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십공주(十公主)

중은우시 2023. 2. 8. 14:25

글: 왕옥호(王鈺浩)

 

고륜화효공주는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막내공주이다. 만일 그녀가 사내아이였다면 아마도 가경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후 집안이 망하면서 고독하게 13년을 살다가 죽는다. 

 

건륭제의 일생을 보면, 수명이 길어서 재위기간도 길고, 후비(后妃)와 자녀도 많았다. 그가 12살때, 강희제는 사람을 시켜 그의 사주팔자를 살펴보는데, 결과는 '홍복제천(洪福齊天, 하늘과 같이 큰 복을 타고났다)'이라는 말을 듣는다. 아마도 그것때문인지, 그는 팔자가 아주 셌고, 그의 후비, 자녀는 대부분 그보다 먼저 죽는다.

 

십공주가 태어나기 전에 그는 이미 26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65세가 되던 해 살아있는 자녀는 겨우 11명이었다. 아들중 가장 어린 황자는 열살이었고, 딸들은 일찌감치 시집을 보냈다.

 

이런 광경에 나이든 건륭제는 어느 정도 처량함을 느꼈을 것이다.

 

건륭40년, 10년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자금성에는 다시 영아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건륭제의 돈비(惇妃)가 공주를 낳은 것이다. 바로 그의 열번째 공주이다.

 

십공주가 태어나면서, 건륭제는 공허하고 적막한 말년에 즐거움이 되었을 뿐아니라, 건륭제의 신체가 아주 건강하다는 것도 증명했다. 그래서 건륭제가 아주 기뻐했을 뿐아니라, 전체 황궁에서 위로는 황태후, 아래로는 궁녀, 태감들까지도 모두가 그녀의 탄생을 기뻐했다.

 

그후, 십공주는 그녀의 사랑받는 전반생을 시작한다. 그녀를 위하여, 건륭제는 여러가지 '파격'적인 일들을 해준다.

 

건륭43년 십일월, 십공주가 4살이 되기 전에, 궁안에서는 놀라운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십공주의 생모인 돈비가 손아래부리는 궁녀를 때려서 죽인 것이다.

 

원래, 궁중에서 궁녀와 태감들을 벌주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고, 많은 궁녀와 태감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돈비의 행위는 달랐다. 그 궁녀는 말그대로 맞아죽은 것이다. 이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잔혹한 성격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그녀를 비로 책봉할 때 책문(冊文)에는 그녀가 "육질유가(毓質柔嘉), 한어예교(嫻於禮敎)"라고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니 건륭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청나라는 스스로 '인효(仁孝)'로 천하를 다스린다고 자랑하고 있었는데, 지금 후비가 궁녀를 때려죽였으니, 조정내외에는 의론이 분분했다. 사리에 비추어보면 이 사건은 중하게 처리되어야 했다.

돈비

건륭제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이런 비빈은 바로 버림받아 냉궁(冷宮)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돈비를 폐출시킬 생각도 했었다. 다만 만일 돈비를 이렇게 폐위해버리면, 십공주는 생모의 품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건륭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다.

 

이리저리 고민한 끝에, 건륭제이 십공주에 대한 사랑이 돈비에 대한 혐오보다 컸다. 그는 돈비를 강급시키는 처벌로 끝낸다. 원인은 건륭제가 분명하게 밝힌다:

 

"사람의 목숨이 죽은 사건이므로, 그 죄는 원래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일찌기 공주를 기른 점을 생각하여 가볍게 처벌한다. 사건내용만으로 본다면 비에서 축출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았다."

 

건륭제는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그녀의 행위는 비에서 축출되어도 마땅한 중한 죄이다. 그러나 그녀는 십공주를 낳았으니, 가볍게 처벌하겠다. 그러나, 이건 그저 일시적인 눈가림이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돈빈(惇嬪)으로 강급되었던 그녀를 다시 돈비로 승격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건륭제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십공주가 만일 아들이었다면 반드시 태자로 삼았을 것이다.

 

십공주가 어렸을 때, 항상 건륭제의 주변에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아무리 시끄럽게 굴고 장난을 쳐도, 건륭제는 그것을 다 받아주면서 천진난만하다고 여겼다. 

 

아마도 그런 총애를 받아서인지, 십공주는 사내아이같은 호기와 대담하고 활발한 성격을 가진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남장을 좋아했고, 힘도 셌다. 활을 당겨서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매년 봄가을이 되면, 건륭제가 피서산장으로 가서 사냥을 하는데, 항상 이 십공주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는 건륭제에게 사냥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처음 건륭제를 따라 사냥에 나섰을 때, 십공주는 직접 어린 사슴을 한 마리 쏘아서 잡는다. 그리하여 건륭제를 더욱 기쁘게 했다.

