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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모얜사건(莫言事件)": 중국지식인의 숙명

by 중은우시 2024. 4. 22.

글: 유방(刘放)

이번에 모좌(毛左, 모택동좌파)들이 모얜을 고발한 사건은 인터넷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거의 모든 자유지식인 혹은 약간의 양심이나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모얜의 편에 서서, 속속 모좌들을 비난하고, 이런 현상을 조성한 사회환경을 질책했다.

다만 나중에 상황이 반전된다. 어떤 사람은 모얜이 모택동을 칭송하고, 시진핑을 떠받들던 영상과 발언을 올렸고, 사정은 복잡하고 궤이하게 바뀐다. 원래 모얜 본인도 모좌였던 것이다! 홍수가 용왕묘로 밀어닥친 것처럼 원고나 피고나 다 같은 편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방향을 틀어 모얜을 욕하기 시작한다. 기실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는 그저 인성의 복잡성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중국지식인의 복잡성은 확실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모얜이 정말 반공인사인가? 모얜의 소설, 산문 혹은 다른 글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몇편의 장편소설 <생사피로>, <풍유비둔>, <주국>, <와>등등. 내용은 토지개혁, 반우운동, 대약진, 문혁 및 계획생육(가족계획)등 수차례에 걸친 정치운동에 관련된다. 어두운 독재제도에 대한 비판, 폭로, 질책이 전면적이고 생동감있으며 또한 깊이가 있다. 최소한 중국작가들 중에서 이 점에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

그의 일부 회고글은 대기근시대 농촌의 참상을 언급한다. 그가 직접 겪은 경력과 느낌을 얘기하고, 배고픔의 고통을 썼다. 그는 소학교때 빈곤하여 전체 반의 남학생들은 옷쪼가리 하나 걸치지 못하고 있어서, 새로 부임해온 여교사를 놀라자빠지게 한 적이 있다고 썼다. 또한 학교안에서 너무 배가 고파서 친구들과 주방아궁이의 석탄조각을 훔쳐먹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런 묘사들은 아주 적나라하고, 전혀 감추지 않았고,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내용만 빠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모분(毛粉, 모택동의 팬)'일까? 아래의 글은 진정한 모좌인 장홍량(张宏良)이 모얜의 글 <모주석의 옛 그날>이라는 글을 읽은 후 모얜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당금 모얜과 같이 극단적으로 모주석을 미워하는 문인이 비록 약간 있지만, 모얜처럼 원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는 <모주석의 옛그날>에서 이렇게 적었다: "원래 나는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초민(草民)일 뿐이라고. 누가 관리가 되든 나는 백성이라고. 모주석이 죽는게 나하고 무슨 관계인가? 현재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나는 생각한다. 모주석의 죽음은 나와 큰 관계가 있다. 나와 관계가 있을 뿐아니라, 심지어 우리 집안의 소와도 관계가 있다. 모주석이 죽지 않았더라면, 무산계급독재하에서 계속혁명을 하는 것이 바뀌었을 것같지 않다. 계급투쟁도 취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문학이 있다면, 현재같은 이런 문학이 아닐 것이다. 그런 문학이라면 나는 쓸 수가 없다. 만일 모주석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나는 분명 소위 '작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모주석이 죽지 않았더라면, 인민공사는 해산되지 않았을 것이고, 인민공사가 해산되지 않았으면, 사원가족은 자신의 소를 기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모주석이 살아있다면, 우리 집안의 그 소도 없었을 것이다." 불가사의한 점은 모얜이 왜 모주석에 대하여 이렇게 원한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원한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모얜은 사상이 깊이있고, 총명하고 예지있는 작가이다. 일부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시비흑백선악에 대하여 그가 인식하지 못할 리 없다. 만일 그런 인식능력조차 없다면, 그는 사상이 그렇게 깊이있고, 그렇게 두터운 문학작품을 써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모얜은 홍콩중문대학에서의 강연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솔직한 말을 하는 것이 작가의 고귀한 자질이라고 여긴다. 만일 작가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거짓말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모얜은 비슷한 말을 여러번 했다.

의문의 여지없이 모얜은 똑똑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똑똑한 중국작가는 아주 많다. 그러나 모얜같은 작품을 써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것은 작가 개인의 양심과 도덕, 용기와 관련이 있다. 당연히 모든 작가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가 우수한 작품을 써낸 연대는 중국정치가 비교적 느슨한 장쩌민, 후진타오시대였다. 당시의 환경하에서, 그는 확실히 용기와 담량을 가졌을 것이고, 붓을 들어 마음 껏 써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벨문학상에 어울리는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다만 모얜은 어쨌든 체재내의 작가이다. 그는 시종 이 점을 잊지 않았다.

