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고룡(古龍)의 무협소설: 연재시대의 고(苦)와 낙(樂)

중은우시 2020. 3. 5. 20:00

글: 오신(吳新)


중국무협소설사상 김용(金庸)과 고룡(古龍)은 태산북두(泰山北斗)급의 인물이다. 그들은 무협소설이라는 한때, '불입류문학(不入流文學)'의 품종을 중화문학의 보고로 들여왔고, 현당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신선하고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종류가 되었다. 무협소설은 중국 심지어 전세계의 고대중국세계에 대한 상상을 바꾸어 놓았고, 비천둔지(飛天遁地)의 무림고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대대협은 사람들의 고대중국 평민강호에 대한 인상이 되었다. 고룡이라는 검주편봉(劍走偏鋒)의 무협소설대가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많은 인구에 회자되는 저작을 남겼다.


명성이 높았던 고룡은 판권보호개념이 없던 연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이름을 사칭한 작품들도 많이 나타났다. 연구를 많이 한 팬이라면 책의 서두만 읽어보더라도 고룡의 작품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댜수의 팬은 고룡에 대하여 그다지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고룡의 작품은 수준차이가 크다는 인상도 가지고 있다. 요즘 이런 책이 나왔다. <고룡무협소설지견록(古龍武俠小說知見錄)>. 작자인 고설의(顧雪衣)는 여러해동안 연구한 끝에 완전하게 고룡소설의 서로 다른 시기의 서로 다른 판본을 정리하면서, 소설에 대한 감별, 분석, 원류해석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종합했다. 그 중에서 우리는 고룡소설의 '전체모습'을 볼 수 있을 뿐아니라, 또한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영웅은 영웅을 아낀다. 김용과 고룡


무협소설의 흥기(興起)는 신문잡지의 연재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신문잡지의 연재는 무협소설의 주요진지이다. 소설 하나가 몇달 몇년동안 연재되었다. 이로 인한 광고효과는 지속적이고 광범위했다. 연재판의 소설은 시의적절성과 상호작용성이 더해진다. 당시는 현재의 웨이보(SNS)와 마찬가지로 적시에 피드백을 받았다.


김용과 고룡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보기에 무협소설의 태산북두이다. 각자의 작품은 후인들의 평가에서 난형난제로 강호에 나란히 이름을 떨치고 있다. 다만 1972년, 당시를 보면 고룡이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기는 했지만, 이미 인구에 회자되는 여러 부의 무협소설을 창작한 김용과 비교하자면, 두 사람은 당시에 같은 그비 아니었다. 당시 김용은 명성을 떨친지 이미 오래 되었고, 공성명취(功成名就)의 김용은 마지막 작품을 완결하기 전에, 그의 연재후계자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김용의 눈에, 고룡의 풍격과 쓰는 내용이 그의 뜻에 들어맞았다. 무협소설의 완전히 새로운 기풍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명보>에 연재된 <녹정기(鹿鼎記)>를 완결한 후, 고룡이 다음 연재소설을 쓰는 것으로 결정한다. 고룡은 당시에 이미 명성을 얻고는 있었지만, 김용에게 인정을 받았다는데서 아주 흥분한다. 그는 '구신구변(求新求變)의 사고방식으로 여론의 압력에 맞서면서 "육소봉(陸小鳳)"시리즈로 <녹정기>의 뒤를 잇는다. 작자의 눈에 고룡의 '육소봉'시리즈중 절정고수인 인물 서문취설(西門吹雪)은 마치 김용소설에서 또 한명의 유명한 인물인 동방불패(東方不敗)와 서로 호응된다고 여긴다. 이 두 이름은 아주 재미있고, 대립감이 있다. 이번 연재는 두 무협소설대가의 중요한 교차이다. 선배가 후배를 인정한 것이고, 김용이 고룡의 무협소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배의 인정을 받은 외에, 연재에서 고룡도 큰 좌절을 맛보기도 했었다. 1974년 4월 고룡의 신작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는 <중국시보(中國時報)>에 연재되기 시작한다. 모두 45회를 싣고는 연재가 중단된다. 항간에는 연재가 중단된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설이 돌았다: 어떤 견해에 따르면, 많은 독자들이 고룡의 빠른 속도감과 몽타쥬수법에 적응하지 못하여 신문사에 항의하며, 연재를 중단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신문사의 사장이 놀라서 동방옥(東方玉)이 새로 연재하고, 고룡의 연재는 중단하도록 결정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고룡은 자주 원고를 늦게 주거나 원고를 주지 않았다. 규율도 없고 조직관념도 없다. 게다가 독자들의 항의까지 받다보니, 그 기회에 그의 연재를 끊어서 그를 징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러나 작자는 여러 견해를 종합하여 이렇게 본다. 당시 <천애.명월.도>의 수법을 어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중 많은 혁신적인 수법은 전통적인 무협소설의 독자들과는 비교적 큰 차이가 있었다. 전통 무협소설을 많이 읽어본 독자들이 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 연재가 중단된 것에 고룡은 더욱 힘들어 했다. 고룡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의 일생중 내가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큰 좌절을 느끼게 한 작품은 바로 <천애.명월.도>이다."


