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913사건: 임표죽음의 진상에 관한 몇가지 설....

중은우시 2024. 9. 17. 23:29

글: 조대부(趙大夫)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 913사건이 벌써 53주년이 되었따. 지금까지도 중국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대사건에 대하여 인터넷에서는 지금까지도 많는 논의가 있다. 그중 임표가 탄 비행기가 어떻게 추락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여, 여기에서는 각종 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서산우해설(西山遇害說)

이 설은 1983년 미국에서 출판된 영문서적에서 나왔다. 책이름은 "The Conspiracy and Death of Lin Biao"이며, 작자는 Yaomingle이다. 1983년 6월, 타이완 시사문화출판사업유한공사가 중문으로 번역하면서 책제목을 "임표의 음모와 사망(林彪的陰謀與死亡)"이라 했다. 작자의 이름은 요명리(姚明理)라고 썼다. 1983년 8월, 홍콩의 원동평론출판사도 이 책을 번역출판한다. 책제목은 "임표의 죽음(林彪之死) - 유산정변막후비밀(流産政變幕後秘辛)"로 했으며, 작자의 이름은 요명락(姚明樂)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작자의 이름은 중문으로 같은 발음인 "요명료(要鳴了)"라는 의미라고 했다.

이 책에서는 임표, 섭군(葉群)은 서산(西山)에서 모택동이 정교하게 계획한 만찬에 참석한 후, 로켓탄에 맞아죽었다는 것이다. 원두르칸(溫都爾汗)에서 추락한 트라이던트(三叉戟)비행기는 임입과(林立果)가 타고 있었고, 중앙문건에서 공표한 비행기추락현장의 사진은 위조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임입과는 공군사령부 작전부 부부장이 된 후, 비밀조직을 만들어 키웠다. 하루는 그가 주우치(周宇馳)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택동을 암살하고 무너뜨릴 준비를 하자고 하면서 주우치에게 무장정변계획을 초안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건 그의 부친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표는 오헌법(吳憲法)을 불러 그에게 속마음을 얘기한다: "현재 주석은 나를 그보다 먼저 죽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너희 전부를 나를 따라 팔보산(八寶山, 중공원로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려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특별한 수단을 써야 한다" "신속히 행동하고, 국면을 통제해야 한다." "모택동의 깃발을 끌어내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의 권력은 제거해야 한다." 그후 오법헌은 임표가 이미 황영승(黃永勝)과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금방 이작붕(李作鵬), 구회작(邱會作)에게 얘기한다.

임표 자신이 구상한 "특별한 수다"은 임입과의 음모와 병행하는 또 다른 "궁중정변계획" 섭군과 황영승, 오법헌, 이작붕, 구회작은 "계획의 정교함에 일치하여 찬탄했다" 계획의 핵심은 중소충돌을 일으켜, 그 기회를 잡아 모택동을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실시방법의 하나는 소련에 대해 돌연 기습을 하면서, 사전에 소련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소련에게 전쟁을 합작하여 만들자고 제안한다; 전쟁이 발발하면, 모택동을 "옥천산(玉泉山)의 공사(工事)"에 숨어서 스스롤르 지키게 하고, 유독가스로 모택동을 죽여버린다. 시신을 불태워서 재로 만든다. 목적을 달성한 후, 소련과 "전쟁을 휴전하고, 적대관계에서 동맹관계로 전환시킨다."

