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는 위작일까?

by 중은우시 2020. 11. 18.

글: 화용군(華容君)

 

<양주십일기>는 청나라때 나타났다고 하는 청나라초기 청나라군사들이 양주성을 함락시킨 후, 10일동안 잔혹하게 양주성의 주민들을 도살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이 글은 역사학계와 애호가들의 논쟁을 불러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이 청나라군사들이 양주성의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도살한 것에 대한 진실한 증거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글은 모호하고 애매한 내용과 추악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였고, 이 글이 특정한 역사상황하에서 돌연 나타났다는 것들을 들어 이 글은 작성과 동기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후자의 견해에 찬동한다. 즉 <양주십일기>는 악의를 가지고 쓴 위작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미리 밝히고 지나가야할 것같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청나라군사들이 양주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청나라군사들이 양주성내에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사람을 죽였는지는 이 글에서 다루는 이슈가 아닌 것이다.

 

1. 작자인 왕수초(王秀楚)는 양주사람이 아니다.

 

<양주십일기>의 가장 큰 헛점은 왕수초가 양주성내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술할 때, 글에서 큰지명인 '양주(揚州)'와 '과주(瓜州)'를 언급하는 외에 장소를 지칭할 때는 '동성외(東城外)', '남관(南關)'등으로 썼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지명은 단지 "하가분(何家墳)', '결구관(缺口關)', '전항(田巷)'등 3개뿐이다. 그중 '하가분'은 3번 중복되어 나온다.

 

간양(簡陽) 부적길(傅迪吉)의 <오마선생자서기년(五馬先生自敍紀年)>에는 청나라초기 직접 겪은 사건을 기술하면서, 발생한 사건의 절대다수는 시간을 기재했을 뿐아니라, 장소도 기재했다. 예를 들어,

 

"구월 십이일, 적이 인수 호가만으로 추적해 들어왔다. 원근지방의 천여명은 아주 조급해진다, 할 수 없이 산으로 올라가 맨손으로 맞서 싸웠다. 예로부터 채자산(寨子山)이라고 전해진다. 얼마 지나서, 두 무리의 기병이 산으로 올라오고,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모조리 흑지만 희아탄에서 죽임을 당했다. 물속과 강안에 빈 곳이 없었다. 여기에서 처음 참혹한 살인을 보았다."

 

수녕(遂寧) 장랑(張烺)은 그의 <신여록(燼餘錄)>에서 명말청초의 전란을 기술할 때, 모두 상응한 지명을 소개했다.

 

"관군은 재동(梓潼)에서 패배했다. 이자성은 혈혈단신 초(楚)로 도망치고, 나머지 잔당들도 흩어져 도망쳤다. 독사(督師)는 여러 군대에 토벌을 명했다. 부군(府君)은 적을 면(沔)까지 추격하였으나, 고립되고 원군이 오지 않아서, 싸우다가 죽었다."

 

부적길, 장량 두 사람의 글을 보면 사건을 기록할 때 시간과 발생장소를 모두 기재하여 읽을 때 장소감을 느끼게 해준다. 오늘날에도 사건을 기록하면 모두 시간, 장소를 하나하나 분명히 밝힌다. 그래야 신뢰도가 올라가고, 검증이 가능하다. 대대로 양주성내에 살아온 부자 '왕수초'라면, 성안에서 발생한 사건의 장소에 대하여 겨우 3곳만 기록으로 남겼단 말인가. 십일동안 청나라군사들이 사람을 무수히 죽였을 것이다. 당연히 여러 장소를 언급해야 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의심이 들게 만든다. 지명도 밝히지 않으면서 발생하였다고 하는 사건은 후세에 검증확인할 방법이 없다. 양주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애매하게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왕수초가 양주사람이 아니라고 의심을 하게 된다.

 

2. 명나라의 보통사람이 문제를 보면서 '중국'이라는 층면까지 끌어올렸다.