대필(代筆)에 관한 논쟁은 무협소설작가들에게는 자주 발생한다. 김용과 예광(倪匡)의 대필사건도 있다. <천룡팔부>의 아자(阿紫)라는 인물이 어떤 때는 좋은 사람으로 어떤 때는 나쁜 사람으로 쓰고, 죽었다 살아나는 등의 일이 있었다. 항간에 에피소드로 전해지고 있다. 작자가 대필을 구해서 쓰게 하는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다. 고룡도 일찌기 대필로 의심받은 사건이 있었다. 1981년 <신검일소(神劍一笑)>를 <시보주간(時報週刊)>에 연재하고 있을 때, 대필이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나돌았다. 그중 가장 널리 인정되는 견해는 소설은 고룡이 구술하고, 대필자가 한글자 한글자를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기실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대필과는 다르다. 대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나서서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추측으로는 고룡이 큰제자인 정정(丁情)일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음 인터넷에 떠도는 설흥국(薛興國)이라고도 한다. 결국 주장은 많지만 증거는 적다. 본서의 작자는 도대체 누가 소위 대필자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결론냈다.


연재후에 책으로 묶어서 낸 완성본을 보면, 문자풍격으로 판단하기는 비교적 난이도가 높다. 일반인이 감별하기는 어렵다. 다만, 작자는 고룡이 연재할 때 연재중단으로 보면, 대필의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시보주간>에서 연재된 상황을 보면, 소설은 197회에서 225회까지 연재되면서 그중 4번 연재되지 못했다. 모두 연재의 후반부이다. 만일 고룡이 처음부터 대필을 썼더라면, 그후 이런 연재중단의 상황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작자의 분석과 비교를 거쳐, 분명 220회부터 225회까지 그 중의 4장(章)의 내용은 대필자가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마도 그 몇회의 연재중단은 고룡측에 분명 문제가 발생한 것같고, 그래서 마지막 몇장은 대필자를 찾아서 썼을 것같다.


고룡의 연재경력에서 우리는 이 신파무협대가도 계속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그동안 그는 여러가지를 맛보았다. 무협대가인 김용의 인정을 받는 기쁩도 있었지만, 신작이 중도에 연재중단당하는 씁쓸함도 맛보았다. 많은 새로운 시도를 그의 작품에서 체현되기를 원했다. 작자는 여기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김용은 구파무협소설을 개량하는 기초위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고룡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을며 자아작고(自我作古)했다."


대륙으로 들어오는 여정은 곡절이 있었다.


고룡의 작품이 중국인세계에서 이렇게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중국내지가 가장 주요한 영향력전파지가 되었다. 다만 당시 대륙과 홍콩마카오대만지구는 정치적 원인과 문화적 차이로 그리고 지적재산권쪽의 문제도 있었다. 그리하여 고룡의 무협소설이 대륙에 들어오는데에는 여러 곡절이 있었다.


이 책의 부록으로 <부일(附一): 고룡무협소설 내지지려(內地之旅)>가 있는데, 여기세어 상세하고 전면적으로 고룡소설의 내지와의 접촉을 소개하고 있다. 내지출판사업의 개방 및 발전과 더불어 결국 내지에 안착하게 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내지의 무협소설붐은 시작이 늦었다. 1980년대에 비로소 대량으로 들어온다. 그때 홍콩 대만의 무협소설은 이미 20여년간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많은 무협대가들은 이미 붓을 내려놓거나 작고했다. 특히 고룡은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고 인정을 받았는데, 그때는 이미 그의 유작이 되어 있었다. 당시의 내지에는 홍콩대만과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 책대여소가 있었다. 당시는 책대여소마다 고룡의 무협소설이 있었다. 고룡과 김용의 소설만 있으면 책대여소를 열 수 있었다. 작자이 불완전한 통계로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무협소설을 인쇄한 적이 있는 출판사는 200곳에 이른다. 독자들이 보기만 하면, 각 출판사들은 각종 홍콩과 대만의 무협소설들을 들여왔다.


