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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자기국(自杞國): 신비한 소국, 몽골과 6년간이나 싸우다.

by 중은우시 2022. 5. 26.

글: 식당(食堂)

 

1

 

건덕3년(965년) 정월 십구일, 송군(宋軍)의 총사령관 왕전빈(王全斌)은 군대를 이끌고 후촉(後蜀)을 멸망시킨다.

그후 후촉 남쪽의 지도를 개봉으로 보내어,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에게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대리국(大理國)까지 정복할지를 물어본다.

조광윤은 자신의 손에 익은 옥부(玉斧)로 지도에 대도하(大渡河)를 따라 선을 긋는다: 그리고 말한다: "이 밖은 우리땅이 아니다!" 

그리하여 대리국과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조광윤이 대리국을 건드리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첫째, 남조(南詔)의 오만(烏蠻), 백만(白蠻)은 흉악했다. 당나라때 남조와 싸우다가 국력이 고갈되어 망한 바 있다.

그리고 송나라가 후촉을 멸망시킨 후에도 사천에서 반란이 크게 일어나 근 2년의 시간을 들여 겨우 평정할 수 있었다.

 

둘째, 중원의 많은 토지를 아직 정복하지 못했다. 강소절강, 광동광서, 하동, 유운(幽雲), 이곳은 모두 운남보다 중요했다.

 

셋째, 운남은 화외지지(化外之地, 중국문화에 복속되지 않은 지역)이다. 조광윤에 있어서는 계륵이다. 굳이 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여 건국한지 28년된 대리국은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주석] 송태조 조광윤의 옥부로 대도하에 선을 그었다는 송휘옥부(宋揮玉斧)의 이야기는 남송의 필기에 나오고,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건염이래계년요록> 한림학사 주진이 말하기를, 대리국은 당나라때의 남조국이다. 태조황제는 당나라때의 화를 감안하여, 월준의 여러 군을 포기하고, 대도하를 국경으로 삼았다. 도적으로 삼지도 신하로 삼지도 않는 것이 방어의 최상책이다.

 

<전재기> 왕전빈이 촉을 평정한 후, 병력을 몰아 전(滇 운남)을 취하고자 지도를 황상에 올렸다. 태조는 당나라가 남조로 화를 입은 것을 고려하여, 옥부로 대도하를 그으면서 말했다: "이곳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운남은 삼백년간 중국과 통하지 않게 되고 단씨는 북(僰), 찬(爨)을 노려보며 오래 통치할 수 있었다."

 

<남조야사> 왕전빈이 촉을 평정한 후 경사로 돌아와서 운남을 취할 것을 청하며 지도를 가지고 들어갔다. 태조는 당나라의 화를 감안하여 옥부로 대도하를 경게로 그으면서 말했다: "우리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단씨는 남조에서 평안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기록은 남송시대에 이미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송왕조의 대리국에 대한 기본국책과도 일치한다. 

단지, 조광윤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대리국을 겁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또 다른 소국가도 요행히 살아남을 수있게 해주었다는 것을.

나중에 이 소국은 대송에 큰 선물을 주게 된다.

 

2

 

처음부터 얘기하기로 하자.

후진 천복2년(937년) 십이월, 백족(白族)의 우두머리이자 통해절도사(通海節度使)인 단사평(段思平)은 동찬(東爨) 37부와 연합하여 대의녕국(大義寧國)을 무너뜨리고 정식으로 대리국을 건립한다.

그때는 오대(五代)의 난세였고, 중원은 각국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남의 땅은 궁벽진 땅이므로 후촉이나 후진은 모두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산중무노호(山中無老虎), 후자칭대왕(猴子稱大王). 산에 호랑이가 없으면 원숭이가 왕노릇하는 법이다.

대리는 운남에 할거하여 서남을 다스린다.

건국때부터 대리국은 현재의 주식회사와 비슷했다. 단씨는 그저 이사장이다.

동찬의 37부는 바로 주주이다.

동찬은 소수민족이고 오만(烏蠻)이 주이다. 그래서 오만37부라고도 부른다.

현재의 이족(彛族), 나시족(納西族), 리리족(傈傈族)등의 조상이다.

대리국이 건국된 후, 내부갈등이 심했고, 내란이 끊이지 않았다. 단씨는 오랫동안 허수아비였다.

오만37부는 그 기회를 틈타 서로 병합하고, 할거했다.

송신종 원풍3년(1080년), 대리국의 권신 고승태(高升泰)가 고씨 자손들에게 분봉시켜주기 위하여 오만37부의 많은 토지를 잠식하고 차지한다.

오만37부는 분노한다: 고씨. 너는 단씨만 괴롭히면 되었지, 우리까지 괴롭히려 하는가

아려부(阿廬部)의 우두머리인 자기(自杞)는 부하 사종(師宗), 미륵(彌勒), 길수(吉輸)의 삼부를 소집하고, 다른 오만인과 연합하여, 고승태에 대항하여 대리국에서 벗어나 별도의 나라를 세운다.

