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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가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에게 패배한 주요 원인은...?

by 중은우시 2024. 4. 22.

글: 양각풍(杨角风)

<옹정왕조>를 본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강희제(康熙帝)가 임종때 황위를 황사자 윤진에게 넘겨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황팔자 윤사는 수십년간 쏟아부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을.

비록 그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였고, 사전에 상세한 준비와 배치를 해놓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수준이 너무 뛰어났고, 자신쪽은 백밀일소(百密一疏)가 있었다. 그리하여 황팔자당의 핵심인원들은 장정옥(张廷玉)이 창춘원(畅春园)을 통제하면서 소식이 바깥으로 전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황상을 대표하는 금패영전(金牌令箭)이 소리소문없이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강희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달되기 전의 시간차를 이용하여 풍대대영(丰台大营)을 장악했다.

이제, 상황은 정리되었고, 황팔자 윤사는 아무리 원치 않더라도, 현실의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칭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황팔자 윤사는 도대체 어느 점이 부족했기에 강희제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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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가 황사자 윤진에게 황위를 넘겨준다는 말을 듣자, 청천벽력같았던 황팔자 윤사는 처음에는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있는 힘껏 소리질렀다:

"황아마(아마는 만주어로 부친이라는 뜻임)! 황아마! 금방 황위를 누구에게 물려준다고 하셨나요? 우리는 잘 못들었습니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만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나, 강희제는 이때 이미 기력이 다 했고, 그 말을 마친 후,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원래 황팔자 윤사의 일당은 마지막까지 버티고자 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협박하여 분명히 듣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황제의 자리를 누구에게 전할지에 대하여 분쟁이 있는 결과를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전에 말한 것처럼, 이때 창춘원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은 장정옥이다. 그는 어전시위를 통제하고 있었다. 황사자 윤진을 보호했을 뿐아니라, 황팔자 일당도 제압하여, 소식이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황십삼자 윤상이 풍대대영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자 모든 것은 끝난다. 황팔자 윤사도 부득이 자신이 황위계승투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정옥이 신황제에게 절을 하라고 선언하고, 융과다(隆科多)가 무릎을 꿇지 않는 자들은 설마 대청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냐고 재삼 소리친 후, 황팔자 윤사는 몸을 움직여 황사자 윤진, 즉 신황제 옹정제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던 황구자 윤당(胤禟)과 황십자 윤아(允䄉)는 황팔자가 타협하는 것을 보고 그저 가볍게 탄식하면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황팔자 윤사는 "팔현왕(八贤王)"으로 불리고, 황위쟁탈을 위하여,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왔다. 그리고 여러 형제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조정의 대신들중 절반이상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천시, 지리와 인화를 모두 얻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강희제의 눈에 들지 못하고, 황제에 오르지 못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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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관하여, 강희제는 임종전에 황사자 윤진에게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황팔자 윤사가 황제에 오를 수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은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고.

"팔아거(아거는 만주어로 아들이라는 뜻임) 윤사는 여러 면에서 짐을 배우려고 했지만, 여러 면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짐은 관용과 인자로 사람을 다스렸는데, 그는 관용과 인자로 인심을 매수했다. 짐은 아랫사람들을 지나치게 풀어주었는데, 그는 짐보다도 더욱 풀어준다."

어떡할 것인가. 그저 황팔자 윤사가 때를 잘못 만났다고할 수밖에 없다. 만일 수십년이후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건륭제가 나타나지 않았을 수 있다. 강희제는 말년에 정사에 게으르고, 관료들은 부패했으며, 국고는 텅비었으며, 백성들도 살기 힘들었다. 그 자신도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는 체면을 중시했고, 자신의 사람들을 아꼈다. 그래서 대거 칼질해야하는 개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옹정왕조>의 첫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황하의 제방이 무너지고 이재민이 사방에서 발생하여 조정의 구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국고를 보내 충분한 돈이 없었다. 구휼할 충분한 양식마저 없었다. 이건 원래 황제의 직무유기이다. 그러나 강희제는 개념을 바꾸어, 주제를 바꿔서 황태자 윤잉(胤礽)의 잘못으로 떠넘겨 버린다.