 

지금 건륭시기에 융장(戎裝)을 한 여자상이 한폭 남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향비(香妃)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십공주라고 말한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것은 건륭제의 27명 자녀들 중에서, 십공주가 외모상 가장 건륭제를 닮았다는 것이다. 만일 사내는 엄마를 닮고,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말이 맞다면, 십공주가 건륭제를 닮은 것은 상리에 맞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건륭제는 이 막내공주를 사랑하고 아낀다. 심지어 그녀가 왜 사내로 태어나지 않았는지를 한탄할 정도였다. 만일 사내아이였다면 황태자로 삼았을텐데. <소정잡록(嘯亭雜錄)>에는 이런 일이 기재되어 있다. 건륭제는 직접 십공주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네가 황자였다면 짐은 반드시 너를 태자로 세웠을 것이다(汝若爲皇子, 朕必立汝儲也)"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십공주가 여자라는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십공주를 위하여 평생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일찌감치 안배를 해놓는다. 그것은 바로 그녀를 위해서 좋은 부마를 골라두는 것이다.

 

고르고 고른 부마는 바로 화신(和珅)의 외동아들이었다.

 

황제의 딸로서, 십공주는 당연히 시집을 가지 못할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건륭제는 그녀의 혼사를 한동안 고민했다. 다른 게 아니라, 누구를 골라야 자신의 장상명주에 어울릴까 하는 것때문이었다.

 

원래 청나라조정에서는 만몽(滿蒙)혼인이 많았다. 건륭제의 삼공주와 칠공주도 모두 몽골왕공에게 시집갔다. 그외에 사공주, 구공주같은 경우는 팔기의 귀족가정에 시집갔다. 그러나, 건륭제가 십공주의 남편을 고를 때는 그의 나이가 이미 고희를 넘어, 그와 같은 나이대의 대신들은 대부분 작고했고, 그들의 아들도 이미 십공주와 혼인할만한 나이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목표를 당시 조정의 새롭게 떠오르는 인물인 화신에게 돌렸다.

 

당시의 화신은 장년으로 당시 호부상서, 군기대신등의 요직에 있었다. 건륭제도 이 젊은 신하를 좋아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화신이 총애를 받은 이유중 하나는 바로 그의 용모가 건륭제가 사랑했던 여인과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화신은 용모가 수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도 용모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건륭45년, 건륭제는 두 아이의 사주팔자를 맞춰본 후에 아주 만족한다. 그후 그가 이 혼약을 결정한다. 그때 십공주는 6살이 되지 않았고, 화신의 아들은 십공주보다 반개월이 어렸다. 

 

건륭53년, 십공주가 14살이 되었을 때, 건륭제는 십공주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흥분하면서도 걱정되었다. 딸의 혼례를 성대하게 치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 해애 또 한번의 '파격'을 벌인다. 그것은 바로 십공주를 "고륜화효공주"에 봉한 것이다.

 

청나라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황후가 낳은 딸만이 "고륜공주(固倫公主)"에 봉해질 수 있다. 그 품급은 친왕(親王)에 상당한다; 나머지 비빈들이 낳은 딸은 그저 "화석공주(和碩公主)"에 봉해질 수 있을 뿐이다. 그 품급은 군왕(郡王)에 상당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제도는 타파하기가 어렵다. 아주 특수한 원인이 있지 않고서는. 예를 들어, 강희제의 삼공주는 생모가 영비(榮妃)인데, 그녀는 아주 효성스러워서, 강희제의 병이 위중할 때, 그녀가 계속 병상에서 병수발을 들었고, 강희제는 이에 감동받아, 병이 낫고난 후, 그녀를 "고륜영헌공주(固倫榮憲公主)"에 봉한다.

 

그외에 강희제의 십공주의 생모는 빈(嬪)이었고, 그녀도 화석공주에 봉해졌는데,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남편이 전공을 세워 "화석액부(和碩額附, 액부는 만주어로 부마라는 의미임)"에서 "고륜액부"로 승격된다. 이에 따라 그녀도 "고륜순각공주(固倫純慤公主)"로 추봉된다. 

 

그런데, 건륭제십공주의 생모는 궁녀에서 비로 승격되었지만, 출신이 비천하여, 그녀를 비로 책봉할 때, 책문에 "대가숙질(大家淑質)"이라는 상투적인 말조차 넣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십공주는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아무런 걱정없이 자랐기 때문에 무슨 '공로'를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십공주가 "고륜공주"에 봉해진 것은 건륭제가 십공주의 혼사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한 것 이외에 다른 원인은 있을 수가 없다.

