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역사연구원과제조(중국역사연구원 <역사연구> 2022년 제3기)
여하한 정책도 모두 시대의 산물이다. 명청시기, 세계는 자본주의상승기에 처해 있었고, 서방열강은 전세계에서 식민지확장의 과정을 가속화했다. 국제환경의 사상유례없는 거대한 변화,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방의 식민붐에 직면하여, 명청 두 왕조의 중앙정부는 이에 적응하는 대외정책을 채택한다. 민국시대이래, 명청의 중앙정부의 대외정책은 시종 국내회학계에서 토론하는 중요이슈였다. 학술계에서 주류를 점하는 견해는 명청 두 왕조의 중앙정부가 '폐관쇄국'정책을 취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전면적으로 나라의 문을 걸어닫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학술견해의 배후에 숨은 핵심문화개념은 봉쇄(封鎖)와 개방(開放), 야만과 문명의 이분론이다. 특정시기 유럽중심주의의 영향하에 나타난 문화적 산물이다. 그러나, "폐관쇄국"을 명청시기의 대외정책의 랜드마크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고, 여러 교재와 학술작품에 기록되어 후대의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많은 민중들 사이에 '컨센서스'를 형성했다.
연구가 심화되면서, 명청시기 중국과 세계의 관계, 중앙정부가 시행한 대외정책, 연해지구의 무역상황은 갈수록 분명하게 세상 사람들의 앞에 드러났다. 이는 우리가 "폐관쇄국"개념 및 관련문제를 심도있게 검토하는데 전제조건을 제공했다. 본문은 시스템적으로 학술계의 "폐관쇄국"개념의 득실에 관해서, 이 개념의 연원과 변화를 고찰하고, 전면적으로 명청시기 국제환경과 중앙정부의 대외정책 및 그 영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책과 실천의 두 층면에서 당시의 중국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폐관쇄국"정책을 실시했는지 분석하고, "폐관쇄국"으로 명청 두 왕조의 대외정책을 개괄하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 여부를 알아보고자 한다.
1. 학술계의 "폐관쇄국" 및 관련이슈에 대한 토론
학술계는 오랫동안 명청시기의 "폐관쇄국"과 관련문제를 주목했다. 일찌기 민국시대에, 일부 학자는 "폐관쇄국"정책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했다. 도희성(陶希聖)은 <폐관정책의 연원>이라는 글에서 역대 폐관과 개방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청대의 사회사약설>에서는 "폐관정책"의 실시를 살펴보고, "국외무역자유와 폐관주의의 논쟁은 송나라때부터 원나라를 거쳐 명청에 이르기까지 천년이나 이어진 것이다." 또 어떤 학자는 "폐관쇄국"에 대하여 반성한다. 예를 들어 임칙서가 영국국왕에게 보낸 서신을 다시 발표하며, 이를 통해 임칙서의 외교조치를 긍정했다.
민국시대 대다수학자는 아편전쟁전의 중국은 "폐관쇄국"정책을 실시했다고 생각했다. "아편전쟁전에 중국은 폐관주의를 견지했고, 유럽인들이 중국으로 와서 통상을 하는 것은 일정한 지방에 한정되었고, 그리고 일정한 계절에 한정되었다....유럽인은 중국의 폐관주의를 타파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당시 극동의 비지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아편문제에 착안하여, 영국이 가장 먼저 포함으로 중국의 폐관주의를 깨부순 것이다."
신중국성립후, 사학계는 청나라의 대외무역정책에 대하여 반성했다. 왕인침(王仁忱)은 일찌기 청왕조의 "해금정책(海禁政策)"에 대하여 정리했다. 그는 청나라가 대외무역제한정책을 취한 원인은 소농업과 가정수공업이 결합한 자급자족경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정치적으로 일종의 경계조치도 취했다. 1956년, 모건여(毛健予)는 독자들의 "청대폐관정책"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마르크스등의 관점을 긍정했다. 청나라의 폐관은 완전한 폐관이 아니며, 자본주의침략을 방어하려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는 당시 사회상 청나라때의 폐관정책에 대하여 아직 쟁의(爭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60년대, 학계는 청나라때의 폐관정책과 명청의 시장성격에 대하여 유익한 검토를 하게 된다. 1958년, 호북대학 정치경제학교연실이 편찬한 <중국근대국민경제사강의>에서는 아편정책과 폐관정책을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자본주의국가는 자유무역을 요구했고, 봉건국가는 폐관정책을 실시했다. 이 두 가지 통상제도의 모순은 바로 두 사회제도모순의 체현이다.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이전에 중국과 영국의 모순이다." 이 견해는 공경위(孔經緯)의 공격을 받는다. 그는 중국과 영국의 모순은 두 가지 제도의 모순이 아니라, 침략과 반침략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청나라가 폐관정책을 실시한 목적은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후, 호북대학 국민경제사교연실은 글을 써서 답변한다: 이전의 글에는 정치적 요소를 경시한 결함이 있다. 다만 청나라의 '폐관정책'은 토론해볼 가치가 있다. 이 정책은 17세기에 시작되었고, 18세기말 혹은 19세기초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일부 학자들의 무역량이 증가되었으므로 청나라가 폐관정책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논증하는 견해에 반박했다.