"현엽(玄烨, 강희제의 이름)은 국사를 태자에게 넘겨주었고....."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강희제는 잠시 멈춘다. 아마도 황태자도 자신이 세운 것이라는 것을 떠올린 것같다. 그리하여 이렇게 보충하여 말한다:

"...그리고, 너희 아거들이 협력하여 처리했는데, 지금 이런 꼴로 만들었다. 우리중 누가 그걸 모르겠느냐!"

그리고 뒤에 호부에 진 빚을 받아내는 면에서도, 황사자 윤진이 앞에 나서서 처리한다. 오늘은 삼아거 윤지(胤祉)를 대신하여 삼심만을 갚고, 내일은 다시 위동정(魏东亭)을 대신하여 수십만을 보충하고, 다음날은 다른 노신들의 빚을 갚아준다.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을 일은 하고 싶지 않으면서 또한 국고는 채우고 싶었다. 호부의 돈을 채우는 일은 이렇게 진행하여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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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하려고 배운다는 것에 대하여 황팔자 윤사는 황상을 그대로 배우면, 황상이 그를 좋아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건 나중에 홍력(弘历, 즉 건륭제)의 모습과 아주 비슷하다. 어린 홍력은 열하에서 사냥을 한 후에 강희제에게 배운다. 그는 성격과 행동까지 모두 할아버지 강희제를 따라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큰 잘못이었다.

홍력이 실제로 암중으로 배운 것은 자신의 황아마, 즉 옹정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웃어넘기는 것같지만, 실은 아주 악독하다. 마찬가지로 가족 친척에게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이 점을 황팔자 윤사는 이미 알아차렸다. 그래서 집안이 몰수될 때, 홍시(弘时)에게 이렇게 일깨워준다:

"홍력은 항상 사람들에게 우아하고 관대하며 후덕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다만 손을 써야할 때는 눈썹한번 찡그리지 않는다. 산동에서 순무를 죽이고, 번대를 죽이고, 효대를 죽이고 한꺼번에 이십여명의 관리를 죽였는데, 그는 심지어 성지조차 내리지 않았다."

옹정제가 아무렇게나 한 말을 믿지 말라. 홍주(弘昼)가 가장 그와 닮았다는 말 같은 것이다. 홍주는 황위계승전의 험악함을 본 후에 진심으로 더 이상 정사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화상, 도사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황사자 윤진은 불교를 믿는 것으로 가장했다. 그가 매일 염주를 손에서 굴리고 있는 것만 보지 말라. 그래도 살륙은 멈추질 않았었다.

단지, 황팔자 윤사가 평가하는 것처럼, 홍력은 다른 두 황자들보다 똑똑했다. 옹정제는 어떤 때는 거짓으로 인의를 가장하면서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즉위당일 저택으로 돌아왔고, 겉으로는 오사도(邬思道)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실은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마찬가지로 홍력도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겉으로는 홍시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 건에 대하여 대범한 모습을 보였지만, 배후에서는 칼질을 했다.

까놓고 말해서, 옹정제는 이런 자신을 싫어했다. 그래서 천하의 선비들에게 자신이 욕을 다 먹는다. 어떻게 하더라도 홍력이 그런 비난은 듣지 않도록 자신이 대신 모두 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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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는 홍력이 자신을 따라 배우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황팔자 윤사를 처리하기 전에 그는 홍력에게 일을 맡겨서 다른 곳에 보낸다.

한편으로 그로 하여금 외부에서 공적을 쌓게 하여 백성들에게 명망을 얻게 하기 위함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가 지저분한 권력투쟁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이 그 욕을 다 얻어먹음으로써, 향후 홍력이 당당하게 즉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병상에 누워 있던 황십삼자 윤상으로 하여금 홍력을 위해 기뻐하게 만들었다:

"황상과 같은 이런 좋은 부친을 만나다니, 홍력은 정말 복이 많구나!"