임표와 임입과의 암살계획을 주은래가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알게 된다. 주은래는 즉시 모택동과 왕동흥(汪東興)에게 통보하고, 즉시 남방순시를 중단하고,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임표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결정을 내려줄 것을 건의한다. 모택동이 천진에 도착할 때, 주은래는 모택동에게 통보하여, 임표가 예상외로 북대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9월 12일 밤 8시 10분, 임표, 섭군은 해산물과 인삼등 선물을 가지고, 모택동의 "옥천산" 별장에 도착한다. 만찬때 모택동은 명나라때의 오래된 술을 한병 열어 임표부부를 대접한다. 모택동은 먼저 남방순시의 경과를 얘기하고, 여행중 즐거웠던 일을 얘기한다. 그후에 다시 장수에 관한 연구를 얘기하고, 암표와 서로 음식을 집어주며 친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연회에는 강청, 주은래, 강생, 왕동흥도 참석했다. 만찬이 끝나고, 이 몇 사람은 먼저 떠난다. 주석은 다시 임표, 섭군에게 남아 있어달라고 하며 20분간 얘기를 나눈다. 8시 54분, 임표, 섭군이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모택동과 왕동흥은 그들이 차에 타는 것까지 보며 배웅한다.

저녁 11시, 모택동의 별장내외에서 두 차례의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원래, 임표가 탄 차량이 시속 15킬로미터의 속도로 별장밖의 구부러진 좁은 길을 돌아갈 때, 도로장애물이 있어 7 내지 8 미터 앞에서 차를 멈춘다. 이때 부근에 매복해 있던 8341부대의 폭파팀은 로켓탄을 발사하라는 신호를 본 후, 바로 방아쇠를 당긴다. 순식간에 귀가 찢어질 것같은 폭발음이 들렸고, 40센티미터의 로켓탄이 자동차의 뒷부분에 명중한 후, 두번째 로켓탄이 자동차의 가운데부분에 명중한다. 자동차의 여러 부분은 불덩이 속에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앞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뒷자리의 여성은 허리 윗부분이 찢어진 옷조각과 뼈가 되었고,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는 얼굴 반쪽만 남아 있었는데, 몸의 부분은 손상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중앙판공청이 고위간부들에게 돌린 사진과 크게 다르다. 후자는 몽골주재 중국대사관이 비행기추락사고현장에서 찍은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임표가 비행기 잔해에 누워있는 사진은 섭군, 임입과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모두 수정된 것이다.

당시 이미 서교공항의 임입과는 돌연한 변고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주우치는 그에게 즉시 트라이던트비행기를 타고 가자고 했다. 임입과는 주우치에게 어떻게 해야할지를 물었고, 주우치는 헬기를 타고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자고 한다.

주은래가 황영승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임표가 이미 그의 비밀계획을 진술했다고 말하면서, 명령을 기다리고 조사를 받으라고 말한다. 황영승은 도망칠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임표가 굴복했으면 자신도 따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은래는 황영승에게 오법헌, 이작붕, 구회작에게 전화를 걸게 하여 그들도 죄를 인정하도록 시킨다. 이 몇 사람은 이미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 머리를 숙이고 죄를 인정한다. 주은래는 오법헌을 공군지휘소로 보내, 각군구공군과 지휘센터에 명령을 내려, 전국 각 비행장에서 여하한 비행기의 이착륙도 금지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에게 도주한 트라이던트를 착륙시키도록 할 수 없는지 물어본다. 오법헌은 북경공군사령부의 이제태(李際泰)에게 4대의 J-7전투기를 보내도록 지시한다. 양촌(楊村)공항에서 이륙하여, 내몽골까지 그 비행기를 쫓아간다. 그 비행기가 중국-몽골국경으로 날아갈 때, 주은래는 오법헌에게 어떻게 할까 물어보고, 오법헌은 격추시킬 것을 주장한다. 주은래도 동의한다. 오법헌은 이제태에게 명을 내려 국경지역의 가까운 3개 미사일부대에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하도록 명령한다. 그 비행기는 몽골영공으로 진입한 후 신속히 레이다에서 사라졌다. 공군의 공격효과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최초의 미사일이 그 비행기에 명중하여 손상을 입혔으며, 다만 조종기술이 뛰어난 반경인(潘景寅)은 즉시 고도를 낮추어 레이다추적을 피했다고 하였다.

