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하나의 민족에게 최대의 비애는 무지(無知)가 아니라, 무지를 자랑이라 여기는 것이다.

중은우시 2022. 1. 8. 00:05

글: 뇌이(雷頤)

 

역사는 사악한 선생이다. 단지 자유인에게만 진상을 말해주어서, 오직 자유인만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자격과 능력이 있다.

 

서방을 배우는 학습과정에서, 근대 중국인들은 시종 진정한 문제를 찾지 못했다. 소위 남원북철(南轅北轍)이다. 방향이 틀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헛일인 것이었다.

 

이하지방(夷夏之防)

 

아편전쟁때, 임칙서(林則徐)는 광동으로 가서 방어를 했다. 다만 그는 영국인을 전혀 몰랐고, 적의 상황에 대하여도 전혀 몰랐다. 당시 서양인은 무릎을 굽힐 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누가 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모두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임칙서도 믿었다.

 

일찌기 외국사신이 건륭제를 만날 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은 그들이 무릎을 꿇기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은 무릎을 굷힐 수 없어서,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칙서의 상소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그는 전선으로 가서 살펴보다가 영국인들도 무릎을 굽힐 줄 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상소문에 다시 이렇게 적었다. 영국 군인의 복장은 아주 꽉 죄어서, 발목부터 대퇴부까지 붕대로 꽉 졸라매기 때문에 무릎을 쉽게 구부릴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수천개의 긴 대나무장대를 준비해서, 쌍방이 교전을 벌일 때, 장대로 찌르면, 영국인들은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쓰러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잘 굽히지 못하기 때문에, 한번 찔리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임칙서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다시 한 사람을 얘기해보자. 몇번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도, 청정부는 그들이 패배한 원인이 중영 양국간의 심층적인 차이때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지휘관이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호남제독(湖南提督) 양방(楊芳)을 보내 지휘하게 한다. 양방은 광주에 도착한 후 아직 제대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음 날 바로 영국군함이 왔고, 그 자신도 가서 관전했다.

 

관전할 때 그는 아주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다: 영국군함은 물에서 아래위로 흔들리고, 대포도 따라서 흔들리는데, 아주 정확하게 맞추고, 위력도 아주 컸다. 그는 이것은 사술(邪術)을 쓰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사술을 깨버려야 했다. 그의 방법은 광주에서 마통(馬桶, 변기통)을 모은다. 가장 더러운 물건이 사술을 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무엇을 모았을까? 중국전통문화에서 부녀자를 차별했다. 그래서 부녀자들의 위생용품도 모은다. 즉 월경대이다. 

 

다음번 영국군이 왔을 때 그들은 이들 마통과 월경대를 대나무에 걸어놓았다. 그렇게 하면 사술은 깨질 것이고, 영국군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당연히 이건 아무 소용이 없다. 양방의 생각은 당시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중국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임칙서를 보자. 그는 이 전투를 거치면서, 외국에는 우리가 완전히 모르는 분야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임칙서는 규정을 위반하여, 몰래 광동의 일부 지식인들로 하여금 영국의 각종자료, 지리서, 신문을 수집하여 <사주지(四洲誌)>라는 책을 편찬하게 한다. 그는 이것이 청나라의 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았고, 감히 공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래도 퍼져나간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들 자료를 왜 모으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임칙서가 한 말은 "오랑캐를 알기 위해서(悉夷)"라고 말하면서, 지피지기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를 공격했다. 너는 적군의 위풍을 드높이는 것이라고. 우리 중국문화가 가장 좋은 것이니, 우리는 그저 자신의 치국의 도리, 윤리강상을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국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칙서는 유배를 가게 된다. 외국을 이해하자고 했다가, 외국의 위풍을 드높이는 짓이라고 비난받은 것이다. 이것이 임칙서의 죄중 하나이다. 