그 말에 숨은 뜻은 바로 자신은 왜 당초 그렇게 좋은 부친을 만나지 못했을까라는 한탄이 아닐까

그렇다. 강희제는 자신의 것을 아끼면서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배우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당초 폐태자 윤잉의 스승인 왕염(王掞)이 말한 것처럼, 태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지적을 해달라. 가르치지도 않고 직접 주살한다면 그것은 바로 "불교이주(不教而诛)"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강희제는 임종전에야 비로소 이렇게 말한다. 황십삼자 윤상이 일시의 충동으로 큰 잘못을 저지를까 우려하여 그를 십년간 연금해 두었다고. 인생은 수십년인데, 잘못을 저지를까 두렵다고 하더라도, 부친으로서 교육을 하고,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아들에게 십년씩이나 자유를 빼앗아 버린단 말인가?

이 일로 인하여, 나중에 황십삼자 윤상은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옹정제의 앞에서도 여리박빙(如履薄冰)한다. 나중에 옹정제가 혼을 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렇게 된 연유를 얘기한다:

"종인부(宗人府)에 황아마에 의해 꼬박 십년간 갇혀 있었습니다...한번 보십시오. 제 머리카락도 반이나 백발이 되었습니다...제가 금년에 겨우 37살임에도."

황팔자 윤사의 경우를 보더라도 같은 문제가 있다. 강희제로서 그가 인의로 인심을 매수하는 것을 보았다면 사전에 예방하거나 사전에 경고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황아마의 말을 듣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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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강희제는 자신이 모범을 보이면서, 황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중에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예를 들어 구자탈적(九子夺嫡)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황이자 윤잉은 만1살이 되자마자 황태자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황사자 윤진, 황팔자 윤사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그런 황태자인 형이 있었다. 관건은 그때의 황태자는 그들 형제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형제들도 그를 따랐다는 것이다. 별다른 일만 없다면, 그는 미래의 황상이 될 것이다.

다만 문제의 관건은 강희제가 너무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태자 윤잉의 의자에서 버섯이 자랄 정도인데도, 부친은 여전히 건강했다. 이런 시간이 오래되다보니, 황태자가 원망을 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강희제는 마음 속으로 미안했을 것이다.

강희제는 마음 속으로 미안하다보니 황태자를 다독인다. 어쨌든 나중에 황위는 너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방법으로 황태자에게 보상을 해준다. 그에게 감국을 맡게 하고, 더욱 큰 권력도 주어, 국사의 일부를 분담하게 한다.

그러나 황태자 윤잉이 일단 권력을 갖게 되자, 조정의 신하들도 그의 편에 서게 된다. 시간이 오래되다보니 태자당이 형성된다. 이것은 강희제로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권력이라는 것은 이기적이다. 특히 황권은 그러하다. 예를 들어, 희극에서 열하에서 몽골왕공을 접대할 때, 몽골왕공은 금여의를 특별히 황태자 윤잉을 특별히 지목하여 바치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강희제는 얼굴을 굳히면서, 황태자는 지금 병이 들어 선물을 직접 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사실상, 강희제는 그렇게 민감할 필요가 없었다. 황태자 윤잉의 권세가 아무리 커도 부친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정말 안심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좀 더 힘들더라고 권력을 회수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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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인하여, 강희제는 저녁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무슨 방법일까?

평형술을 펼치는 것이다. 여러 황자들에게 직무를 나누어줌으로써 황태자 윤잉이 수중이 가진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더 이상 힘들게 일하지 않으면서, 여러 황자들이 상호견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실 이것도 무슨 새로운 방식은 아니다. <대명왕조1566>을 보면, 가정제도 그런 방식을 썼다. 결국은 균형이 무너지면서 자신까지 말려들게 된다.

강희제가 이렇게 한 것에 가장 힘들어했을 사람은 황태자 윤잉이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웠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파리를 잡아먹은 것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견디기 힘들고 초조해지면서 심리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의심하는 증세가 심해진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황태자 윤잉은 장기적으로 공포 속에서 살면서, 조울증을 얻었다.

