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 천진대학의 전신): 중국근대 최초의 대학

중은우시 2022. 6. 2. 14:48

글: 매화서향(梅花書香)

 

중국 근대 최초의 대학 즉 천진의 북양대학(지금의 천진대학 전신)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895년, 사상유례없던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지 단지 몇달이 지난 후에 천진해관의 성선회(盛宣懷)는 청나라조정에 주청을 올려 천진에 “서학체용(西學體用)”의 북양서학당(北洋西學堂)을 개설할 것을 요청한다.

 

확실히 패전후에 깊은 반성을 통해, 지방과 중앙정부는 누습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서양식 학당’을 열도록 만들었다. 광서제는 신속히 조서를 내려 허락한다. 그리하여 얼마 후 ‘국립북양대학당’이라고 불리는 신식 대학이 천진 해대도량원문 밖(지금의 대고로 대영문외 해하중학, 해방남원 일대)의 박문서원(博文書院) 옛 부지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성선회는 학당독판(督辦)을 맡았고, 미국주천진영사관의 부영사 찰스 다이넬 테니(Charles Daniel Tenney, 중국명 丁家立)를 총교습(總敎習, 敎務長)으로 초빙했다.

 

계획에 따르면 학당의 연간경비는 은오만오천냥이었고, 천진해관도가 관할하는 전보국, 초상국의 자금에서 지급되었다; 학당내에는 1등, 2등학당으로 나누고, 학생 120명을 모집했다. 1등학당은 처음에 공정(工程, 엔지니어), 광무(鑛務), 기계와 율례(律例, 법률)등 4개 학과를 두었다. 전문학교과정과 대학과정이 있었다; 2등학당은 대학예과에 상당했다. 테니는 학교의 정관을 제정하고 장래계획을 세우는데 참여했을 뿐아니라, 그후 11년간 북양대학당의 실제책임자가 된다. 이렇게 되니 학교는 북양대학 교우인 손월기(孫越崎)가 말한 것처럼, “북양대학은 명목상으로 국립대학이지만, 실제로는 교회학교와 같았다”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났다. 교수의 절대다수는 미국인이다. 교재는 미국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였고, 수업은 일률적으로 영어로 진행되었으며, 숙제와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도 북양대학교우들이 즐겨 얘기하는 것에는 “캠브리지(하버드대학소재지)에서 태어나서 자란 테디는 하버드, 예일같은 일류명문대학의 모델을 북양대학교내로 이식하여, 그 시작점이 매우 높았다.” 북양대학 학생은 청나라말기에는 광동출신이 많았고, 민국초기에는 강소절강출신이 많았으며, 그후에는 하북출신이 많았다. 학생들의 출신지역분포가 남에서 북으로 옮겨갔는데, 이는 중국인들이 “구풍미우(歐風美雨, 구미의 분위기)”에 접촉한 상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학당을 개설한 초기에는 홍콩에서 학생을 뽑았다. 응시자가 수천에 이르렀으나, 실제 합격자는 겨우 십여명이었다. 그중에는 퀸스칼리지에서 공부하던 왕총우(王寵佑), 왕총혜(王寵惠) 형제도 있었다.

 