256호 트라이던트비행기가 추락한 후, 울란바토르의 중국대사관은 사람을 사고현장에 보내어 조사를 진행한다. 대사관은 전보를 통해 북경외교부로 보내어 주은래총리에게 보고한 비밀보고서는 "81029호절밀문건(絶密文件)"이라고 되어 있다. 그 안에는 추락한 비행기의 승객연령이 20-50세사이이라고 되어 있다. 대사관은 시신을 중국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한다. 다만 나중에 명령이 내려오는데, 사실상 모택동이 직접 하달한 것이다. 시신을 비행기추락지점부근에 매장하라는 것이었다.

소련과 몽골은 모두 기술자를 파견하여 시신에 대한 검시를 진행한다. 최소한 일부 소련의 검시인원은 임표가 그 추락한 비행기에서 죽은 승객중 하나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주장은 황당무계하고 악의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비난받는다(손일선: "대막(大漠)저쪽에" 중국청년출판사 2001년판, 318-325쪽)

2. 미사일격추설(導彈擊落說)

이 설에도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하나는 중국격추설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격추설이다.

중국격추설은 모택동과 주은래가 임표의 도주를 보고, 그가 소련으로 도망친 후 소련의 도움을 받아 국내로 되돌아오거나, 혹은 바깥에서 중국내전을 책동, 지휘할 것을 우려하여, 해방군으로 하여금 지대공미사일로 임표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키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임입과의 '미혼처'인 장녕(張寧)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장녕은 임표가 탄 비행기의 추락전후에 관한 이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녀는 "장녕: 스스로 스스로를 쓰다(張寧: 自己寫自己)"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공군사령관 오법헌은 12일 밤에 주은래와 함께 레이다추적상황을 감시했다. 오법헌과 섭군은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했고, 그리하여 먼저 적극적으로 건의한다: '격추시킬까요?'. 주은래는 당시 제지했었다."(장녕: 스스로 스스로를 쓰다, 작가출판사 1998년판, 제257쪽). 다만 그녀는 '진겁(塵劫), 홍콩명보출판사, 1997년출판발행)'이라는 책에서는 제2포병의 한 전직군인의 말을 인용하여 비행기는 미사일에 격추되었다고 말했다. 그 전직군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사고가 발생할 때, 나는 기지에서 병사로 있었다. 우리는 포를 쏘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슨 목표인지는 몰랐다. 그후 문건이 전달된 것을 보았고, 마음 속으로 임표가 탄 비행기라는 것을 알았다." 장녕은 그에게 잘못 안 것은 아닌지 물어보았다. 격추시킨 것이 주우치가 납치한 것이 아니냐고. 그러자 그 전직군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헬기를 격추시키는데 무슨 미사일을 쓰느냐. 주우치의 헬기는 북경교외지역에 강제착륙시켰다. 전혀 쏘지도 않았다. 우리의 미사일발사방향은 북경이 아니었고, 우리가 쓴 것은 신식 미사일이었으며, 탄두는 들어간 후 역으로 폭발한다. 당시 비행기를 손상시켰다."(손일선: "대막저쪽에". 중국청년출판사 2001년판, 제350쪽)

소위 소련,몽골이 격추시켰다는 주장은 임표가 탄 비행기가 중국-몽골국경선을 넘어간 후에, 사건이 돌발적이어서, 소련, 몽골의 경계레이다에 대형비행기파가 출현했고, 소련,몽골방면에서는 중국에서 침입해 들어온 폭격기로 여겼다. 그리하여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했고, 격추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의 배경은 당시 중소, 중몽관계가 긴장되어 있었고, 2년전인 1969년 3월, 진보도사건까지 발생하여 하마터면 대규모전쟁으로 발전할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소식통에 따르면, 소련의 국방부장 그리치코 원수는 심지어 중국에 '외과수술'식의 핵타격을 가해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거에 영원히 중국의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몽골은 소련을 추종하여 반중입장이었다. 소련은 중국-몽골변경에 많은 병력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임표가 탄 비행기가 진입한 방향으로 원거리 경계레이다, 방공미사일진지가 적지 않았다. 원두르칸에서 멀지 않은 군용비행장에는 소련의 항 항공병사령부가 주둔해 있었다. 임표가 탄 비행기가 추락한 현장부군의 몽골주민에 따르면, "시끄러운 웅웅하는 소리가 들렸고, 서남에서 북으로 불이 붙은 큰 비행기가 날아왔고, 아주 낮게 날았으며, 바투노르부스무상공에서 투먼산으로 한바퀴 돈 후에 짜선산골짜기에서 서남방향으로 비행했는데, 소리가 갈수록 커졌고 개략 20분이 되지 않아 수부르구 분지에 추락했다. 당시 큰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고, 그저 현장에 큰 불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만 보았다." 이를 가지고 추측해보면, 아마도 임표가 탄 비행기는 소련,몽골의 미사일에 맞아서 격추된 것으로 보인다.