개혁개방이후, 중공은 지식인들에게 상당히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저명한 작가는 중공체제내의 관리와 마찬가지로 이익집단이 된다. 이런 측면은 서방의 지식인들도 부러워할 정도이다.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다. 어렸을 때 가난해서 바지조차 입을 수 없었던 모얜과 모얜들에게 이런 것은 얼마나 큰 유혹이었을까? 그들은 높은 급여를 받았고, 특권과 복지를 누렸고, 호의호식하면서 산수를 유람할 수 있었다. 아주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의 매달 급여는 개략 보통농민이 20여년간의 사회보장금(양로금)에 상당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이미 체제에 의지하게 되었고, 체제와는 일종의 의존관계가 형성되었다. 어떤 지식인들이 더더욱 중시하는 것은 권력과 신분지위를 상징하는 특권이다. 많은 사람들은 말로는 특권에 반대한다고 하다가, 일단 특권을 누리게 되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2009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기간에 모얜은 반대파작가인 베이링(贝岭)과 다이칭(戴晴)이 참석한다는 것을 이유로 퇴장한 바 있다.

2012년 작가출판사가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강화"를 기념하기 위하여 백명의 작가를 초대하여 그 '강화'를 베껴쓰게 하였는데, 모얜은 기꺼이 참가했다. 일부 작가들 예를 들어 왕안이(王安忆), 얜롄커(闫连科)등은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기 싫다는 이유로 핑계를 대며 참가를 거절했다.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한 후, 총명하기 그지없는 모얜은 이미 불길한 징조를 눈치챘다.

시진핑은 2014년 10월 개최한 문예공작좌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고, 보편적으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모얜을 비판한 것으로 인식했다. 시진핑은 이렇게 말했다:

"일부 작품에서, 어떤 사람은 숭고한 것을 조롱하고, 경전을 왜곡하며, 역사를 뒤집어버리고, 인민군중과 영웅인물을 추악하게 그린다. 어떤 경우는 시비를 구분하지 못하고, 선악을 가리지 못하고, 추악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그리며, 과도하게 사회의 어두운 면은 강조한다. 어떤 경우는 기이하고 엽기적인 겻들 써서, 사람들의 속된 저급취미에 영합한다. 작품을 돈버는 '요전수'로 여기고, 감각을 자극하 '마약'으로 만든다. 어떤 사람은 헛소리를 마구잡이로 쓰면서, 견강부회하여 문화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모얜은 아마도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그는 알았다. 엄동설한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이는 견강부회가 아니다. 이전에, 모좌들은 모얜에 대한 공격과 욕설을 멈춘 적이 없었다. 모얜을 비판하는 죄명은 시진핑이 말한 것과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바로 이번 좌담회의 분조토론회에서 모앤은 발언중에 시진핑을 낯간지럽게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시총서기의 문예에 대한 담화는 많은 문예공작자로 하여금 이렇게 느끼게 해주었다: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부터 맞다고 탁자를 치면서 일어나게 만들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게 만들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종래 없었던 것을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그가 멋진 말로 정리해주었다.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그가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는 것이며, 아주 높은 예술감상능력을 지닌 사람이고, 전문가라는 것을. 시총서기는 우리의 독자이다. 또한 우리의 친구이다. 당연히 우리들 사상을 이끄는 사람이다."

이건 더 이상 예전의 모얜이 아니다.

이건 기실 농촌식의 간교함과 견풍사타(见风使舵, 바람부는대로 키를 돌려 방향을 튼다)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스스로 살 길을 찾는 것이다. 이게 잘못인가? 잘못이 아니다. 삶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도덕의 높은 자리에서는 내려왔다. 더 이상 독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대로 양심적이고 고상한 작가가 아닌 것이다.

사정은 기실 그렇게 엉망진창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최소한 현재 살신지화도 당하지 않고, 감옥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다만 만일 풍향이 바뀐다면, 문혁이 재현된다면, 그의 그런 태도도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것이고, 그저 그들이 처리하고 싶은대로 처리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도 겁난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국가와 민족도 겁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침묵을 선택하는 것은 모든 작가들이 지켜야할 최저선이다. 이 최저선을 넘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모얜의 성격이 유약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런 일을 했다. 그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문예계의 거물들 예를 들어 대감독 장이머우(张艺谋), 천카이거(陈凯歌)는 명리를 위하여 이전의 원칙적인 입장을 완전히 벇어나서 영혼과 양심을 팔아먹었다. 독재를 칭송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토나오는 쓰레기작품을 찍었다. 그들은 이미 문명의 반대편에 선 것이다.