그후, 공경위는 더 이상 이에 대응하지 않고, 명청시장형성문제에 대한 논쟁에 참가한 것같다. 공경위는 중국의 민족시장은 아편전쟁후에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이상(李湘)은 아편전쟁전에 이미 통일된 국내시장이 있다고 보았고, 양지신(楊志信)은 민족시장은 명나라후기에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학자들의 명청시장성격에 대한 토론은 명청사회성격과 그 경제발전수준을 판단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더구나 명청시대에 폐관정책을 실시했는지를 고찰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비록 이상의 학자들은 명청시장형성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필요한 실증적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았지만, 학술계에는 적극적인 영향을 미친다.
1979년 3월 13일, 대일(戴逸)이 <폐관정책역사교훈>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청나라때의 폐관정책의 득실을 검토한다. 이 글은 청나라의 폐관정책은 낙후된 봉건경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인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제한했고, 동시에 서양인이 장사하는 것도 제한하여, 중국경제사회빌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금방 학술계의 주목을 받고, 학자들의 청나라의 외교정책, 대외문역관계문제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킨다.
호사용(胡思庸)은 청나라의 폐관쇄국정책의 중점은 서양상인에 대한 통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내경제,문화에 대한 보수정책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전제주의와 몽매주의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사준미(謝俊美)는 호승(胡繩), 대일, 유대년(劉大年)등의 견해를 종합하는 기초 위에서, 폐관정책은 자위(自衛)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청나라의 폐관정책은 청정부가 봉건전제를 유지하는 총정책의 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1980년, 진승린(陳勝粦)이 글을 써서 "폐관정책"의 입장을 비판하고, 대일, 호사용의 견해에 동의하며, '페관정책'은 민족자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이에 이르러, 일부 학자들은 1950년대이래의 견해를 바꾸게 된다. 즉 청나라의 폐관정책은 침략에 항거하고, 민족을 보위하는 의의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에서, 폐관정책은 낙후봉쇄의 근원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1980년대이후, 일부 학자들은 학술계에서 일관적으로 '폐관정책'에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1982년, 곽온정(郭蘊靜)은 가장 먼저 '폐관쇄국'이라는 설을 반대한다. 주로 3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국가는 자신의 권리를 보위하는 조치를 실시했다; 둘째, 청나라는 철저하게 대외교류를 단절하지 않았다. "폐관쇄국"이라는 단어는 전적(典籍)에서 찾을 수가 없다. 셋째, 폐관은 무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그후 대다수의 "폐관쇄국"설에 반대하는 글들은 '폐관쇄국'이라는 말의 기원을 소급해서 알아보지 않거나, '폐관쇄국'과 '폐관정책'을 상호 혼동하였다.
1983년, 왕경우(汪敬虞)는 관련연구를 진행한다. 그는 청나라의 폐관정책의 존재를 긍정하고, 엄격하게 해금한 기간은 아주 짧았다고 본다. 다만 해금정신과 관리조치는 아편전쟁전까지 약 200년간 지속된다. 왕경우는 전체적으로 변증법적으로 청나라의 폐관정책을 보았다. 한편으로 폐관정책이 아주 필요했으며, 식민주의침략을 막기 위한 필요한 조치였다고 보고, 다른 한편으로, 폐관정책은 청나라의 경제발전에 불리했다고 본다. 1988년, 곽온정은 중외관계사회의에서 '청나라폐관쇄국'에 대한 발언을 하면서, 청나라때의 금해와 일구통상(一口通商)은 폐관이 아니라고 보았다; 청나라가 외국을 방어한 것은 쇄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외무역의 발전은 청나라가 폐관쇄국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1986년, 청나라의 무역발전을 논증할 때, 황계신(黃啓臣)은 "폐관쇄국"논에 대하여 새로운 비판을 제기한다: "오랫동안, 학술계에는 이런 견해가 있었다. 청나라전기에 실행한 폐관쇄국정책으로 해외무역은 언급할 수준도 되지 못하며, 심지어 송, 명 두 왕조보다 못하다"; "하나로 묶어서 청나라전기의 해외무역은 폐관쇄국정책을 실시했다고 말할 수 없다. 청나라가 실시한 것은 개해설관(開海設關), 엄격무역관리정채ㅐㄱ이다; 해외무역액은 송, 명 두 왕조보다 발전되었다." 같은 시기, 청나라에서 '폐관쇄국'정책을 실시한데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학자로는 하수서(夏秀瑞)가 있다. 그는 청나라전기에 실행한 것은 개해무역정책이고, '폐관쇄국'이라는 논조는 서방의 '중상비방'이고, 중국전통의 외교무역정책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학자들의 공개반박에 대하여 대일은 청나라때 '폐관정책'을 취했다는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의 외교정책의 실시과정이 복잡하고 대외무역액이 증가했다는 것도 인정했다. 다만 더더욱 건륭이래 통치자들의 봉쇄보수심리를 강조했고, 청나라가 세계조류를 따라갈 기회를 놓쳤따는 것을 강조했다.