그들의 회고에 따르면, 북양대학의 과정은 간결하고, 완비되었으며 실용을 중시했다. 학교는 전문가를 초청해서 강의를 하도록 했는데, 나중에 미국대통령이 되는 후버도 당시 광무과에서 여러번 강의를 한 바 있었다. 왕씨형제는 4년후 몇되지 않는 북양대학의 제1회졸업생이 된다. 테니가 초빙한 미국교수는 월급이 은2백냥이었다. 그들이 본국에서 받는 급여보다 많았고, 초빙계약은 통상 3년이었다. 중국교수의 급여는 은40냥인데, 당시에는 아주 높은 편에 속했다. 무술변법을 전후하여, 오치휘(吳稚暉)는 북양대학에서 국문 교수를 맡은 바 있다. 비록 재직기간은 짧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북양대학교수로 칭했다. 이를 보면 일종의 신분이자 명예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고수들 중에도 저명한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복랍이(福拉爾, 영문이 뭔지는 확인안됨)와 모리스 두 교수가 있다. 전자는 스위스에 있을 때 아인슈타인과 아주 친했고, 상대론을 잘 알았으며, 북양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모리스는 미국의 저명한 지질학자로 컬럼비아대학 교수를 지낸다. 아시아에 지질탐사를 온 후에 북양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테니는 총교습으로 자신의 직책을 다 했고, 학교를 엄격하고 열심히 관리했다. 초기의 학생들 회고에 따르면, 겨울밤에 학생중 취침규정을 어기고 잠을 자지 않고 잡담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번은 테니가 급습했다. 학생들은 얼른 등을 끄고 침대로 들어가 잠자는 척했다. 테니는 학생들의 발을 만져보고 발이 차가운 학생 몇명은 아직 잠들지 않았던 학생들임을 알아내어 훈계를 했다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엄격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테니가 학교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을 때, 1900년 팔국연합군의 천진점령사건이 벌어진다. 캠퍼스는 연합군에 점령되어 군영으로 사용된다. 테지는 직예총독겸 북양대신 원세개(袁世凱)와 힘을 합쳐 독일군에게 학교부지를 내놓게 요구하려 했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때 테니는 스스로 나서서 베를린으로 가서 독일법률을 인용하여, 배상금 백은5만냥을 받아낸다. 원세개는 서고(西沽)무기고부지와 배상금중 일부를 내준다. 이를 가지고 테니는 학교를 다시 연다. 1903년 4월 27일, 북양대학당은 서고의 새 캠퍼스에서 재건된 후 정식으로 개학한다.

 

이때부터 서고도제(西沽桃堤), 북운수방(北運水舫)은 북양대학의 학생들이 졸업한 후 모교에 대한 상징적인 기억이 된다. 북양대학당이 소재한 서고는 천전성에서 7,8리 떨어져 있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했고, 걸어가면 한참을 가야 했다. 성을 나서 북으로 걸어가면 시끄러운 소왕장 마을을 지나게 된다. 이 길을 ‘대학도(大學道)’라 불리게 된다. 명덕교(明德橋)를 건너서 굽은 길을 돌아가면 수풀속에 건축물군이 보인다. 다시 북운하(北運河)를 가로지르는 나무다리 신민교(新民橋)를 건너서 몸을 돌리면 바로 학교정문인 ‘지선문(至善門)’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멀지 않은 곳에 종루(鍾樓)와 서양식건축물이 나온다. 건물의 가운데 상단에는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교가의 첫부분은 “화제애애(花堤靄靄), 북운도도(北運滔滔), 외외학부북양고(巍巍學府北洋高)”이다. 북양대학당의 제1차복교에는 테니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후 그는 직예성서학독판을 겸임하며, 직예고등학당(보정소재)의 총교습등 직위도 맡아, 구식4년제중학 10여곳을 건립한다. 이렇게 하여 대학체제와 연결시키게 된다. 원세개는 급히 사람이 필요하여, 북양대학당의 학생들이 졸업하기도 전에 1906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근 50명의 학생을 미국으로 유학보낸다. 테니는 ‘유미학당감독(留美學堂監督)’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가서 입학과 거처등을 마련해주었다.

 

학생들은 하버드, 예일, 코넬등 명문대학에 입학하여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중에는 유서항(劉瑞恒, 협화의학원장을 역임함), 유경산(劉景山, 민국시기 교통부 노정사장), 진분(秦汾, 북경대학 교수), 마인초(馬寅初, 저명한 인구학자), 풍희운(馮熙運, 북양대학 교장역임)등이 있다. 1908년 테니는 북양대학당을 떠난다. 그때 미국, 중국정부는 일부 경자배상금으로 “유미학무처(留美學務處, 청화대학의 전신)”를 만드는 외교협상을 시작한다. 데니는 거기에 참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