비록 이렇게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작자가 각종 자료를 살펴본 후, 고룡과 내지출판사간의 여하한 왕래도 발견하지 못했다. 1985년 고룡이 사망하기 전에, 내지의 <저작권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극소수 내지출판사들만이 홍콩대만무협소설에 고료를 지급했다. 예를 들어, 김용은 내지에서 그렇게 인기를 끌었고, 책이 범람했으며, 각종 판본의 각종 작품이 모두 있었고, 심지어 합편판, 정선판등도 있었는데, 1994년이전에 김용이 정식으로 판권을 판매한 것은 딱 1부뿐이었다. 도서의 인기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당시의 일부 출판사들은 법률리스크를 피하기 위하여, 일부 모호한 서명으로 관계를 단절했다. 예를 들어, 어떤 출판사는 자신은 당시 홍콩모출판사의 해외판을 사용하여 인쇄했으며, 작자의 고료는 원작자가 그들과 연락하면 지급하겠다고 성명을 올려놓는 것이다. 다만 당시 양안관계는 아주 복잡하여, 고룡의 친척이 어떻게 멀리 대륙에 있는 책까지 볼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추적할 힘도 없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곤란을 극복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가 성명에서 쓴 출판사는 홍콩에 있지 않고 대만에 있다. 그리고 해외판의 수권을 한 바도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주도면밀하고 그럴듯한 성명이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없는 수사였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어떤 판본을 근거로 했는지는 알 수가 있다. 작자는 판본들을 살펴본 후 내지에서 인쇄에 사용된 판본은 가로쓰기를 세로쓰기로 바꾸고, 번체자를 간체자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교열과 인쇄과정에서 빠지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인쇄품질도 좋지 않았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수억의 독자들에게 고룡이라는 이름을 인식시켜 주었다.


고룡무협소설의 내지로의 여행과정에서 복제, 도판이 가장 골치아픈 일은 아니었다. 위작(僞作)과 모명(冒名) 작품이 진정한 골치거리였다. 어떤 출판사는 편집지식이 부족하고 심사가 엄격하지 않아서, 어떤 출판사는 고의로 독자를 속였다. 어떤 출판사는 작품의 작자를 장관이대(張冠李戴)하는 경우가 있었고, 일부 문자는 독자들을 오도시켰다. 고룡의 큰 제자 정정이 쓴 <변성도성(邊城刀聲)을 고룡의 <괴협신도(怪俠神刀)>로 출판하고, 거기에 뒤에 글까지 붙여서 이것이 고룡의 유작이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어떤 출판사는 "심승의(沈勝衣)시리즈"를 내놓았는데, 심지어 고룡의 명의로 자서(自序)까지 써놓았다. ㄱ기에는 고룡이 여러 곳에 발표한 글들을 짜집기하여 사기성이 농후했고, 고룡의 서예낙관까지 덧붙였다. 기실 이 시리즈는 전혀 고룡의 작품이 아니다. 영이파(靈異派) 추리작가인 황응(黃鷹)의 작품이다. 당시 출판상들은 독자들의 정보가 제한된 것을 이용하여 공공연히 독자들을 기망했다. 이런 행위는 작자이건 필자이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짓들이다.


위작의 존재는 비록 사람들에게 고룡이라는 이름을 알리기는 했지만, 동시에 고룡에 부정적인 영향도 조성한다. 당시 일부 문학평론가는 고룡의 위작에 대하여 비평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러나 고룡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일체는 이렇게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1991년 6월 <저작권법>이 정식으로 실시되면서 그후 내지의 출판계는 정상궤도에 접어든다. 업계의 판권의식이 점점 강화된다. 비록 어떤 출판사들은 여전히 판권을 수권받았다고 하면서 도판을 찍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작자는 전문적으로 수권자가 고룡의 친우나 합법적으로 고룡소설을 출판한 적이 있는 대만출판사를 나열하고, 정판의 명의로 내놓은 고룡소설의 출판사들을 열거했다. 출판시장의 환경을 정화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협소설의 내지에서의 영향ㅇ력은 도판으로 인하여 파생되어나왔다고할 수 있다. 이는 중국출판업계가 반드시 거쳐야 했던 일이다. 제도는 계속 완비되고 있다. 부협소설은 1990년대의 전성기를 거친 후, 지금 비록 그때만큼 인기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단한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다. 2018년 김용이 사망하면서, 모두 무협소설의 지주가 없어졌다고 여긴다. 다만 이는 약간 지나치게 비관적인 견해이다. 문학유형의 하나로서, 일종의 세계에서 인정받은 중국특색의 문학이다. 무협소설은 이번에 나온 <고룡무협소설지견록>과 마찬가지로, 역사가 되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널려 있다. 그것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연구자들이 발굴해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