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은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했는가?

중은우시 2021. 4. 7. 14:21

글: 원빈(袁斌)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전당 및 전군의 최고지도자지위를 확립했다는 것이 중공의 일관된 설명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장정역사연구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현존하는 자료와 학자 허팡(何方)등의 연구에 따르면, 준의회의는 중공이 장정으로 도망하는 도중에 귀주 준의에서 거행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이다. 주로 박고, 주른애, 이덕이 장정에서 통솔하던 군사노선의 잘못을 반성한 것이다. 그때 중앙홍군의 장정을 통솔한 사람은 소위 "삼인단"(총서기 박고, 정치국상위 주은래 및 코민테른 대표 이덕)이다. 회의에서 박고는 5차에 걸친 포위소탕에 대한 총괄보고를 했고, 주은래는 부보고(副報告)를 했다. 정치국상위 장문천(張聞天)은 '반보고(反報告)'를 하여, 삼인단의 군사노선의 잘못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회의의 위탁을 받아 <중공중앙의 적의 5차례 포위소탕을 반대하는데 관한 총괄결의안>을 초안한다. 회의에서 정치국상위를 개조하여, 장문천이 박고를 대체하여 총서기가 된다. 장문천 왕가상(王稼祥)의 제안으로 모택동을 정치국 상위로 선임한다. 회의는 박고, 주은래, 이덕의 '삼인단'을 취소한다. 군사수장 주덕, 주은래를 군사지휘자로 삼고, 주은래가 당내에서 위탁받은 군사상하최후의사결정의 책임자가 된다. 모택동은 주은래의 군사지휘상의 보조자가 된다. 회의후 성립된 주은래, 모택동, 왕가상의 3인 군사소조에서도 주은래가 조장을 맡는다.

 

이를 보면, 준의회의에서, 비록 모택동이 정치국상위로 선임되어 당의 지도핵심에 들어갔지만, 그는 박고를 대체하여 총서기를 차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먼저 조직적으로 새로운 집단지도체제중의 최고인물이라 할 수가 없다. 만일 회의 상황이 나중에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면, 모두 모택동을 최고지도자로 옹립했을 것이다. 왜 그를 총서기로 선임하지 않고, 장문천을 총서기로 선임했단 말인가. 결론적으로, 준의회의에서는 모택동의 중공 전당, 전군에 대한 최고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지 않았다. 확립된 것은 장문천을 대표로 하는 당중앙의 집단지도체제였다. 준의회의 및 그 후의 일정한 기간동안, 모택동은 이 지도집단의 일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직 핵심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허팡등 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준의회의후 장시간 중앙회의를 소집 주재한 것은 장문천이고, 전당의 조직을 지도한 사람도 장문천이며, 정치적인 지도와 의사결정과정에서 보더라도 장문천이 우두머리이다. 중앙을 대표하고 중앙의 명의로 업무를 처리한 것도 장문천이다. 모택동이 중앙과 당내의 최고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은 최소한 3,4년이후의 일이다. 준의회의때는 아직 과도기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또 하나의 주장이 있는데, 그것도 근거가 없다. 즉, 주은래가 준의회의때 발언하면서, "전력으로 모택동 동지를 우리 당과 우리 군의 지도자로 추대한다", "그의 발언과 제의는 회의에 참석한 절대다수 동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회의에서 최소한 모택동을 주은래 대신 군위서기로 뽑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고, 임무를 분담하는 보조자의 역할만 맡겼을가? 삼인군사소조를 성립할 때도 그가 당연히 조장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주은래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고문조차도 밀어내고, 총서기도 교체하고, 군사지도지휘관도 바꾸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을 것이고, 주은래 자신이 극력 사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오랫동안 전해져온 그런 주장은 그다지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미 세상에 공개된 <등영초일기(鄧潁超日記)>에 기록된 주은래가 임종전에 준의회의에 관하여 한 말도 명확히 중공의 역대이래의 주장에 반한다. 1975년 11월 15일, 주은래는 등영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역시 스스로 몇 가지 사건을 반성하고, 검토하고, 명확히 해야겠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계속 잘못 놔두어 거짓이 계속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 역사는 아무도 바꿀 수 없다. 1935년 1월, 준의회의에서, 장문천 동지를 대표로 한 당중앙이 확립된 것은 중국공산당역사상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다행히 그때 회의에 참석했던 동지들이 아직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