논쟁과정에서, 청나라의 외교정책실시과정과 대외무역규모에 대하여 더욱 상세한 논증이 이루어진다. 동시에, 학계는 대외관계의 각도에서 토론을 진행한다. 폐관정책에 관한 연구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장지의(張之毅)는 17,18세기 중국, 인도, 일본 3국의 서방식민침략에 대한 대응전략을 비교하고, 경제무역분야에서, 청나라에는 '폐관정책'이 존재하지 않았고, 외교분야에서는 확실히 '폐관정책'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개괄하자면, 1980년대, 청나라의 폐관정책은 널리 주목받았다. 다만 관련토론은 각자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데 그쳤고, 학자들은 왕왕 경제와 외교 두 층면에서 청나라의 폐관정책을 검토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고상(高翔)은 문화시각에서 고찰을 진행한다. 그는 당시 중국과 서방의 여러 나라들간에는 근대적인 의미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폐관정책은 주로 중국과 외국간의 문화교류와 경제교류를 제한하는 것이었으며, 집중적으로 천주교전파를 금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2년, 장순홍(張順洪)은 영국의 두 대사 매카트니, 앰허스트의 중국에 대한 평가와 태도를 비교하면서 그들의 평가는 서방의 기준에 따른 것이며, 동방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이는 중국영국관계의 전환점을 예시한다고 보았다. 만명(萬明)은 명청의 대외정책에 대하여 계통적으로 비교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주도추세로 보면, 명나라의 해외정책의 메인스트림은 개방이다. 그러나 청나라의 대외정책의 메인스트림은 봉쇄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폐관정책은 청나라때부터 형성, 확립 및 완비된다.
21세기이래, 학술계는 청나라의 "폐관정책"에 대한 토론이 이전보다 감소한다. 다만 관련반성은 중시할 만하다. 2002년, 진상승(陳尙勝)은 개혁개방 20여년을 되돌아보면서, 관련연구성과의 기초 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폐관과 개방의 분석틀은 효과적으로 청나라전기 해외무역의 실제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2009년, 그는 '폐관쇄국'의 개념을 기원을 정리하고, 이 개념은 19세기초 일본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 관련연구는 개념과 사실 층면에서 모두 이전보다 심화되었다. 왕굉빈(王宏斌)은 세밀한 고증을 통해, 건륭제는 "강(江, 강소), 절(浙, 절강), 민(閩, 복건)의 세 해관을 폐쇄하라고 명령을 내린 바가 없다" 조일봉(趙軼峰)은 명청 두왕조의 대외정책을 연구하고, 명나라는 '폐관쇄국'이라 할 수 없고, '유한개방'이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청나라전기 중국의 대외관계의 기본국면은 폐관쇄국도 아니고 전면개방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제한적인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외국학계의 "폐관쇄국"에 대한 토론은 명청의 대외정책에 대한 연구와 평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초기의 존 킹 페어뱅크(費正淸, John King Fairbank), 알랭 페르피트(佩雷菲特, Alain Peyrefitte)를 대표로 하는 학자들이 '봉쇄' '보수' '정체'로 명청시기 중국을 형용했다. 최근 수십년간 국외학계는 기본적으로 명나라때의 중국이 폐관쇄국에 처해 있고, 자급자족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부정하고, 명나라에 초기근대세계상업무역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본다. 세계사관이 흥기하면서 외국학계는 중국이 17, 18세기에 세계경제, 정치체제의 상황에 심도있게 융합해 들어간 것을 충분히 검토하고, 청나라때 중국도 세계사의 일부분으로 본다. 한번도 세계와 단절된 적이 없었다고 본다. 일본학계는 더더욱 비교적 스스로 '서방중심주의'로 인한 선입견을 배제하고자 노력한다. 당시의 역사환경에서 출발하여, 조정이 외교와 무역정책을 제정한 대외배경과 요소를 탐색하고, 16-18세기중국의 대외정책은 '폐관쇄국'이 아니라, 명청의 해금과 개해간에 정책이 왔다갔다하는 중심축은 국가안전과 해양무역이익의 균형점이었다고 본다. 18세기 세계의 많은 나라(예를 들어, 일본, 프랑스등)과 비교하면 청나라는 민족, 종교, 경제등 분야에서 선명한 개방성과 포용성이 있었다. 중국의 조공체계는 스스로 봉쇄하는 유한한 교류권이 아니라, 포용성과 개방성을 지닌 지역국제질서였다. 명나라는 화이(華夷)의 구분을 고수하여, 대외정책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고 경직되었지만, 청나라는 일정한 정도에서 '화이'사상의 속박을 벗어났고, 대외정책도 비교적 신축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외학계는 현재 '폐관쇄국'에 대한 연구에서 비록 의견일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가 정확하게 16-19세기 중국이 세계발전체계에서의 역할과 지위를 알수 있게 해준다. "폐관쇄국"의 개념과 관련문제에 대하여 더욱 심도있는 학술연구를 하는데 견실한 기초를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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