 

신강으로 가는 도중에, 임칙서는 진강(鎭江)에서 가까운 친구인 위원(魏源)을 만난다. 그는 아편전쟁의 상황을 친구에게 말해준다. 그는 중국이 세계를 잘 이해해야한다고 말하면서, <사주지>를 위원에게 건네준다. 그는 위원의 자신의 뜻을 이뤄주기를 바란 것이다. 위원은 몇년의 시간을 들여 자료를 수집한 다음 <해국도지(海國圖誌)>를 편찬해서 내놓는다.

 

이 책은 당시 외국상황을 가장 전면적으로 소개하는 책이었다. 모든 국가의 역사, 경제, 군사, 특히 이들 나라의 무기, 윤선, 군함을 소개했다. 임칙서의 관념에 따르면 이런 방식은 "사이장기이제이(師夷長技以制夷,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서 오랑캐를 이기는 것)"다. 즉 너희는 중국의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으면서, 전통이든 제도든 모두 좋다고 하지만, 무기는 남들만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의 무기를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적의 위풍을 드높였다"는 죄명 외에 임칙서에게 붙인 또 하나의 죄명은 "궤이하지방(潰夷夏之防)"이다. 즉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화하(중국)과 만이(오랑캐)간에는 문화적인 방어선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임칙서가 그 문화방어선을 무너뜨린 것이다. 오늘날의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중국전통문화의 안전을 파괴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아주 큰 죄명이었다.

 

그래서 당시 보편적인 중국인들은 <해국도지>라는 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만 이 책은 금방 일본에 전해진다. 일본인들은 짧은 2년만에 21판을 찍어낸다.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아주 중요한 사상계몽작용을 했다. 일본으 ㄴ이 책을 통하여 세계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았고, 그들 자신도 유신하고 강성해져야 한다고 느낀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일본은 바로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부국강병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중국을 침략했다는 것을. 임칙서는 중국인을 계몽하기 위해서 책을 쓰게 했는데, 중국인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인들을 계몽시켰다. 일본은 오히려 이로 인하여 강대해지고 결국 중국을 침략한다. 이런 역사의 비극은 우리가 통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생각해보자. 도대체 양방의 그 중국전통을 견지하려는 것, 전쟁에서 패배하면서도 적에게서 배우지 않으려는 것, 서방을 배우지 않는 것과 임칙서의 오랑캐의 장점을 배워서 오랑캐를 이기자는 것. 둘중 어느 것이 진정한 애국인가? 왜 그들은 맹목적으로 외국을 배척하는 것만이 애국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만한지쟁(滿漢之爭)

 

만청(晩淸) 70년의 기간중에 20년이라는 시간을 외국인에게 총포를 사용하는 것을 배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느라 헛되이 보냈다. 이 왕조는 정말 너무나 견식이 없다. 전통의 짐이 너무 무거웠다. 스스로 천조상국(天朝上國)이라고 여기면서, 그저 남들이 자기를 배워야한다고 생각했을 뿐, 자신은 남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왜 20년을 그냥 흘려보낸 후, 배우게 되었는가? 그것은 증국번(曾國藩)등 한족관료들이 굴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절실하게 서양총과 서양대포의 무서움을 느낀다. 그래서 서양총과 서양대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 그들이 생각해낸 것이 바로 그 <해국도지>이다. 그리하여 20년간 묻혀 있었던 <해국도지>를 다시 꺼내서 대량으로 찍어낸다. 그리고 관리와 독서인들에게 모두 이 책을 읽도록 했다.

 

증국번등은 서양총과 서양대포를 만들고, 총포를 이용해서 침략자를 막아내거나, 농민반란을 진압하고자 했다. 이것은 청왕조에 좋은 일이다. 다만 그들은 조정내부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는다. 왜 이런 압박이 온 것일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청나라는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어 들어와 한족을 통치한 것이다. 만주족은 한족보다 수가 적다. 그래서 청나라조정은 한족을 경계했다. 한족은 지방대신이 될 수 없도록 했다. 총독, 순무는 있어도, 군권은 만주족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다만 태평천국의 난은 청나라의 군대가 형편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진압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증국번이 자신이 조직한 상군(湘軍)으로 진압해야 했다. 증국번은 이 과정에서 군권을 획득한다.