송철종 원부3년(1100년), 아려부는 정식으로 자기국으로 건립한다.

당시의 대리국 군주는 바로 천룡팔부에 나오는 진남왕 단정순의 역사원형인 단정순(段正淳)이었다.

 

3

 

자기국이 대리국과 싸워서 분리독립한 후, 대리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해줄 큰형님을 찾는다.

그 큰형님이 바로 북송이다.

자기국은 과감하게 북송에 칭신납공(稱臣納貢)하며, 대송왕조의 번속국(藩屬國)이 된다.

기실, 대송은 이 소국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네가 나를 큰형님으로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그러나, 자기국도 괜히 대송을 큰형님이라고 모신 것은 아니다.

자기국은 송나라이 칭신납공한 후, 송나라의 기치를 내걸고 호가호위하며 주변의 영토를 침략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국은 곤명이남의 옥계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고, 동으로 광서 경계까지 발전하여 귀주일부를 차지한다.

전성기때, 자기국의 강역은 북으로 곡정, 남으로 홍하, 서로는 곤명, 동으로 광서 홍수하에 이르러 운남, 귀주, 광서를 아울렀다.

신기한 것은 북송이 서하와 요나라를 상대하느라 바빠서 이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기국은 서남의 패자가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정강2년(1127년) 이월 육일,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킨다.

이헤 오월 초하루, 강왕 조구는 남경응천부(지금의 하남 상구)에서 황제에 등극하고 남송을 건립한다.

자기국은 이 소식을 들은 후, 다시 조구에게 칭신한다.

어쨌든 너도 조씨이고, 나는 조씨를 평생 큰형님으로 모시겠다는 태도이다.

조구에게는 망외의 기쁨이었다. 대송은 천하의 절반만 남았는데, 이런 충성스러운 동생국가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남송과 자기국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진다.

교류가 많다보니, 자기국은 큰형님에게도 어려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어떤 점이 어려웠을까?

말이 없는 것이다!

송나라는 건국후, 요나라의 기병에 위협을 받는다. 송나라는 좋은 전마가 지극히 필요했다.

그러나 온갖 방법을 써도, 대송은 수백년간 이 난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남송은 북방중원을 잃고난 후에 더더욱 전마가 부족했다.

더 많은 전마를 모으기 위해 조구는 눈길을 대리국으로 돌린다.

대리에도 좋은 말이 났다. 전마(滇馬)라 불린다.

전마는 왜소하지만 튼튼했고, 짐을 많이 졌다. 일찌기 한나라때도 세상에 널리 알려졌었다.

전마는 비록 중앙아시아의 말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남송에는 충분히 쓸만했다.

조구는 대량의 주문을 내어 전마를 매입한다.

무역거래의 편의를 위하여, 조구는 특별히 옹주(邕州, 지금의 광서성 남녕)에 마시(馬市)를 열고, 대리와 장기협력을 준비한다.

문제는 대리가 옹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리는 운송비용을 부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리국은 이렇게 말한다: 말을 파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리는 배달서비스까지는 할 수가 없다. 당신이 사람을 보내어 사가라.

말을 가진 사람이 갑이다. 남송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대리에서 말을 구매하고, 다시 옹주로 돌아오고, 다시 전선으로 보낸다.

옹주에서 대리까지의 길은 아주 험준했고, 높은 산과 깊은 강을 건너야 했으며, 뱀과 각종 독충, 짐승도 있었고, 밀림의 장독과 폭우도 견뎌야 했다. 한번 다녀올 때마다 적지 않은 인명손실이 발생했다.

이때 자기국은 여기에서 비지니스기회를 발견한다. 고객은 왕이다. 대리는 어찌 고객을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

자기국은 송나라에 말한다. 전마는 우리도 있다. 뿐만아니라 우리는 배달서비스까지 해줄 수 있다. 차라리 우리에게 사는게 낫지 않겠는가?

송나라사람들은 바로 자기국과 협력한다.

실제로 자기국에는 말이 없다. 그들도 대리에서 말을 사와야 했다.

그러나, 송나라사람들은 산길을 다니기 쉽지 않지만, 자기들은 익숙하게 다니는 길이었다.

송나라의 사람들은 옹주에서 대리까지 다녀오면서 온갖 고생을 겪었지만, 자기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자기국은 송나라와 계약하고, 먼저 도매가로 대리에서 대량의 전마를 사들인 후, 다시 옹주에서 송나라 사람들에게 비싼 값에 판다.

당연히 여기서 큰 차익이 남는다.

송나라사람들도 계산을 해보았지만, 자신들이 대리로 가서 사는 것은 비용과 피해가 너무 컸다. 차라리 옹주에서 자기국사람들이 보내주는 말을 사는게 나았다.

이때부터 가난하던 자기국은 중간상의 장사를 시작하면서, 거액의 돈을 벌게 된다. 졸지에 서남의 부호로 성장한다.

 

5

 

사람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되면 원수도 많이 생기는 법이다.

