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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의학

중국 최초의 백신인 우두(牛痘)는 어떻게 전래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23. 2. 6.

글: 지식분자(知識分子)

 

과거 200여년간, 인류는 전염병에 저항하는 면에서 사상유례없는 성취를 거두었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은 백신덕분이다. 이번 신종코로나사태에서도 백신의 출현은 여러 나라의 방역정책의 전환점이 되었다. 1-2년만에 백신의 연구개발에서 생산까지의 전과정을 마쳤다는 것은 아직 완벽하게 감염을 예방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신종코로나감염후의 중증률을 크게 저하시켜, 사망자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에드워드 제너와 그의 천연두백신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백신이었다.

 

1796년 5월 17일, 영국의 시골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제임스 핍스에게 우두를 접종하여 이 8살짜리 사내아이에게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갖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이날은 인류역사상의 이정표이고 인류가 백신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진 10여년동안, 천연두백신은 유럽에서 전세계 오대주로 전파된다. 거기에는 1805년말 당시 아직 청나라통치하에 있던 중국에도 전해진다. 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백신의 위력을 인식하게 된 때이고, 신중국이 성립된 후, 정부가 추진한 세 차례의 강제적인 전민우두접종을 통해 천연두감염사례는 급격히 줄어든다. 1961년 마지막으로 천연두를 치료한 후, 천연두는 중국에서 소멸되었다.

 

올해는 에드워드 제너의 서거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최초의 백신이 중국에 전래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한다. 이를 통해 인류의 방역방법을 바꾼 과학자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다.

1. 중국으로 전래된 3가지 경로

 

비록 천연두백신이 성공적으로 중국에 도착한 시간은 청나라때인 가경10년 사월(1805년 5월)이지만, 그 이전인 1803년에 이미 어떤 사람은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먼저 천연두백신을 중국에 소개하려고 생각한 것은 당시의 러시아제국이다.

 

1801년 10월, 당시 실레시아의 독일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에 속함)의 의사인 프레드리히 프리스의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데 카를로 의사로부터 천연두백신을 얻는다. 현지에서 접종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프리스 의사는 그해 10월 천연두백신을 모스크바로 보낸다. 이는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크게 환영받고, 당시의 러시아제국의 황실은 천연두백신의 적극적으로 보급한다.

 

우두접종이 러시아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자, 1802년 8월 러시아의 황태후 마리아 표도르브나는 친필서신을 통해 감사를 표시하기도 한다: 

 

"영국에서, 백신의 사용은 거대하고도 이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하루빨리 이를 본받아 러시아에 도입했다. 우리의 실천은 예상에 완전히 부합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당신에게 말씀드린다. 그리고 전인류에게 이런 중대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감사드린다..."

 

국내에서 대거 천연두백신을 보급하는 외에 러시아황실은 대담한 백신보급계획을 세운다. 이 거대한 계획에는 천연두백신을 동으로 광활한 시베리아지구에 보급하는 외에 극동의 중국에까지 소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저 일부만 집행된다. 천연두백신은 1803년 시베리아에 보급되나, 중국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천연두백신이 중국으로 전래된 3가지 경로

러시아제국은 백신을 북쪽에서 중국으로 보급하려고 계획하는 동시에, 천연두백신을 남쪽에서 중국으로 도입하려는 계획도 기획되고 있었다. 이 계획을 세운 사람은 봄베이의 영국총독이었다.

 

1801년 인도는 천연두가 유행하여, 급히 천연두백신이 필요했다. 인도에 백신을 보내기 위해, 제너는 수천파운드를 들여 원양선을 수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국에서 보낸 백신은 장거리운송과정에서 효과를 잃게 된다.

 

다행히 더 카를로 의사는 이칼리아의 사코 의사에게서 대량의 천연두 백신을 얻었고, 영국 주 오스만제국대사 엘긴 백작의 도움을 받아, 더 카를로의사는 백신을 안전하게 1802년 3월 이라크의 바드다드로 보낸다. 그후 백신은 다시 이라크 서남부 아랍해에 가까운 바스라로 가고, 다시 영국상선 '부흥호'에 의해 인도의 봄베이로 옮겨진다. 

 

1802년 6월 14일, 봄베이의 의사 헬레노스 스코트 박사는 이 백신을 이용하여 3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접종하여 성공을 거둔다. 그후 백신은 다시 전체 인도대륙에 보급된다.

 

천연두백신접종이 인도에서 성공을 거두자, 봄베이 총독은 더욱 거대한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이 인류의 복지를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로 전하겠다고. 1년후인 1803년 8월, 봄베이총독은 제1차 천연두백신을 중국으로 보낸다. 몇달간의 해상항해를 거쳐 마카오의 동인도회사에 도착한다. 다만 불행하게도 이 백신은 장거리운송과정에서 효과를 잃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에 천연두백신을 전달하려는 노력은 다시 한번 수포로 돌아간다.