 

왕수초는 글에서 여러번 돈으로 목숨을 살렸다고 적었다. 그는 분명 돈많은 부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 주민이다. 그러나 그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병졸은 일찌기 이런 말을 했다: '우리들이 고려(조선)를 정벌했을 때, 부녀 수만명을 약탈했지만, 한명도 절개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당당한 중국이 어찌 이처럼 후안무치하단 말인가?' 오호 이것은 중국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당시 만주족들이 한족을 부를 때는 보통 "남만자(南蠻子, 남쪽오랑캐)"라고 불렀다. 습관상 명왕조를 '중국'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다. 명왕조를 정통으로 숭배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명왕조를 함부로 '중국'이라고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개 평민이 이런 류의 사건을 가지고 국가층면으로 인식하다니, '왕수초'의 신분에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왕수초의 글은 청나라병사들이 양주성에 진입한 후, 벌인 일련의 추악한 장면들을 모두 직설적으로 쓰고 있는데, 이는 중국문인들의 은휘(隱諱)하게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3. 글의 전세과정이 의문스럽다.

 

수녕 장량의 <신여록>에는 청나라조정과 이해관계가 있는 내용이 없다. '신여록'은 장헌충이 촉(사천)을 도살한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장량 노인이 죽기 전에 자신의 일생경력을 자손들에게 얘기한 것이다. 그래서 <신여록>은 <장씨족보>에 기록될 수 있었고, 청나라초기부터 공개적으로 전해져서 지금까지 내려온다. 간양 부적길의 <오마선생자서기년>에는 '달자수재(韃子秀才)'같은 청나라조정과 이해충돌이 있는 문자가 있다. 그래서 계속 자신의 개인문집에 비밀리에 숨겼고, 자손들도 단지 몰래 베꼈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못했다. 민국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양주십일기>가 만일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왔다면, 아마도 청나라초기부터 후세로 전해졌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런 사실이 없다. 일설에는 이 글이 청나라 '도광연간'에 책으로 인쇄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스스로 칼날아래로 목을 들이미는 반역의 거동이다. 이 책이 후세까지 전해지는 과정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4. 왕수초가 이 글을 쓴 동기가 의심스럽다.

 

많은 사람들은 <양주십일기>라는 글이 청나라말기 일본에서 나타났고, 혁명당인들이 이를 다시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왔다는데 동의한다. 이 글의 내용은 혁명당인들의 입맛에 맞았고, 그래서 널리 전해지게 된다. 이치대로라면, 신해혁명활동전에, 청나라조정이 반동적이고, 낙후되고, 잔혹하고, 부패하며, 나약하다는 것을 까발리는 글은 모두 유력한 전투무기로 될 수 있다. 이들 무기중에서, 청나라조정의 밑바닥을 까발리는 글도 적지 않았다. 모두 상당히 큰 작용을 한다. 그러나, 이들 선전작품들 중에서 얘기한 내용들 중 일부는 진실인 것도 있지만, 일부는 위작도 있다. 우리는 그 창작동기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청나라말기, 각종 사회모순이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구축달로(驅逐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라는 구호는 민족모순의 해결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았다. 만주족과 한족 사이에 평화롭게 공존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갈라져서 관계를 끊을 것인가. 이는 혁명당인들에게 선택을 해야했고, 해결해야할 중대문제였다. 만일 이를 잘 처리하면, 인민도 행복하고 나라도 행복하지만 반대라면 국가는 분열될 수도 있다.

 

<양주십일기>는 청나라의 밑바닥을 드러낸 글이다. 겉으로 보면, 청나라말기의 민족갈등이 유래깊은 것을 알 수 있지만, 사실확인이 되지 않는 청나라군사들의 도살에 관한 기록은 충분히 편협한 민족주의사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그 편협한 민족주의사상을 임의로 발전시킨다면 만주족과 한족의 갈들은 더욱 격화될 것이고, 국가가 분열될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의 작자는 절대로 청나라초기의 '왕수초'가 아니라, 청나라말기의 '왕수초'라고 해야 한다. 누가 청나라말기의 '왕수초'일까? 우리는 누가 민족관계단절, 국가분열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인지를 따져보면, 누가 왕수초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