사람이 일단 조울증에 빠지면 쉽게 분노한다. 우선 성격이 아주 나빠진다. 걸핏하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한다. 드라마에서 황사자 윤진이 황태자를 속이고 호부의 장부를 검사한다. 조회를 마친 후, 황태자 유인은 잔을 집어던지면서 발광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황태자 주변의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재앙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가벼우면 욕을 얻어먹고, 심하면 얻어맞는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황태자 윤잉의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분노가 쌓이게 된다. 드라마의 황장자 윤시(胤禔)는 황태자 신변의 환관을 이용하여, 저주의 중요한 단계를 완성한다. 황태자 윤잉에게 조그만치의 움직임만 있더라도, 주변사람을 통하여 소리소문없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심지어, 역사상 제1차 폐위는 주변인들이 집단으로 강희제에게 고발했기 때문이다. 태자가 한밤중이 잠을 자지도 않고, 황상의 장봉(帐篷) 속을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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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황태자 윤잉에게 이런 증상이 나타나게 된 근원은 바로 강희제 자신에게 있다. 아쉽게도 강희제는 그걸 몰랐고, 오히려 분노해서 태자를 폐위시킨다.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하여, 구자탈적이 정식으로 시작된다. 이전에는 여러 황자들이 아예 황태자의 자리를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희망이 생겼다.

특히 황팔자 윤사는 그러했다.

황태자 윤잉이 이런 국면에 처하게 된 것은 결국, 그를 옹호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졌고, 위신이 심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황팔자 윤사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현명"하다는 명성만 계속 유지해서, 대신들의 지지만 확보하면, 자신이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옹정왕조>에서 강희제가 어떻게 황팔자 윤사를 대하든간에, 최소한 여러 대신들의 마음 속에는 황팔자 윤사가 황태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하물며 황태자 윤잉을 폐위시킨 후, 강희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은 황자중에서 새로운 태자를 추천받겠다고.

"지방의 2품이상 관리, 경성의 4품이상의 관리들은 모두 현명한 자를 추천할 수 있다(择贤举荐)!"

보라. 이건 강희제가 직접 한 말이다. 남은 황제들 중에서 '현명'한 자를 추천하라고 했다. 그건 분명 황팔자 윤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나중에 새로 태자를 추천할 때, 퉁국유(佟国维)는 장정옥을 간신이라고 욕하고, 마제(马齐)도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며, 오직 팔황자 윤사만이 기준에 부합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 황십삼자 윤상이 황사자 윤진에게 황위쟁탈전에 참여하라고 권하자, 황사자 윤진도 이렇게 말한다:

"열세째동생, 너의 나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구나.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여덟째를 '팔현왕'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부르는지 아는가? 냉면왕(冷面王)이다!"

아쉽게도, 강희제의 이 조치는 낚시였다. 목적은 황태자 윤잉을 모함한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현명'하다고 알려지게 되면 그는 바로 황위에서 가장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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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황팔자 윤사는 연금되기 전에, 스스로를 파악하는 총명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가산몰수하러 온 홍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팔숙(八叔)의 평생은 모두 '현()'이라는 글자때문에 망했다."

그렇다.

"무슨 인심, 무슨 덕망, 결국은 한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왜 한푼의 가치도 없었을까?

왜냐하면 황권의 앞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이 '현'이기 때문이다. 네가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탐하거나 심지어 평범하고 멍청해도 괜찮다. 다만 이 현명한 것은 안된다. 황상이 될 수 없을 뿐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황팔자 윤사는 '현명'하다는 것을 가지고 대신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는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 황태자 윤잉이 범한 잘못과 같은 유형이다. 그리고 황팔자 윤사는 더욱 심한 경우였다. 예를 들어, 강희제 후반기에 모두 4명의 보정대신이 있는데 그중 3명이 그의 편을 들거나, 그에게 편향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일생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

모두 황권을 공고히 하는데 들였다. 무슨 오배(鳌拜)을 체포사고, 대만을 수습하고, 삼번을 제거하고, 갈단을 멸망시키고....무릇 황권에 위협이 되는 것은 모두 그의 적이었고, 중점타격대상이었다. 그런데, 황팔자 윤사는 황권에 도전할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나중에 네가 즉위한다면, 이들 옹립에 공이 있는 대신들을 어떻게 안배할 것인가?

그래서, 드라마에서 강희제가 임종전에 장정옥, 마제, 왕염등의 직위를 박탈한 것도 바로 이런 원인때문이다.