미사일에 격추되었다는 두 가지 견해의 공통점은 미사일이 먼저 비행기를 손상시키고, 그후 비행기가 착륙하려고 시도하다가 추락했다는 것이다. 미사일에 맞아 공중에서 폭발한 것이 아니라.

이런 미사일격추설의 중요한 근거중 하나는 비행기 날개의 날개뿌리부분에 직경 40여밀리미터의 큰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손일선: "대막저쪽에", 중국청년출판사 2001년판, 제194쪽, 제359쪽)

이 설에는 또 하나의 출처가 있다. 필자의 국내에 있을 때 동료인 C교수이다. 그는 공군총의원(空軍總醫院)에서 여러 해동안 근무했는데, 그동안 전 상위(常委) 및 제3호주자파의 딸과 동료였는데, 그 T의사가 말하기를 미사일에 격추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T의사의 부친은 4야(四野)출신이므로 그 말이 전혀 근거없지는 않을 것이다.

3. 강제착륙사고설(迫降失事說)

이 설은 비행기추락현장의 중국측조사인원, 군대내의 관련전문가들이 분석을 거쳐 내린 결론이다.

이 설에서는 256호비행기의 추락은 강제착륙실패로 인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칠흑같은 밤중에 다른 나라의 잘 알지도 못하는 토지 위에, 그리고 지상에서 지휘해주는 사람도 없는 상황하에서 강제착륙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이 점은 임표가 탄 비행기의 조종사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비행기가 강제착륙을 실시하게 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다. 원인은 유류가 부족하여 이미 더 이상 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트라이던트비행기는 유류를 가득 채웠을 때 21톤이다. 9월 12일 저녁 북경서교공항에서 산해관으로 날아갈 때 가득 채우지 않았었다. 단지 15톤의 기름만 채웠따. 임표가 산해관에서 황급히 도주할 때, 너무 급박한 상황이어서 유류를 채울 여유가 없었다. 추산에 따르면, 비행기가 산해관공항에서 이륙할 때, 유류탱크에는 12.5톤이 있었을 것이다. 산해관에서 추락지점까지 약 120분간 비행했는데, 유류소모가 10톤정도이다. 그렇다면, 비행기의 잔존유류량은 겨우 2.5톤가량이다. 이때 유류탱크에 유류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오일펌프가 작동하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여 비행기는 레이타를 피하기 위해 계속하여 저공비행을 해야 했고, 최대한 가더라도 겨우 20여분밖에 갈 수 없었다. 비록 추락지점은 원두르칸의 간이비행장에서 6,7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그곳에 착륙한다면 유량은 충분했다. 그러나 비행기에는 비행사가 없었고, 지상에서 안내받을 수도 없었다. 야간비행지조종사는 자신의 확실한 위치를 알기 힘들었고, 게다가 낯선 노선이어서 조종사는 긴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국경을 몰래 넘어간 것이므로, 소련,몽골의 방공부대에 격추될 것을 우려하였을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요소로 인하여, 조종사는 야간에 급히 착륙하여야한다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전용기의 승무원은 원래 9명으로 구성된다: 기장, 제1부조종사, 제2부조종사, 비행사, 통신원, 주관엔지니어, 엔지니어, 특설사와 공중여성복무원. 그러나, 황급히 전용기에 오르다보니 승무원은 겨우 4명이었다: 기장 반경인과 3명의 엔지니어뿐이었다. 게다가 지상안내도 없다. 그러니 강제착륙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비행기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사고비행기의 머리가 향한 방향은 비행기를 되돌리는 방향이었다.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으로는 당시 몽골인민혁명정치국위원인 모로자무츠가 있다.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비행기를 발견했을 때는 우리의 국경을 넘어올 때가 아니었다. 이미 우리 영토로 넘어온 이후였다. 그는 소련인에게 말했다: '우리가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소련인이 거절했다. 우리는 만일 비행기가 계속하여 비행하면 격추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비행기가 당시 머리를 돌린 이유이다." 모로자무츠는 비행기가 추락한 몇개월후에 소련장교와 얘기를 나누던 중에 이 정보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행기에 유류가 부족하다는 설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백전노장이며 세심한 전신급의 인물이 자신과 가족의 생사에 관련된 일에서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4. 기내격투설(機上搏鬪說)

