육이 그런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어떤 대표적인 인물을 선전할 때, 자주 그들의 부모가 위중하거나 사망했을 때도, 그는 일때문에 아픔을 참고 부모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든지....그리고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 너무나 많이 소개되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왜 우리의 대표적인 인물은 항상 부모를 가장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놓는 것일까? 왜 전심전력을 다해서 일에 온힘을 쏟고, 부모는 내버려두는다. 그리고 왜 그런 것이 굳이 강조하는 하이라이트가 되는 것일까?

 

나는 그런 대표적인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내 생각에 그들중 일부는 아마도 불효자일 것이다. 부모를 위해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일 핑계를 댔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전혀 믿지 않는다. 그들이 잠시 업무를 내려놓고, 나이든 부모를 찾아가서 위문하고 보살펴준다고 하여, 국가에 그리고 사업에 그다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는.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 여한을 품고 숨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지냈다. 그것까지 제창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소위 사업을 위해서 부모를 돌뵈지 않는 것까지 제창해야 한단 말인가?

 

부모조차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류에 대하여 무슨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겠는가?

 

우리는 이들 세 여자들을 비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들과 우리는 모두 자아를 강조하고, 과학을 강조하고, 경쟁을 강조하고, 독립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차갑고 단단한 것들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고, 우리를 더욱 멀리 보게 만들고, 혹은 우리의 인생이 실패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들은 점점 우리의 마음 속에 가장 따스하고, 가장 감동적인 것들을 빼앗아버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하고, 쟁탈하며 심지어 복수하려는 의식을 강화시킨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잊지 않고, 정의(情意)를 중시하고, 베풀어 준 것에 대하여는 반드시 보답하려는 의기(義氣)를 약화시킨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바로 생명이 있는 사람과 생명이 없는 로봇을 구분시켜주는 분계선이다.

 

슬픈 것은 우리에게 인간성과 감정이 점점 줄어들고, 로봇의 감각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 명의 여자들의 선택이 대표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 세명의 개인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기풍이라 할 수 있고, 우리 세대의 관념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늙어갈 사람들이 자세히 생각해보면 정말 무섭다고 여겨지는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