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의 "평형관대첩"에서 일본군을 몇명이나 섬멸했을까?

중은우시 2020. 10. 20. 20:59

글: 상청(常靑)

 

중국 대륙의 전통적인 교육과 선전에 나오는 "평형관대첩"은 임표가 지휘한 팔로군 115사단 3개단이 1937년 9월 25일 평형관에서 일본제5사단 21여단 수송부대를 기습하여 1000여명을 섬멸한 전투이라고 하며, 그것은 중국이 개전이래 최초의 섬멸전이고, 중국인민의 사기를 고무시켰으며, '일본군 불패'신화를 철저히 깨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도 과연 그러할까?

 

아래에서는 필자가 여러 각도에서 사건의 진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팔로군이 당시에 일본군을 몇명이나 죽였는지, 평형관에서 발생한 이 전투를 과연 "대첩"이라 부를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이 전투는 임표의 최초 판본인 전보(電報)의 내용은 적 수송부대 1개대대를 섬멸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편제라면, 일본군의 1개 대대는 중국의 1개 영(營)에 상당하고, 800명가량이다.

 

일본육군의 매 야전사단의 병력편제는 이러하다: 2개의 보병여단(매 여단은 2개의 연대를 거느리고, 매 연대는 3개의 대대를 거느리며, 매 대대는 4개의 중대를 거느린다), 1개 기병대대(3개중대를 거느린다), 1개의 포병연대(2개의 야포대대, 1개의 산포대대를 거느리며 매 대대는 2개의 중대를 거느린다), 1개의 공병연대, 1개의 수송연대(2개의 중대를 거느린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만일 일본군 전투부대의 1개 대대라면 4개중대 확실히 800명이다. 그러나, 수송대는 단지 2개중대 400여명밖에 없다. 병종(丙種) 사단은 팔로군을 상대하는 사단으로, 인원이 적고 중화기가 없다. 그러므로 그 수송부대의 인원은 더더욱 적어서 370명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대대, 연대와 여단은 모두 수송대의 편제가 없다. 단지 사단에만 있다. 전쟁에서, 매일 탄약소모는 매우 많다. 수송병 제5연대(제5사단의 수송대, 대장은 하라다 신이치(原田眞一) 대좌이다)는 사단 산하의 2개 여단과 사단본부에 보급을 제공한다. 그러니 모든 병력이 출동하여 21여단에 보급해줄 수는 없다. 설사 만보를 양보하여, 수송대가 전원 출동했다고 하더라도, 겨우 400여명이다. 1000명 혹은 800명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

 

일본군은 한 가지 습관이 있다. 메모를 남기기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군사자료는 아주 풍부하다. 사단은 말할 것도 없고, 연대, 대대에도 상세한 전사(戰史)가 있다. 일기를 따라 그들의 위치, 배치와 전투를 적는다. 약간만 큰 전투라면 상세히 경과를 적을 뿐아니라, 아주 정밀한 지도까지 남긴다.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1937년 9월 25일 새벽 일본군 21여단 작전부대는 모두 다른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보급부대를 호위해줄 부대가 없었다. 팔로군은 일찌감치 9월 26일 새벽에 전투에서 후퇴했다. <하마다(濱田)연대(제21연대)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9월 28일 제21연대의 제3대대가 115사단이 일본군을 섬멸한 전장에 도착한다. 그들은 차량의 잔해와 시체만 보았다. 9월 25일의 전투가 발생했을 때 그들은 멀리 영구(靈丘)에 있었다.

 

전투발생 5년후, 팔로군 부총사령관 팽덕회는 비로소 중공당내에서 평형관전투의 실활을 인정한다. 팽덕회는 1942년 12월 18일 태행구 영급(營級) 및 현급(縣級)이상 간부회의에서, "화북근거지공작에 관한 보고"를 하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군중유격전에 관하여 평형관전투이후, 더욱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평형관은 완전한 기습전이다. 적이 사전에 전혀 생각지 못했다. 다만 결과로 우리는 살아있는 일본군을 하나도 생포하지 못했다. 다만 100개가 되지 않는 완전한 소총을 획득했다."(중공중앙 화중국 선전부 1943년 8월 20일 출판된 당내비밀간행물 "진리"제14기)

 

그렇다면 팔로군은 도대체 몇 명의 일본군을 섬멸했을까?

 

먼저 상식에 근거하여 판단해 보자면, 제9여단과 제5사단본부에도 보급을 하여야 하므로, 일본군 수송병 제5연대가 21여단에 보급하기 위해 보낸 인원수는 분명 전체부대의 1/3 기껏해야 1/2(1개 중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100-200명이 된다.

 

우리는 다시 일본군과 국민정부군의 자료를 보기로 하자.

 

일본의 전사전문가는 군사와 참전노병의 회고를 상세히 고증한 후, 평형관전투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1937년 9월 25일 일본군 제21여단의 전체 작전부대는 다른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부대에 병력을 보내 호위하지 못했다. 중공의 소위 기습전은 일본전사에는 전사기록이 없는 소규모 전투이다. 다만 중공의 기재는 아주 멋진 기습전이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아마도 최대한 200여명의 일본군 수송병을 죽인 것이다."

 

일본사람인 코지마 노부루(兒島襄)은 <일중전쟁>에서 이렇게 적었다. 평형관전투에서 일본군 사망 167명, 부상 94명(일본문예춘추사 1984년판). 이 숫자도 위에서 추정한 숫자에 부합한다.