 

좌종당(左宗棠)의 초군(楚軍),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도 모두 상당히 큰 군권을 획득한다. 필자의 생각에 태평천국의 가장 중요한 성과이자 객관적인 성과는 청나라조정이 산해관을 넘은지 이백년만에 한족에게 상당히 큰 권력을 부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무파는 총과 대포를 만들고자 했는데, 조정내부로부터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어보겠다. 전투를 하려면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당시에는 말을 타고 정보를 전달했다. 1868년에 외국은 이미 전보가 있었다. 이홍장도 조정에 신청한다. 전보를 보내자고. 조정은 극력 반대한다. 이건 오랑캐의 물건이라는 것이다. 당시 임칙서에게 했던 말처럼 오랑캐는 쓸 수 있지만, 우리는 쓸 수 없다. 그래서 전보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홍장은 여러번 제안한다. 그러나 매번 거절당한다. 조정은 핑계를 찾았다: 중국은 조상을 숭배한다. 우리의 조상묘는 땅 속에 있다. 그런데 전선은 당시에 지하에 매설해야 했다. 지하에 매설하면 전류가 흐른다. 전류가 흐르면 조상묘를 놀라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조상이 불안해지고, 조상이 불안해지는 것은 불충하고 불효한 짓이다. 그래서 조정은 전보사용을 거절한다.

 

이홍장은 나중에 직예총독, 북양대신이 된다. 그후 1879년, 그 자신은 조정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로 몰래 천진의 북양총독아문과 천진포대에 전선을 설치하여 이 전화로 적지 않은 포대를 지휘한다. 너무나 신기하다고 여겼다. 동시에 이쪽에서 말하면 저쪽에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는 전투를 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그는 스스로 너무 좋다고 여겨서 다른 관리들에게도 써보라고 한다. 다른 관리들도 시험해 보고는 확실히 좋다고 여긴다. 결국 조정에서도 좋다고 하게 된다. 그래서 1880년 전보를 보내는 것을 허락한다.이홍장이 1868년부터 꾸준히 요구했던 것을 1880년에 이르러 비로소 허락해 준 것이다. 전보를 쓰자는 것이 정치체제개혁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로 인한 이점은 분명한 것이었음에도.

 

정상적인 정부라면 모두 알 것이다. 우리가 적과 싸우고 있고, 계속하여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있고, 계속 외국이 침략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휘해야 하고, 명령도 전달해야 하고, 전방의 소식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12년동안이나 생각한 것이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전보시스템을 갖추는 것이었다.

 

천조상국의 허교자대(虛驕自大)

 

청나라조정은 심리적인 장애가 있었다. 오랑캐의 물건은 우리가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심리장애를 극복하는데 12년이 걸렸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 큰 곤란은 철로를 만들 때 나타난다. 이홍장은 1872년부터 철로를 건설하자고 제안한다. 공친왕(恭親王)에게 철로를 건설하가조 말한다. 그는 철로를 건설하면 군인을 운송하는데 아주 좋다고 설득한다.

 

공친왕도 당연히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가 너무 컸다. 그래서 내놓지 못한다. 나중에 이홍장이 안을 낸다. 안을 내자마자 반대의 목소리가 가득했고, 그를 견책하고, 그를 매국노라고 불렀다. 철로를 건설하려면 산을 만나면 산을 폭파시켜야 하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건설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지신, 산신, 하신을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이들 신령은 대청의 강산사직을 보우해주고 있는데, 이들 신령에게 죄를 지으면 어떡하냐는 것이다.

 

이홍장은 매번 상소에서 철로건설의 이점을 얘기했고, 철로를 건설하면 그곳이 발전한다고 말했다. 이것도 전통유학자들에게 반박당한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철로를 건설하면 그곳의 인심이 나빠진다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현의 책에서는 군자는 의(義)를 중시하고, 소인을 이(利)를 중시하는데, 철로가 지나가는 곳에는 순박한 민심이 나빠질 것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철로를 만든 후, 모르는 남녀가 같은 칸에서 몇날 며칠밤낮을 같이 지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이홍장은 전보를 만든 경험이 있었다. 그는 그의 세력범위내에서 북양수사(北洋水師)를 건설하고, 북양수사는 석탄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정도 그에게 석탄채굴에 동의한다. 이홍장은 나중에 보고를 올리지 않고, 석탄을 캔 후에 당산(唐山)에 길이 9.8킬로미터의 철로를 건설한다.

