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법률선생(法律先生)
화동정법대학에는 아주 유명한 건물이 하나 있다.
이 110여년전에 만들어진 건물의 이름은 격치루(格致樓)이다. 그리고 이 건물의 역사는 화동정법대학보다도 오래되었다.
화동정법대학 이전에 이곳은 전설적인 대학이 있었다. 얼마나 전설적이었을까?
영의인(榮毅仁, 붉은 자본가로 나중에 국가부주석이 됨), 임어당(林語堂), 장애령(張愛玲), 패율명(貝聿銘, I.M.Pei, 건축가. 루브르박물관의 유리피라미드가 유명함), 주유광(周有光), 고유균(顧維鈞), 오복(吳宓)등등 심지어 헤이그국제재판소장 사구용(史久鏞), 민국시대 저명한 변호사 강일평(江一平), 홍콩영화의 대부 추문회(鄒文懷, 골든하베스트 창업자), 그리고 민국정부의 총통을 지낸 엄가감(嚴家淦)이 모두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곳이 바로 동방의 하버드대학으로 불리던 상해성요한대학이다.
화동정법대학의 캠퍼스에서 이 오래된 작은 건물을 보면서 과거를 떠올려보면 탄식이 일어날 것이다:
어떻게 굴기했고, 왜 돌연 사라졌는지, 심지어 지금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얼마 남지 않게 되었는지.
1. 상해탄의 서양대학
1870년대말, 미국의 성공회는 상해에 성요한서원(聖約翰書院)을 만든다.
다만 성요한을 키운 진정으로 키운 사람은 Francis Lister Hawks Pott(1864-1947 중국명 卜舫濟)이다.
1988년 미국의 선교사 Pott가 중국으로 온지 2년째 교장을 맡는다. 그의 재임기간동안 캠퍼스는 3배로 확장되고, 과정은 중학에서 대학으로 승급되었고, 당시 전국에서 학과를 모두 갖춘 대학중 하나가 된다.
Pott는 먼저 언어를 가르치는데 주력했다. 그의 주도하에 영어는 성요한대학의 주류언어가 된다.
일주일의 칠일중 6일은 모두 전일제 영어수업이었고, 학생들의 일상교류도 영어로 이루어졌다.
한어병음의 창시자인 주유광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학에 들어가니 마치 외국에 온 것같았다. 공고조차도 모조리 영어뿐이었다.
성요한대학을 졸업한 학자들의 영어수준은 이미 미국 본토민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당시 외교가 약했던 중국에서 성요한대학졸업생들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외교부일 수밖에 없었다.
언어외에 체육도 Pott가 중점을 두었던 과목이다.
그는 교내에 테니스, 축구, 조정등 여러 체육활동을 개설한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축구팀도 성요한대학에서 탄생한다. 당시 학생들은 머리에 아직 변발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 축구팀을 "성요한변자군(辮子軍)"이라고 불렀다.
1905년, Pott는 워싱턴에 등록하여 성요한서원이 정식으로 성요한대학이 된다.
그의 노력으로, 하버드대학, 미시건대학등 저명한 대학에서도 성요한대학의 졸업생을 받아주었고, 심지어 예일대학에서는 입학시험을 면제해주었다.
당시의 국내교육환경에서 이는 유일무이한 경우였다. 바로 이런 노력덕분에, 많은 대단한 민국시대의 인물들이 성요한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Pott가 거의 혼자의 힘으로 상해탄의 작은 학당을 세계유명대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그리고 그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학생들과 친구로 사귀기를 즐겼고, 한가할 때면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식사하고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심지어 같이 노래도 불렀다.
임어당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나의 서방문명에 대한 기본태도는 서적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성요한대학의 교장 Pott박사와 다른 우수한 교수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들은 모두 진정한 군자이다."
그러나 Pott는 좋은 대학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고, 큰 대학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학교와 대학을 지나치게 크게 키워서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중요한 요소를 희생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목표는 비교적 작은 학교 혹은 대학이다.
다만 품질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발효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체 중국사회에 더욱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학생수만 많고, 시끌벅적한 학교보다 훨씬 낫다."
2. 성요한이 배출한 법률가
성요한을 졸업하고 법률에 종사한 사람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중화민국 외교제일인 고유균. 그는 나중에 컬럼비아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에는 헌법기초위원회의 위원이 된다.
고유균은 나중에 헤이그국제재판소의 재판관, 부소장까지 지낸다.
그의 헤이그국제재판소의 후임자가 바로 사구용이다. 그는 나중에 소장까지 오른다.