황팔자 윤사가 정말 황상이 되었다면, 강희제가 말한 것처럼, 부하들을 너무 방종할 것이고, 대사를 그르칠 것이다. 그들을 타격하게 되면 자신의 기반을 무너뜨리게 되고, 황위가 불안정해진다. 그들을 타격하지 않음녀 그것은 좀벌레를 남겨두는 것과 같아서 대청제국이 언제 망할지 알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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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정 황팔자 윤사로 하여금 황위와 인연이 사라지게 만든 것은 역사상의 "폐응사건(毙鹰事件)"이다. 드라마에서는 "사응사건(死鹰事件)"인데, 결과는 같다.

당시 강희제는 황팔자 윤사를 심하게 질책한다:

"신자고(辛者库)의 비천한 여자 소생이면서, 어려서부터 뜻이 높고 마음이 음험했다. 관상을 보는 장명덕(张明德)의 말을 듣고, 신하의 도리를 크게 어기면서 사람을 시켜 이아거(二阿哥)를 모살했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황팔자 윤사가 황위와의 인연을 잃게 된 것은 정말 너무 '현명'하였기 때문일까? 혹은 비천한 출신때문일까? 혹은 음험하고 교활하며 기만하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을 시켜 황태자 윤잉을 죽이려 했기 때문일까?

모두 아니다.

최소한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십삼자 윤상이 죽기 전에, 옹정제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대사를 이루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이 첫째입니다!"

무슨 뜻인가?

자신의 황위가 승계되고, 자신의 치국이념이 연속되게 하려면 반드시 적합한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적합한 후계자를 찾을 때는 그의 생각, 그의 능력, 그의 의지는 모두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을 얻는 것이다.

황팔자 윤사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무엇인가?

가장 부족했던 것은 국가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니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혹은 형편없는 출신도 아니고, 덕행도 아니다. 오히려 후사(子嗣)이다!

<옹정왕조>의 원저자인 이월하(二月河)는 그의 또 다른 동일유형의 소설 <강희대제>에서 당시 누구에게 황위를 전할지를 고려할 때 방포(方苞)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황손을 보십시오! 좋은 황손이 있으면 최소한 대청의 3대 태평강산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황사자 윤진의 아들 중에는 홍력이 황제가 되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황팔자 윤사의 아들 중에서는 누가 황제가 될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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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의식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의 '팔현왕'의 슬하에 오직 1명의 아들만을 두었다는 것이다. 설사 1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30살때 특별히 새로 소첩을 들여서 얻은 것이다.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강희제는 35명의 아들을 낳았고, 황사자 윤진도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당시 의료조건이 낙후한 상황하에서 강희제의 아들 중에서 요절율이 31.4%에 이르고, 옹정제는 더욱 심각해서 60%에 달했다.

만일 당신이 강희제라면, 대청을 결혼한지 10여년동안 아들 하나도 낳지 못하고, 유일한 아들도 성인이 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을지 알 수도 없는 황팔자 윤사에게 넘겨주겠는가?

사실상, 나중에 청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가장 중요한 원인중 하나도 마지막 3대황제가 모두 후사를 두지 못했다는데 있다.

강희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황팔자 윤사에게 황위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황팔자 윤사의 아들이 딱 1번 출현한다. 당시 황사자 윤진이 이재민구휼에서 돌아오고, 한무리의 관리들은 호부-로부터 은자를 빌렸기 때문에 팔야부(八爷府, 황팔자의 저택)를 찾아와 대책을 논의했었다.

당시 팔야부의 교육을 담당한 선생은 어린 아이를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소주인, 소주인, 달리지 마세요, 달리지 마세요...."

그런데, 이 소주인은 한 무리의 관리들 뒤로 달려간다. 마음이 급해진 선생은 수업을 마치지 않으면, 어르신이 화를 내실 거라고 말한다.

보라. 이런 아이를 낳았고, 그것도 독생자인데,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 어떻게 홍력과 경쟁이 가능하겠는가?

황팔자의 가산이 몰수될 때, 모든 구성원이 모이는데, 뒤에는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 있다. 할아버지인 강희제와 만나보았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황팔자 윤사의 집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바로 아들이다. 그의 아들이 좀 많았더라면, 강희제에게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좀더 높았을 것이다. 아마도 하늘을 거슬러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황팔자 윤사는 후사가 적었고,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황위쟁탈전에서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