 

2년후, 중국은 마침내 효과있는 천연두 백신을 얻는다. 이 점에 대하여 마카오 동인도회사의 의사인 알렉산더 피어슨(Alexander Pearson)이 쓴 <영국에서 새로 나온 종두기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ㅣ "1805년 봄, 마카오상인인 포르투갈인 허위씨(許威氏)가 마닐라에서 활성화우두백신을 가져왔다."

 

마닐라는 필리핀의 수도이다. 중국의 천연두백신은 직접 마닐라에서 왔다. 그리고 천연두백신이 유럽에서 필리핀으로 전해진 과정도 전설적이다.

 

1803년 11월, 스페인은 원양탐험대를 보낸다. 목적은 천연두백신을 세계각지의 신민지로 나눠주는 것이었다. 이 탐험대는 50세의 Fransisco de Balmis가 이끌었기 때문에 그것을 발미스탐험대라고 불렀다. 노선이 길어서 천연두백신의 활성을 보증하기 위해, 탐험대는 배 위에 22명의 건강한 고아를 '배양기'로 삼았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이들 고아는 2인1조로 나뉘어 차례로 우두를 접종받았고, 시간간격은 9일 내지 10일이었다. 선상의 고아들에게 접종을 완료한 후에는 다시 현지에서 새로운 고아나 노예를 배에 태워, 계속하여 천연두백신의 신선도를 보장했다.

 

이 탐험대는 1804년 2월 9일 중앙아메리카의 푸에르토리코에 도착한다. 그후 남쪽으로 항해하여 베네주엘라에 이른다. 베네주엘라에서, 그들은 길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부대장 사르바니가 이끌고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와 칠레로 가고, 다른 하나는 대장 발미스가 직접 지휘하여 먼저 그해 5월 쿠바의 하바나에 도착하고, 1달여후에는 멕시코의 멕시코시티로 간다. 아메리카에서의 임무를 마친 후, 발미스의 탐험대는 원래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들이 멕시코시티에서 모집한 26명의 고아를 태우고 태평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1805년 4월 15일, 스페인의 아시아식민지 필리핀에 도착하다.

 

천연두백신이 필리핀에 도착한 후, 포르투갈의 상인은 선박을 이용해 백신을 중국에 있는 식민지 마카오로 가져간다. 비록 필리핀에서 마카오까지의 항로는 매우 짧았지만, 천연두백신의 활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배에는 마찬가지로 필리핀 현지의 고아들을 태운다. 이렇게 하여 천연두백신은 성공적으로 중국에 전해질 수 있었다. 시간은 1805년 5월말이다.

 

2. 우두(牛痘)가 효과있었던 것은 소가 오행중 토(土)에 속하는 가축이어서였을까?

 

포르투갈 상인들이 가져온 천연두백신을 얻은 후, 피어슨 의사는 마카오에 무료접종소를 설치한다. 그리고 현지백성들에게 천연두백신을 접종한다. 우두접종을 선전하고 보급하기 위하여, 피어슨은 마카오에서 <영국에서 새로 나온 종두기서>라는 선전소책자를 만든다. 이 책자는 스탠튼이 중문으로 번역한 후 광동에서 출판한다. 비록 소책자였지만, 이 책은 제나가 발명한 백신의 과정을 정확하고 전면적으로 설명했고, 분명하게 우두접종의 과정, 특징, 방법과 임상증상을 기술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우두접종에 대한 묘사이다:

 

"천연두 증세는 사람들에게 전염되지만, 우두의 두(痘)는 맞지 않으면 안된다....우두는 맞히는 곳에 맞히면, 한개가 생기는데 작은 손톱끝만한 크기이다. 한열의 각 증상이 서로 감염되지 않고, 안에는 미열과 미한이 있다. 약을 먹든 안먹든 병에는 관계가 없다. 이런 영묘한 방법을 생각해냈으니, 수십년간 전해지고 난다면, 영원히 천연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맞힌 후 4일이 지나면 모양이 붉은 색을 띄며, 6일이 되면 작은 거품(泡)이 생기며, 8일이 되면 포가 약간 커진다. 9일이 되면 가득 찬다."

 

천연두백신은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또한 무상으로 진행하여서 피어슨의 접종은 마카오백성들에게 열렬히 환영받는다. 당시 광동에도 천연두가 돌았는데, 적지 않은 내지의 주민들까지 마카오로 가서 피어슨의 진료소에서 접종을 받았다. 갈수록 많아지는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피어슨은 중국의 접종사를 고용하고 훈련시켰다. 그중 가장 뛰어난 인물은 광동 남해 사람 구희(邱熺)였다.