지금 보자면, 이번에 모좌들이 모얜을 고발한 것은 그저 해프닝에 불과다. 다만 그렇다고 일이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전체 사건에서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모얜을 지지하고 응원했지만, 국내작가들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이건 아주 슬픈 일이다. 어쨌든, 국내작가들이 이 일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건 모얜의 권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전체 중국작가들을 보호하는 것이니까. 그 자신의 권익을 포함해서. 중국에는 강대한 진용의 작가집단이 있다. 전국에 작가협회가 널리 퍼져 있는데, 이렇게 중대한 일이 닥치자 국내작가들은 모두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었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이건 정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일이다.

다행히 리청펑(李承鹏)이라는 분이 나서서, 날카롭고 매섭게 비웃고 욕하는 글을 썼다. 이렇게 하여 중국작가의 체면은 살렸다. 집단적으로 수치를 당하지는 않게 해주었다.

3년전 우한도시폐쇄기간동안 중국은 컸지만, 오직 여작가 팡팡(方方)만일 붓을 들어 펜데믹의 진실한 현실을 썼고, 펜데믹기간중의 인간성, 민중의 고통을 기록했다. 팡팡은 이로 인하여 큰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나서서 팡팡을 지지하고, 민중을 위하여 목소리를 냈던 작가는 아주 적었다. 그리고 봉쇄가 더욱 참혹하고 시간도 더욱 길었던 상하이에서는 비록 작가의 실력이 가장 강하고 문화의 도시라고 자부하던 상하이지만 그 어느 작가도 나서지 않았다.

나중에 인터넷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한 작가 천춘(陈村)의 단문이 올라왔다. 그러나 천춘은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마치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고 선을 긋는 것처럼. 그리고 글에서 언급된 실질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3년에 걸친 대재난에서 중국작가와 지식인들은 집단으로 판단력을 잃었다. 진상을 파헤칠 용기를 잃었다. 이렇게 말하기로 하자. 심지어 창가에서 징을 쳐대던 길거리의 부녀자만도 못했다.

이를 통해서 거슬러 올라가보면, 중공건정이래 역대정치운동에서 중국작가, 중국지식인들의 태도와 행동을 보면 얼굴이 붉어지고, 쥐구멍이라도 찾아들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반호풍운동(反胡风运动)에서 거의 모든 문예계의 유명인사들은 모두 호풍에 대한 비판에 참가한다. 어떤 이름은 지금 얘기하면 아마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곽말약(郭沫若), 주양(周扬)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노사(老舍), 빙심(冰心), 모순(茅盾), 조옹(曹禺), 풍우란(冯友兰), 전위장(钱伟长), 왕약망(王若望), 왕원화(王元化), 정령(丁玲), 진소양(秦少阳), 이희범(李希凡)등도 참여했다. 모두 격렬한 비판글을 섰고, 호풍을 공격하며 낙정하석(落井下石)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아난 반우파투쟁에서, 다시 반호풍의 일막이 재연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명단에 변화가 있었다. 지난번에 공격하던 사람들이 비판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마찬가지로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마찬가지로 낙정하석했다. 막장이었다.

문혁이 되자, 다시 모조리 처리된다. 거의 모든 위에 언급된 인물들은 당하는 사람이 되건 가하는 사람이 되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버린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자살하기도 하고, 피살당하기도 하고, 병신이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느 누구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예상해볼 수 있다. 만일 현재 모얜에 대한 비판대회를 개최한다면, 격앙하고, 분기탱천한 작가들은 아마도 예전 반호풍운동이나 반우파때보다 못하지 않게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지식인들의 숙명이다.

문혁부터 계산해보면, 50여년이 지났다. 중국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났는가? 진보했는가? 각성했는가? 이번 모얜기소사건을 보면, 중국지식인들은 각성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마비되어 있다.

지식인은 국가민족의 엘리트들이다. 민족의 영혼이다. 지식인들의 허리가 부러지면, 민족의 영혼이 사라진다. 중국은 그럼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중국지식인이 이렇게 변한 것은 당연히 그들의 처한 정치적 환경과 관련이 있다. 한차례 또 한차례의 정치운동과 장기적인 세뇌, 갈수록 엄밀해지는 감시로 확실히 그들이 받는 압박은 크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원, 명, 청이래의 문자옥과 각종 사상소탕을 거치면서, 중국지식인은 전통적으로 독립적인 인격의식이 결핍되어 있다. 이건 중국지식인들은 나약하게 만들었고, 기개가 무뎌지게 만들었다. 강력한 권력앞에서 그저 복종하고 시키는대로 할 뿐이었따.

다만 중국지식인들이 공리를 탐하는 일면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들은 지나치게 명리를 추구한다. 어떤 사람은 명리를 추궁하기 위하여 양심을 판다. 만일 명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떤 말은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일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최소한 현재, 아무도 침묵때문에 처벌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또한 문제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