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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장백령(張伯苓): 남개대학(南開大學)의 창립자, 그리고 주은래(周恩來)와의 관계

by 중은우시 2022. 7. 22.

글: 임휘(林輝)

 

당금 중국대륙의 명문대학중에서 천진의 남개대학은 역사가 깊은 곳이다. 많은 중국인들은 이 대학에서 주은래가 공부한 적이 있다고 알고 있다. 남개대학의 창립자인 장백령은 남개대학을 창립했을 뿐아니라, 남개중학, 남개여자중학, 남개소학, 중경남개중학등 남개시리즈학교들을 창립하여, 민국시기 중국 사립학교의 모범이 되었다.

 

장백령은 스스로를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장점이랄 것도 없다. 내가 평생 노력하여 자그마한 성취를 이룬 것은 내가 교욱에 대하여 신앙과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와 일찌기 남개대학을 다닌 적이 있는 주은래간의 이야기도 중공의 당매체에서 계속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옛날 주은래는 장백령에게 제적당한 바 있고 그래서 프랑스로 유학가게 되었다. 신중국건정전에 장백령은 주은래를 잘못 믿어, 대륙에 남는 것을 선택하고 대만으로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우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몇몇 아들도 문혁때 박해를 받아 죽고 만다.

 

1876년 천진에서 태어난 장백령은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에 입학하여, 구미의 과학기술과 문화지식을 배운다. 조업후에는 해군에 들어가 근무했고, 해군으로 중국을 강대하게 만들고자 했다. 청일전쟁은 장백령의 '해양구국'의 꿈을 깨트려버린다. 그는 천진으로 돌아가 교육사업에 종사하겠다고 결정한다. 그의 한 조선 친구의 평가에 따르면: "장백령은 아주 간단한 사람이다. 동시대의 걸출한 인물들과 장단을 겨룰 수는 없다. 다만 그는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고, 그의 업무범위내에서의 성취는 비범했다." 이 업무범위는 바로 "교육"이다.

 

천진으로 돌아온 후, 장백령은 먼저 귀주학정(貴州學政), 즉 오늘날의 직위로 보면 교육감을 맡았던 고향사람 엄수(嚴修)의 가숙(家塾)에서 선생으로 수학, 이화(理化)과 영어를 가르쳤다. 이건 당시로서는 큰 뉴스였다. 장백령은 강의하는 외에 학생들과 함께 축구도 하고 함께 카드게임도 즐겼다. 학생들을 데리고 교외로 자전거를 타고 놀러가기도 했다. 그러나, 엄수와 교육이념이 맞고, 교육구국의 뜻을 가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1904년 가숙을 경업중학당(敬業中學堂)으로 바꾼다. 양무를 주창하던 직예총독 원세개(袁世凱)도 시찰을 온 후 크게 만족하여 5천냥백은을 출연하여, 학교를 설립하도록 돕는다. 1906년 엄수는 남개와(南開洼)에 부지를 사서 학교를 짓는다. 이름은 남개중학이라고 하고, 장백령이 감독(즉 교장)을 맡는다.

 

남개중학은 서양식교육을 했다. 장백령의 경영하에 양호한 학풍이 유지되었다. 교사들이 강의를 열심히 했을 뿐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엄격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과외활동도 풍부하여,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때의 남개중학은 적지 않은 부호2세, 관료2세들이 다녔다. 부호자제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유행으로 여겼다. 매번 방학을 끝내고 돌아오면 훈육과에서는 학생들의 손가락이 노랗게 변했는지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냄새가 나는지를 검사하곤 했다. 한번은 한 학생이 장백령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우리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시는데, 당신은 왜 담배를 피우시나요?" 장백령은 할 말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담배를 꺼내서 잘라버리고 말한다: "나도 안피우겠다. 너희도 피우지 말라!" 그후로 그는 평생 담배를 손에 대지 않는다.

 

자료를 보면, 장백령은 학생들을 매우 사랑했다. 그는 새벽에 학생들의 세면실로 가서, 농촌에서 온 학생들에게 칫솔과 치약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자주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식사했다. 거기에는 집안이 부유하지 못했던 주은래도 포함되어 있다.

 

남개중학에서 장백령은 엄격하게 황색소설을 금했고, 학생들이 기원(妓院)을 드나드는 것도 금했다. 그리고 기원이 많은 길거리에는 사람을 보내 순찰하기까지 했다. 학생이 아무런 정당한 이유없이 교외에서 숙박하면 반드시 행적을 상세히 보고해야 했고, 심지어 학교의무실에서 검사까지 받게 했다.