 

건륭54년 십일월, 15세의 고륜화효공주는 성대하게 시집을 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출가하는 날부터, 그녀의 혼수는 끊임없이 궁중에서 화부(和府, 화신의 집)로 보내어졌고, 각양각색의 금은보화는 말할 것도 없고, 건륭제는 시녀 십여명을 하사했고, 보기 드문 진기한 물건과 비단등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이 엄청난 가치의 혼수품을 화부로 호송한 사람에는 호군참령, 호군교가 통솔하는 수십명의 호군들이 있었다. 그리고 수행하는 사람은 여러 푸진(福晋), 부인(夫人)과 명부(命婦)였다.

 

이 혼사의 성대한 장면은 다음 해까지도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막내딸의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건륭제는 정말 신경을 많이 썼다. 다만 건륭제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녀를 위해 고르고 고른 혼인이 그녀에게 반드시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결혼후, 십공주는 바로 화신 부자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한다. 시아버지 화신은 권력을 농단하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었고, 부마인 풍신은덕(豊紳殷德)은 부친의 권세를 내세워 교만방자했다. 십공주는 마음 속으로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아버지에게는 직접 뭐라고 훈계할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 대하여는 바로 얘기했다: "너의 부친은 부황에 의지해서 지금의 권세를 가졌다. 그러나 이를 공적을 세워 보답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부정부패하고 뇌물을 탐한다. 나는 정말 너희 집안이 걱정된다. 언젠가 화씨집안에 재앙이 닥치면, 나도 화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풍신은덕은 십공주보다 나이가 반개월이 어릴 뿐이지만, 그녀의 심지는 십공주보다 훨씬 더 어렸다. 어느날 큰 눈이 내렸는데, 그는 눈밭에서 장난치고 놀았다. 십공주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너는 스물몇살이나 된 사람이, 어찌 어린아이같이 논단 말이냐!"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이 전혀 다르고 생활습속도 다르다보니 십공주의 혼인은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건륭제가 더더욱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가 죽은 후, 그가 딸을 위해서 안배해둔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가경4년(1799년) 정월 초사흘, 이 날은 원래 십공주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부황이 붕어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아직 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이 들려온다. 그녀의 시아버지 화신이 가경제에게 붙잡힌 것이다. 비록 미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빨리 그 날이 오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었다.

가경제가 화신에게 붙인 죄명대로라면 천도만과(千刀萬剐)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십공주가 여러번 궁으로 들어가 애원하자 가경제도 막내여동생이 가여워서 화신의 시신은 남겨주겠다고 허락한다. 결국 화신은 사사(賜死)받고, 가산은 몰수당한다.

 

화신이 무너진 후, 풍신은덕은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꼴이었다. 십공주를 제외하고, 이전에 그에게 아부하고 친근하게 굴던 사람들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노비는 심지어 낙정하석(落井下石,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다)하여, 풍신은덕의 여러가지 죄행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조사를 해보니 그가 국상기간동안 첩을 들여 딸을 낳았다는 것이 확인된다. 가경제는 대노하여, 원래 그에게 내렸던 공(公)의 작위를 박탈하고, 가택연금시킨다.

 

대기대락(大起大落)했고, 황제의 뜻은 알기가 어렵다. 풍신은덕은 경궁지조(驚弓之鳥)가 되어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설사 십공주와 단 둘이 있을 때에도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가경제는 가경8년부터 여동생을 다독이기 위하여, 다시 풍신은덕에서 차례로 상사를 내려, 봉록에서 작위까지 수여한다. 가경12년, 풍신은덕은 명을 받아 오리아소대(烏里雅蘇臺)로 가서 일을 처리한다. 도중에 풍찬노숙하면서 눈바람을 맞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한 후 풍신은덕은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

 

가경15년(1810년), 2년간 병석에서 버티다가 나이 겨우 36살의 풍신은덕은 죽음을 맞이한다.

 

풍신은덕이 죽은 후, 십공주는 철처히 고독에 빠진다. 비록 오빠인 가경제와 나중의 조카인 도광제가 그녀를 많이 보살펴주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마음 속에 입은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었다. 대희대비이상인(大喜大悲易傷人). 도광3년(1823년) 십공주는 두 눈을 감는다. 당시 그녀의 나이 49살이었고, 그녀의 남편 풍신은덕이 죽은지도 이미 13년이 지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