서남에는 소국이 너무 많았다. 대리국과 자기국 이외에 오만의 큰부족인 우시부(于矢部)가 건립한 나전국(羅殿國, 귀주남부)도 있었다.

나전국의 실력은 자기국과 비슷했다. 양국은 건국이래 호적수였고, 서로가 서로를 잘 알았다.

나전국은 말거래로 자기국이 돈을 버는 것을 보자 눈이 벌개진다. 자신도 끼어들고 싶었다.

그리고 나전국은 옹주와의 거리가 자기국보다 가까웠다. 

나전국도 송나라를 찾는다: 자기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격은 더 싸게 드리겠습니다. 우리와 거래하시겠습니까?

송나라사람들은 당연히 기뻤고, 즉시 양국의 분쟁을 이용하여 가격을 깍았다.

이렇게 되다보니 자기국과 나전국의 갈등은 점점 심해진다.

자기국은 즉시 병력을 일으켜 나전국을 공격한다. 

두 나라의 싸움은 수십년간 지속되었다.

송나라사람들이 조급해졌다. 너희가 싸우면, 말은 누가 우리에게 팔아주느냐.

송효종 순희3년(1176년), 송나라가 나서서 조정을 한다. 양국에서 매분기마다 2천필씩 전마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더 이상 말가격을 깍지 않겠다는 약속도 덧붙인다.

대신 두 나라는 즉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송나라가 병력을 출동시켜 두 나라를 멸망시켜버리겠다고 압박했다.

이익으로 회유하고, 힘으로 압박하자, 자기국과 나전국은 송나라의 조정조건을 받아들인다.

최종적으로 실력이 우위였던 자기국이 구매량의 75%를 차지한다. 이렇게 하여 자기국은 다시 좋은 세월을 구가하게 된다.

몽골인들이 굴기하면서 자기국의 아름다운 생활을 깨어지게 된다.

 

6

 

송이종 보우원년(1253년) 쿠빌라이가 몽케한의 명을 받아, 병력을 3로로 나누어 대리국을 정벌한다. 대리국은 계속 패퇴했다.

보우2년(1254년), 대리국의 마지막 임금인 단흥지(段興智)가 투항하고, 대리국은 멸망한다.

대리국을 손에 넣은 후, 몽골인은 자기국이 남송에 말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남송을 멸망시키려던 몽골인에 있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이 필요없다. 반드시 자기국을 멸망시켜야 한다.

금방 몽골은 자기국에 맹공을 퍼붓는다.

전쟁초기, 몽골인들은 자기국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서남에서 최강인 대리국도 가볍게 평정했으니, 자기국을 점령하는 것은 손쉽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잘못 생각했다.

장사줄을 끊는 것은 부모를 죽인 원수나 같았다.

자기국은 눈이 벌개졌다: 몽골인, 너죽고 나죽자.

자기국의 전국상하는 분기하여 일어났고, 혈전을 벌인다.

그러나 몽골인의 전투력은 천하무쌍이다. 아무도 몽골기병과의 야전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그리하여 자기국은 아주 견고한 장성을 쌓는다.

자기국은 중간상으로 뛰어났을 뿐아니라, 성벽을 쌓는데도 뛰어났다. 

몽골기병이 가장 겁내는 것이 장성이다. 매번 공성할 때마다 참혹한 손실을 입어야 했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동장성의 전투에서 몽골인은 6만명을 잃는다.

 

"합랄장(合剌章, 몽골말로 남방오랑캐라는 뜻)의 전사는 아주 많다. 방어를 아주 잘한다. 매일 싸우다보니 몽골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2만명밖에 남지 않는다." <원사.올량합태전>

 

7

 

몽골인이 전동장성을 겨우겨우 돌파하자, 자기국은 다시 몽골인들과 산지전,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대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런 산지전, 유격전이다.

산지소국은 지형이 아주 복잡하고, 환경도 아주 열악하다. 가만히 있어도 유행병으로 대거 쓰러진다.

만일 적이 견벽청야(堅壁淸野)하면, 대군은 양식도 부족하여 더욱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몽골인은 두려움을 몰랐고, 계속 공격했다.

자기국은 굳건하게 유격전술을 펼치면서, 몽골군을 극도로 지치게 만들었다. 몽골군은 손실이 참혹했다. 

단지 자기국은 국력에 한계가 있었다.

송이종 경정원년(1260년), 실력차이가 너무나 나다보니, 자기국은 결국 몽골에 멸망당한다.

자기국은 그동안 남송에 계속하여 구원을 요청한다.

남송이 자신을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그들은 투항을 선택하지 않았다.

멸망하기 전날까지, 자기국은 몽골인들에 대한 정보와 몽골인들과 어떻게 싸워야하는지의 정보를 남송에 전달한다.

자기국은 자기들의 큰형이자 여러해동안 물건을 사준 고객인 남송을 위해 6년이라는 준비기간을 벌어준 것이다.

이런 동생을 둔다는 것은 정말 가치있는 일이다.

내가 너때문에 돈을 벌었으니, 너를 손해보게 하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