이 설은 비행기의 추락은 비행기내에서 격투가 발생했고, 그리하여 비행기가 통제를 잃어 추락했다는 것이다.

한 소련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련전문가는 이미 타버린 임표의 시신을 정리했는데, 시신에서 9발의 총탄을 발견했는데 벌집모양이었다고 한다. 원두르칸의 비행기추락현장에서 또한 어지럽게 흩어진 몇 자루의 권총과 여러 발의 총알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주장이 가리키는 것은 비행기내에서 누군가 임표가 당과 국가를 배신하고 도주한다는 것을 알고 임표에게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혼전과 격투가 벌어지게 되고, 비행기는 통제를 상실하여 추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손일선: "대막저쪽에", 중국청년출판사 2001년판, 제274쪽)

5. 자살순직설(自殺殉職說)

이 설의 주요 촛점은 조종사 반경인에게 집중된다. 반경인은 조국에 충성스러운 조종사라는 점을 기반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반경인은 원래 임표가 소련으로 도망치는 줄 몰랐고, 그는 임표가 북경으로 되돌아가거나 혹은 대련, 광주로 가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임표전용기의 기장으로서, 정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모두 엄격한 선발을 거쳤고, 충성심은 보장되는 인물이었다. 평소에 반경인은 당연히 임표, 섭군, 임입과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임표, 섭군, 임입과가 어디로 비행하라고 하면 그는 거기로 비행한다. 절대로 한치도 어기는 바가 없다. 다만 임표, 섭군, 임입과가 그에게 국경선을 넘어, 몽골, 소련으로 날아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동요했다. 그는 국경을 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그는 '소련수정주의' '몽골수정주의'는 중국의 적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또한 반당반국이라는 죄명이 얼마나 큰 지도 잘 알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까지 여루되여, 그들은 하룻밤만에 반혁명가족이 될 것이다.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마음을 굳치고, 비행기와 동귀어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설은 등소평의 한 마디 말이 근거가 되었다. 1980년 11월 15일, 등소평은 미국의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총편집인 얼 피어(음역)와의 인터뷰때 913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 조종사는 좋은 사람이다. 같은 한대의 비행기가 대량의 당과 국가의 기밀자료를 가지고 소련으로 가려고 준비했을 때,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문제를 발견한 후 격투를 겨처 비행기를 강제착륙시켰다. 다만 이 조종사는 맞아죽는다." 등소평의 논리와 추단에 따르면, '같은 한 대의 비행기'의 조종사는 좋은 사람이고, 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렇다면 256호 전용기의 조종사도 좋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자살순직행동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손일선: "대막저편에", 중국청년출판사 2001년판, 제282쪽, 및 1980년 11월 24일 '인민일보')

913사건의 비행기추락의 진정한 원인은 아마도 여러해가 지나서, 모든 기밀문건이 기밀해제된 후에야 비로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른다. 중국역사에는 그런 일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