 

그는 이 철로로 석탄을 운송하면, 모든 사람들이 경험해보고, 그 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홍장은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조정에 보고할 때는 중국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단어를 써서 새로운 사물을 보고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에는 신마로(新馬路)를 건설하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런 시설을 반드시 철로라고 불러야한다는 법은 없었다. 조정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홍장은 아주 총명했다. 그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증기기관의 기차로 석탄을 운송하지 않았고, 몇필의 나귀로 기차를 끌게 했다. 기차에는 석탄을 실었다. 철궤위를 9.8킬로미터나 끌고가서 내리곤 했다. 이런 적응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당산석탄광산과 철로를 건설한 영국엔지니어는 이를 보고 황당해 했다. 철궤를 만들어 놓고는 당나귀로 기차를 끌게 하다니.

 

그는 중국정부가 돈이 없어서 그런다고 여겼다. 증기기관차를 살 돈이 없어서. 마침 당산석탄광산에는 보일러가 있었다.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홍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그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증기기관차로 개조했고, 철로위를 달리게 만들었다. 기차를 여러 칸 연결해서 한꺼번에 석탄을 가득 싣고 운행했다. 이것이 1880년의 일이다. 다만 증기기관차에서 소리가 나자 사람들은 놀라 혼비백산한다. 이건 요마귀괴(妖魔鬼怪)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즉시 조정에 보고한다.

 

그제서야 조정은 알았다. 원래 이홍장이 철로를 만들어 석탄을 운송하려 했다는 것을. 그래서 이홍장에게 철로를 철거하도록 지시한다. 이홍장은 아주 교활했다. 그는 일처리를 하면서 항상 우회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조정에서 금기로 여기는 것은 증기기관차라는 것을 잘 알았기 대문에, 증기기관차를 쓰지 않고 다시 당나귀로 끌었다.

 

1883년에 이르러, 중국-프랑스전쟁이 비교적 긴장되었을 때, 이홍장은 이렇게 말한다. 북양수사는 석탄이 필요하고, 빨리 운송해야 하니 증기기관차를 써야 한다. 그러자 조정도 9.8킬로미터에서의 증기기관차 사용을 허가한다. 그래서 증기기관차는 다시 철로위를 달릴 수 있었다.

 

이홍장의 일처리에는 특징이 있다.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알고 있다. 아무도 전심전력을 다해서 그를 지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계속 기회를 노렸다. 무슨 기회인가? 모두 알다시피 1884년에 중국-프랑스간의 해전이 있었고, 복건수사(福建水師)의 모든 전함이 격침된다. 청나라의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중국은 현대화된 군함이 없었다. 모두 연해, 연강의 지방관이 범선을 사서 물을 잘 아는 병사들을 범선에 태운 것이고, 기껏해야 해적이나 막는 것이었다. 당시의 수군은 이 정도 수준이었다.

 

다만 아편전쟁이래, 열강은 모두 해상에서 군함을 이용하여 침략했다.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과 연해의 총독 순무는 자신의 지방정부의 돈으로 영국, 프랑스, 혹은 독일에서 현대화된 군함을 구입했고, 북양수사, 남양수사, 광동수사와 복건수사를 건립한다.