 

이처럼 엄격한 관리제도로 남개대학은 명성을 널리 떨친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여기에는 양계초(梁啓超), 풍옥상(馮玉祥), 단기서(段祺瑞), 원세개, 황흥(黃興), 호적(胡適), 섭성도(葉聖陶), 장자충(張自忠), 추도분(鄒韜奮)같은 명사들도 안심하고 자녀를 남개중학에 보냈다. 일부 학생들은 동남아국가에서 오기도 했다. 수십년간 학생은 근 천명으로 발전한다.

 

남개중학은 백년동안, 각분야의 과기원사(소수의 외국원사 포함)가 60여명에 이르고, 그중에는 국민정부 원사가 된 매이기(梅貽琦), 도맹화(陶孟和), 오대유(吳大猶), 전사량(錢思亮), 은굉장(殷宏章)등이 있다.

 

남개대학 창립

 

1917년 8월, 장백령은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사범학원으로 가서 연수를 받는다. 다음 해 4월, 엄수도 미국으로 시찰을 떠난다. 두 사람은 미국과 캐나다의 각급학교를 고찰하고, 그 교육체계를 상세히 조사하며, 여러 교장과 교사들을 만난다. 동시에 교육과 관련한 시설들 예를 들어 도서관, 박물관, 교육행정관리기구등도 살펴본다. 이렇게 남개대학을 창립할 준비를 한다.

 

귀국후, 엄수, 장백령의 앞에 놓인 최우선임무는 남개대학의 설립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엄수년보> 및 <장백령년보장편>에 따르면, 1919년 5월, 엄수, 장백령 두 사람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천진, 북경, 태원, 보정, 남경등지를 다니면서, 각 군정요원들을 만난다. 결국 남개대학은 서세창(徐世昌), 여원홍(黎元洪), 이순(李純), 염석산(閻錫山), 양사이(梁士詒)등이 돈을 냈다. "5.4운동"때 학생들에 의해 저택이 불탄 조여림(曹汝霖)은 바로 남개대학의 교동(校董, 학교이사회 구성원)이었다.

 

자금모집외에 장백령은 양호한 교수를 초빙하는 것도 대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찌기 미국시찰때, 그는 일부 미국유학생들을 남개대학의 교수로 초빙했다. 그후에 전국각지의 유명대학에서도 교수를 초빙하며, 양호한 대우를 약속한다.

 

여러 방면의 준비를 거쳐, 남개대학이 1919년 9월 정식 개교한다. 주은래를 포함한 96명의 학생들이 입학한다. 문과, 이과, 상과의 3개 과를 두었고, "과정, 교과서, 실험, 실험기기, 실험용지렁이도 모두 미국에서 왔다."

 

그외에 교무관리에서, 장백령은 교수들의 의견을 아주 존중했고, 그는 "교무공개, 책임분담, 사생합작"의 학교방침을 정한다. 남개대학이 설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생교무연구회(師生校務硏究會)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교수들에게 의견을 듣는다. 나중에는 다시 사생의견서를 인쇄하고, 의안, 이유, 방법등의 항목을 나누어 정기적으로 교수와 학생들이 학교운영에 적극적으로 건의하도록 했다. 그후에 나누어 토론하고, 빠르게 시행했다. 교수들이 더욱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남개대학은 기구가 단순하고, 업무효율이 높았다는 것이다. 행정인원들은 일처리를 잘했다. 그리하여 남개대학으로 오는 교수들중 유명한 학자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자신에 대하여도 장백령은 엄격하게 요구했다. 남개중학에서 그는 교장으로서의 급여만 받았다. 대학이 설립된 후, 그는 대학에서 추가로 3,40원을 더 받았다. 이 금액은 당시 대학졸업생 급여의 1/2이었다. 그는 매번 북경으로 출장갈 때면 학교돈을 아끼기 위해 항상 전문(前門)밖의 보통객잔에서 머물렀는데, 하루 숙박비가 1원이었다. 출연받은 돈을 그가 사적으로 챙긴 일은 없었다. 장백령이 열심히 근검하며 학교를 운영하여 그는 높은 명성을 얻는다. 1919년 11월, 상해성요한대학은 그에게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수여한다.

 

그러나, 장백령은 서방의 연극을 받아들여, 학생들과 함께 배우로 출연하여, 사람들에게 '사림의 전통'을 망가뜨리고, '사도존엄(師道尊嚴)'을 위배했다는등의 비난도 받는다. 그외에 지나친 서양식교육으로 중국전통교육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많았다.

 

비판을 받고나서, 장백령은 다시 중국교육의 방법을 고민한다. 어떻게 서양식교육을 중국에서 활용하고, 서양식교육으로 중국의 일을 해낼 수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실업흥학(實業興學)의 노선을 발전시킨다. 1928년 장백령은 <남개대학발전방안>을 내놓는다. 거기에는 "토화화(土貨化)"방침을 제기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실용과정을 개설한다: 강연술, 사무실관리, 상품판매학, 광고학등등. 당시 화공(化工)은 천진의 지주산업이었다. 장백령은 남개대학내에 응용화학과를 설치하고, 연구성과를 무상으로 관련공장에 제공했다. 멀리 운남의 공장에서도 남개대학에 도움을 구했다.