 

근 십여년간 우두접종업무를 한 후, 구희는 가경22년(1817년) <인두략(引痘略)>이라는 책을 써낸다. 이는 피어슨의 <영국에서 새로나온 종두기서>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그러나,  <인두략>은 중국에서 크게 환영받고, 계속하여 재판을 낸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우두를 소개하고 보급했지만, <인두략>이 성공을 크게 거둔 것은 구희가 이 책에 중의(中醫)의 요소를 가미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천화백신(우두)의 원래를 기술하면서, 구희는 우두가 유효한 이유로 소는 오행중 토에 속하는 가축이기 때문에, 독을 토(土)에 속하는 비장에서 해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천연두백신의 접종부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구희는 경락(經絡)의 개념을 활용한다. 천연두백신의 접종은 일반적으로 팔뚝부위를 선택하는데, 구희는 접종부위를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의 소염(消焰), 청냉연(淸冷淵) 두 혈도로 하였다. 그외에 접종후의 처치에 있어서도 중약을 도입한다. 

 

즉, 구희는 제나가 발명한 천연두백신을 중의로 포장한 것이다. 비록 이 포장이 우두를 중국내에서 보급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부득이 말할 수밖에 없는 점은 그러한 것이 모두 화사첨족(畵蛇添足)이었다는 것이다.

 

책을 쓰는 외에, 구희는 다른 방법으로 천연두백신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비용징수방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우대혜택을 주었다. 예를 들어 접종받으러 오는 아이들에게 '과금(果金)'을 설치했다. 즉 접종후 종두사가 장묘(奬苗)를 채취하는데 동의할 한 아이에게는 혜택을 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두묘(痘苗)를 계속하여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구희등 중국의 접종선구자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함에 따라, 천연두백신을 접종받은 후에 확실하게 효과를 나타낸다. 천연두백신은 중국에서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한다. 구희의 <인두략>은 출판된지 5년후인 도광2년(1822년), 천연두백신은 광동에서 호남으로 전해진다. 이어진 수십년간 전국각지에 전후로 종두국등 기구가 설립되고, 백선들에게 천연두백신을 접종한다. 

 

비록 전국각지에 종두국이 설립되었지만, 천연두백신의 접종이 중국에서 그다지 순조롭지는 않았다. 중의들은 이런 외래의 접종방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특히 전통적인 인두접종사(人痘接種師)는 개인의 이익으로 인해 더더욱 제지당했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강서 신창의 웅을연(熊乙燃)이 겪은 일이다. 1835년, 웅을연은 호남에서 우두접종술을 목도한 후, 이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발명은 강서의 고향으로 가져온다. 거기에 두국(痘局)을 설치했다. 그러나, 접종을 받으러 오는 아이들 중에서 유언비어때문에 오지 못하고 결국 천연두로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경력으로 인하여, 그는 중국의 전통두사(痘師)을 크게 비난한다.

 

민간에서뿐만이 아니라, 황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천조대국'이라는 자부심으로 심리가 왜곡된 때문일 것이다. 비록 천연두백신은 이미 전세계에서 안전하고 유효한 천연두예방방법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지만, 북경의 자금성내에서 채용한 것은 여전히 오래되고 위험한 '인두접종술'이었다. 

 

이런 선진적인 과학기술발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참혹했다. 1874년 나이 겨우 19살의 동치제가 천연두로 사망한다. 천연두백신을 몰랐던 궁정어의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결국 젊은 나이의 동치제는 치료가 성과를 얻지 못해 결국 죽고 만다. 불행하게도 동치제가 죽었지만 당시 중국인들은 여전히 우두를 중시하지 않는다. 인류의학사상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 중국에서는 아주 느리게 보급되었던 것이다.

 

광서11년(1885년), 우두의사 심선풍(沈善豊)이 <우두신편(牛痘新編)>을 편찬한다. 이 책에서 우두접종은 비록 중국에 도입된지 80년이 지났고, 각성에 종두국이 설치되었으며, 접종효과는 모두가 보는 바와 같지만, 우두접종은 당시 여전히 "옳다고 여기는 자가 적고, 그르다고 여기는 자가 많았다. 믿는 자가 하나면 믿지 않는 자가 백이다."

 

천연두백신이 중국에서 정부층면에서 진정 중시된 것은 신중국이 건립된 이후이다. 1950년대 중국은 3차례에 걸쳐 전민강제우두접종을 했다. 이런 전민접종의 결과로 천연두는 급격히 줄어들고 1961년 마지막 천연두환자를 치료한 것을 끝으로 중국에서 천연두는 소멸한다.

 

금년은 1822년 1월 26일 제너가 서거한지 꼬박 200년이 되는 해이다. 인류백신의 개발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해주었다. 더욱 효과높은 mRNA백신까지 이미 연구개발되었다. 그리고 성종적으로 인류의 신종코로나에 대항하는 방역전투에 도입되었다.

 

역사를 귀감으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있다. 이 글로 제너의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