 

다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자료를 보자. 당시 국민정부 군사고급참모로 있으면서 산서전선에서 일했던 서영창(徐永昌), 임울(林蔚)은 전선으로 가서 심도있게 검토한 후, 장개석 위원장에게 보낸 전보에서 팔로군이 적 이백여명을 섬멸했다고 보고한다(대륙에서 출판된 <항일전쟁정면전장>에서 이 전보를 인용한다). 이는 일본측의 자료와 부합한다.

 

기실 115사단의 평형관전투는 국민당 평형관전투의 한 구성부분이다. 그저 그 중에서 아주 소규모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팔로군이 항전을 시작한 첫번째 전투이다. 실제로, 임표가 지휘하는 부대는 산서 동북부 평형관에서 그저 매복전만 전개했고, 일본의 수송부대 꼬리를 습격했다. 그렇다면 왜 팔로군만 유명해지고, 나머지 섬멸인수나 자신의 사상자수가 팔로군보다 훨씬 많았던 다른 국군부대는 오히려 이름이 없을까?

 

대만학자는 그 중의 원인을 분석했다:

 

"작전경과와 사망상황으로 보면, 고계자(高桂滋) 부대의 사상자수는 팔로군의 배이다. 이를 보면 고계자부대가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다. 당시 고계자 부대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임표의 115사단은 과대하게 선전된다. 국내의 신문들도 중공의 선전에 속아서 이를 평형관대첩이라 부르면서 크게 떠들었다. 원인을 따져보면 아래의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국부군위원회의 규정에는 군사기밀을 지키기 위하여 전황에 대한 보도에서 국군번호를 알릴 수 없었다. 그래서 국군은 송호 및 각지에서의 전적에서 한번도 부대번호를 발표하지 않았다. 고계자군의 영웅적인 작전도 마찬가지였다; 팔로군만 국가기밀을 신경쓰지 않고, 이 규정에 위반하여, 고의로 자신부대의 번호와 전적을 알렸다. 그리고 전국에 선전했다. 그렇게 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을 이루었다.

 

둘째, 팔로군 참모처는 각 신분사에 26일 전보를 보낸다. 고의로 그들이 기습전으로 섬멸한 적군을 만여명이라고 알린다. 각 신문사들은 이에 속아 앞다투어 싣게 된다. 전보 원문은 이러하다: <대공보> 앞. '구월 이십오일, 우리 팔로군은 산서북부 평형관에서 적 만여명과 격전을 벌였다. 계속 돌진하여, 우리군은 용감하게 전진했고, 쳐들어온 적을 전부 궤멸시킨다. 모든 평형관이북의 신장, 관사, 동포지 일대의 진지를 완전히 탈취했다. 적의 관병중 전사한 자들의 시신이 들판에 널려 있다. 일부는 포로로 잡혀 무기를 내놓았고, 자동차, 탱크, 총포 및 기타 군수품을 아주 많이 획득했다. 현재 정리중이다. 현재 적의 잔여인원은 소새촌으로 후퇴했으며, 우리는 사방에서 포위중이다. 팔로군 참모처."

 

이를 보면, 중공이 말한 소총 천여정을 획득했다는 것은 역시 10배는 과장한 선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평형관전투의 진상을 알 수 있다. 평형관전투는 예를 들어, 송호, 태아장, 장사등 이십여차례의 대회전과 비교하면 전혀 비교할만한 것이 못된다.

 

대만학자는 나아가 지적한다: 이상의 3가지 자료를 보면, "적 만여명과 격전을 벌였다"에서 "적 삼천여명을 섬멸했다" "적 1천여명을 섬멸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맞는 것일가? 실제 평형관전투에 참여한 군대는 국군이다. 또한 국군에 편제되어 들어온 팔로군이다. 국군이 주력이고, 제17군 고계자의 84사단 고철(高哲), 제21사의 이선주(李仙洲)이다; 제15군 유무은(劉茂恩)의 제75사단 무정리(武庭麟)과 유무은이 사단장을 겸하고 있던 제65사단 및 유봉빈(劉奉濱)의 73사단 합계 6개사단이다. 9월 26일의 평형관전투는 중공 115사단주력이 일본군 수송부대를 습격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크게 자랑하는 제1차전투이다. 전체 전투를 보면, 중공115사단은 단지 적의 수송부대를 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전체 전투에서의 지위와 가치는 다른 6개사단과 비교하면 같은 반열에 둘 수가 없다. 중공의 역사에서는 평형관전투를 팔로군의 '대첩'이라고 하면서, "소위 황군불패의 신화를 타파하고, 전국인민의 항일열정과 필승신념을 고무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완전히 역사적 사실과 들어맞지 않는다. 

 

팔로군이 포위섬멸한 것은 단지 일본군의 비전투수송부대였다. 근본적으로 일본군 전투부대를 포위한 것이 아니다. 이번 소규모전투에서 싸운 것이 전투부대가 아니다. 그리고 임표에 따르면, 대부분의 적군은 자고 있었다. 임표는 1941년 소련에서 요양할 때 코민테른에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군대는 국민당군대와 개전했을 때, 나는 여러번 중앙에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여하한 회신도 받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스스로 결정하여 평형관에서의 전투를 하게 되었다."

 

다만 공개적으로는 선전을 위하여, 중공은 평형관전투를 거대한 승리라고 포장한다.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훨씬 항일에 열심이었다고 말한다. 평형관은 삼척동자도 아는 이름이 된다. 비록 평형관에서 죽인 일본군은 기껏해야 일이백명에 불과하지만, 다만 이는 중공이 항전몇년동안 싸운 그래도 약간 규모가 있는 전투이기는 하다. 임표는 3년후 코민테른에 보고할 때 이렇게 말한다: 중공은 지금까지도 이 전투를 선전한다. 우리의 글에서 이 전투만이 얘기하기 좋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