 

그리고 좌종당, 이홍장은 한 가지 문제를 인식했다. 현대화된 함대가 있으면, 해군사령부에서 통일적으로 지휘해야 한다는것을. 이 몇 개의 수사는 미국의 표준을 쓸 수없었고, 프랑스의 표준을 썼다. 그래서 좌종당이 먼저 보고서를 올려서, 조정은 해군아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아문은 바로 현재의 해군사령부이다. 이홍장도 제안한다. 몇 개의 함대가 구성되었으니 반드시 통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거절한다. 왜 거절했는가? 통치자가 보기에 오랑캐의 군함을 사용하는 것만도 하책으로 부득이 하는 것이고, 체면이 상하는 일인데, 다시 정부기구에 이호예병형공이 아닌 중국의 전통에는 있지도 않은 해군아문을 오랑캐의 방식대로 설치하다는 것은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청나라조정의 단견을 보여준다. 이건 정치체제개혁문제가 아니다. 기구를 없애는 일이고 관리의 이익을 침범하는 일이지만, 새로 기구를 만들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리가 될 기회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884년의 마미해전(馬尾海戰)에서, 복건수사의 모든 전함이 침몰되는 일이 발생하여 통일된 지휘기구가 없기 때문에, 남양수사, 광동수사와 북양수사에서 지원을 갈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때 좌종당, 이홍장은 기회를 잡아 조정에 상소를 올린다. 반드시 해군아문을 설치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조정은 그제서야 해군아문의 중요성을 알았고, 동의하게 된다.

 

이런 일은 청나라조정이 변혁에 항상 수동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좌종당, 이홍장같은 조정에 충성하는 대신들이 지방에서 자신의 돈으로 함대를 건설하였으며,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지휘해달라고 요구하는데, 오히려 중앙에서는 거절한다. 필요없다. 나는 지휘하지 않겠다. 그것은 체면이 상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함대 하나가 침몰하고나서야, 참혹한 댓가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해군아문을 설립하게 된다.

 

해군대신은 현재의 해군사령관이다. 서태후는 당연히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을 해군대신에 앉힌다. 그가 취임한 후, 이홍장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의 북양수사는 아주 강합니다. 천진으로 한번 시찰을 와주십시오. 혁현은 북양수사를 시찰한 후, 현대화된 군함이 대단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파도가 심하게 치는데도 대포는 아주 정확했다. 그는 군함에 서 있는 것이 위엄이 서는 일이라고 여긴다. 이홍장은 그 기회를 잡아 말한다. 군함이 바다에서 왜 이렇게 빨리 갈 수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석탄보일러를 동력으로 써서 추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석탄을 당나귀로 운송하고 있습니다. 여러마리의 당나귀로 여러 달을 운송한 것을 이번 한번에 다 써버립니다. 만일 전쟁이 나면, 당나귀로 석탄을 운송해서는 도저히 양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이 군함들은 항구에서 그저 적의 포탄을 맞고만 있어야 합니다.

 

혁현은 원래 철로건설을 반대한 사람이다. 이때 그는 철로로 석탄을 운송해야하는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홍장은 그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해군의 명의로 조정에 보고서를 올려주십시오. 중국은 철로를 대규모로 건설해야 한다고. 혁현이 말한다. 내가 지금 건의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다만 나는 네 생각을 지지한다. 네가 먼저 당산의 철로를 서둘러 완공해라.

 

그의 지지가 있으니 이홍장은 보고서를 올릴 필요가 없었다. 드러내놓고 철로를 건설했다. 이 철로를 천진의 북양수사 항구까지 연결시킨다. 1888년 순친왕 혁현은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보고, 해군사령부의 명의로 조정에 보고서를 올려 군대에는 군함도 있고, 항구도 있는데, 철로를 이용해서 항구까지 석탄을 운송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상소문이 조정에 올라가자, 서태후는 각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한다. 철로를 만들어야할지 말지를. 혁현의 권력이 아주 컸기 때문에 이때 반대하는 목소리와 찬성하는 목소리가 반반이 된다.

 

이때 지방대신 장지동(張之洞)이 나서서 철로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서태후는 1889년 전국에 철로를 건설하도록 지시한다. 이홍장이 1872년 제안한 후 17년이 지난 1889년에 비로소 서태후의 동의를 받아낸 것이다. 철로를 건설하는 것은 무슨 관리의 이익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이점만 많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17년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체제개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청나라는 자신이 천조상국이라는 체면에 집착하여, 실제로는 스스로를 해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