재미있는 것은 사구용이 성요한을 졸업한 후, 역시 컬럼비아대학에서 법률을 고우했다는 것이다(이것은 아마도 Pott교장이 컬럼비아대학출신이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80년부터, 사구용은 외교부 법률고문을 맡고, 여러 국제회의와 조직에서 중국정부의 법률대표 혹은 고문을 맡았다.
예를 들어, 영국정부와 홍콩회귀에 대한 협상을 벌일 때 그의 공이 아주 컸다.
협상과정에서 어떻게 홍콩과 <GATT>와의 관계를 처리할 것인지가 중요한 법률문제였는데, 사구용은 정확히 판단하고 중요한 의견과 건의를 낸다.
1993년, 사구용은 헤이그국제재판소로 가고, 10년후, 그는 국제재판소 소장에 당선된다. 그는 최초의 중국인 국제재판소장이다.
3. 성요한대학의 소망(消亡)
백년전의 중국에는 10여개의 교회학교가 있었다. 그들은 국내교육체계에서 독립되어 있었다.
북양정부시기이건 남경정부시기이건, 정부는 학교의 교육권을 회수하고자 한 적이 있다.
당시의 사회환경에서 이들 외래의 교회학교에 대하여는 적의가 충만했다.
그리고, 성요한대학은 영어로 교육을 진행했기 때문에 더더욱 '제국주의사상의 침략'이라고 공격을 받았다.
1937년 7월, 항일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11월 상해가 '함락'된다.
당시 성요한대학의 부교장을 맡고 있던 심사량(沈嗣良)은 철학자인 부통(傅統)선생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성요한대학을 공공조계의 대륙상장(大陸商場)으로 이전하여 가르친지 이미 2년이나 지났다고.
당시의 상해는 혼란했고, 정권은 고압적이고, 암살사건이 빈번했다. 물자는 부족하고, 물가는 날로 올라갔다. 난민붐이 갈수록 심각해졌고, 일반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 성공회의 경비지원도 완전히 끊긴다. 학교운영은 그저 학비와 교우들의 기부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 일본점령시기의 상해는 심각한 형세로 인하여 성요한대학도 학교운영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2년후, 성요한대학은 어렵게 수업을 재개한다. 심사량이 교장을 맡는다. 그는 성요한대학 최초의 중국인 교장이다.
1949년이후, 화동군정위원회 교육부가 성립되고, 항해의 각 대학은 교육부의 관리에 들어간다.
1952년, 성요한대학은 폐교되고, 성요한대학의 학과들은 복단대학, 동제대학, 화동정법대학등 상해의 여러 대학들로 편입된다.
이때부터 성요한대학은 소실된다. 현재 상해의 여러 명문대학들에는 모두 성요한대학의 잔영이 남아 있다.
1966년이후, 성요한의 학생들은 더더욱 눈엣가시로 여겨진다.
반제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성요한대학은 이미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제국주의의 흑학교'로 규정되어 버렸다.
성요한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자랑스럽게 자신이 그 학교를 나왔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졸업증서까지 불태워버리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4. 마지막 정식교장
성요한대학이 성립되고, 흥성했다가 소멸할 때까지 5명의 교장이 있었다. 대리교장을 뺀다면 도우경(塗羽卿)이 마지막 정식교장이다.
시국이 혼란한 시기에, 교회학교의 고장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할 수 없다.
1948년, 미국 주중국대사 사도뢰등(司徒雷登, John Leighton Stuart, 1876.6.24-1962.9.19)은 상해와 남경의 기독교대표단을 이끌고 장개석을 만난다. 장개석에게 진압을 포기하고 평화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도우경도 그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1949년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할 때 그는 출국기회를 포기하고 대륙에 남는다.
1951년말, '삼반오반'운동이 시작되고, 도우경은 중점타격 혹은 비투대상이 된다.
제국주의분자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관계가 있고, 친미, 숭미의 '잘못된 사상'을 가졌다는 것이 그에게 덧씌워진 죄명이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도우경은 계속하여 격리, 심사, 청산, 수감을 당하고, 두번이나 치욕을 참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었다.
감옥에서 3년의 힘든 세월을 견딘 도우경은 출옥한 후 신체상황이 계속 나빠진다. 어느 한 해의 설날에 상해사범대학의 대표가 그를 보러 왔다. 그리고 차갑게 위협한다:
네가 격리되었을 때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다!
석방된 3년후, 도우경은 한을 품고 죽는다.
도우경의 서거는 한 사람의 소멸만이 아니다.
그가 대표하는 것은 바로 그 대학이다. 상해탄에 굴기했고, 흥성했다가 시대의 변천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간...
지금 우리가 되돌아보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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