 

이런 실업흥학의 노선으로 1920년대후반, 남개대학은 더욱 명성을 떨친다. 이는 남개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만든다. 그러나, "돈버는 것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실업흥학'은 다시 장백령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만든다.

 

사립대학인 남개대학은 당시 학비가 아주 비쌌다. "1학년 90대양, 기타비용까지 합치면 1년에 120대양이다. 이는 중등수입가정의 4,5년 수입이고, 일반인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북경대학은 1년에 30대양이었다." 그러나, 남개대학의 장부는 완전히 공개되었고, 도서관에 놓아두어 아무나 살펴볼 수 있었다. 장백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구든 그 달의 항목를 알고 싶어한다면, 자신이 5분내에 다 말해줄 수 있다고.

 

당연히, 남개대학의 수입은 학비를 제외하고, 장개석이 영도하는 국민정부의 지지와 자금지원을 받았다. 1930년 12월 24일, 장백령은 남개대학의 보조금을 받기 위하여, 처음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등을 만난다. 장개석은 시원스럽게 응락한다. 1932년부터, 국민정부는 남개대학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매년 6.2만원이었다. 1934년에는 14만원에 교육부의 보조금 4만원이 추가된다. 하북성교육청도 6천원을 보조한다. 합계 18.6만원을 보조금으로 받는다. 그때 남개대학의 1년수입은 40만위안을 넘지 못했다.

 

나중에 남개대학이 내천(內遷)한 후에도 장개석등 국민당 정부요인들은 계속 자금을 출연해주었다. 장개석 개인이 5만원을 출연했고, 행정원장 공상희(孔祥熙), 사천성주석 장군(張群), 제7천구사령관 유상(劉湘)등도 돈을 출연했다.

 

장백령이 남개대학을 성공적으로 창립한 후, 1923년, 남개여중을 설립한다. 같은 해 대학도 남중 교지에서 팔리대(八里臺)로 이전한다. 1928년 남개소학이 설립된다. 이렇게 하여 남개는 4개의 계열학교를 가진 사립학교로 성장한다.

 

전쟁중의 남개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과 천진이 함락된다. 남개대학 캠퍼스는 일본공군에 의해 7워 ㄹ29일 공습을 받아 파괴된다. 항간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 일본군이 남개대학을 부순 것은 "남개(南開)"가 "남쪽으로 전개한다" 즉 제왕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일본군은 남개대학을 평지로 만든 후, 기자회견을 연다. 당시 장백령은 남경에서 장개석에게 경제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남개대학이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백령은 비통해 마지 않는다. 8월 1일, 당시 국민정부 주석이던 장개석은 평진교육학술계의 인사들 장백령, 장몽린(蔣夢麟), 호적등을 만난다. 장백령은 이렇게 말한다: "남개는 이미 일본군에 폭탄에 불탔다. 나의 수십년노력이 끝장났다. 다만 국가에 방법이 있어서 계속 싸울 수 있다면 나는 가장 먼저 손을 들어 찬성하겠다. 국가에 방법이 있다면, 남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남개를 세우면 된다." 장개석은 장백령을 위로했다: "남개는 중국을 위해 희생한 것이다. 중국이 있으면 남개도 있다." 이 약속은 나중에 장백령이 장개석에게 경비지원을 요구할 때면 항상 꺼내는 말이 된다.

 

그후 장백령은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이 이번에 남개를 폭파시켰다. 부서진 것은 남개의 물질이다. 그러나 남개의 정신은 이로 인하여 좌절하지 않고 더욱 분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번 남개가 물질적으로 입은 피해는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다. 더욱 대학창립의 일관된 정신을 유지하여, 다시 남개를 위해 새로운 생명을 수립하겠다. 본인은 이런 정신으로 절대 기죽지 않겠다. 단기간내에 새로운 규모로 세울 것으로 믿는다. 지금 이미 남경에 남개판사처를 설립했다."

 

얼마 후, 남개대학은 명을 받아 장사로 이전한다. 청화대학, 북경대학과 공동으로 장사임시대학을 만든다. 나중에 곤명으로 가서 다시 저명한 국립서남연합대학을 만든다. 남개중학은 중경으로 옮겨가서, 장백령 교장이 1936년에 이미 건설해 놓은 중경남유중학(重慶南渝中學)에 병합시켜 전시학교체제를 구성한다. 1938년 남유중학은 중경남개대학으로 개명한다.

 

이때, 장개석과 국민정부는 마찬가지로 장백령을 도와준다. <대사지대(大師之大): 서남연대와 사인(士人)정신>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비상의 지원외에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장개석은 두번 남개중학을 참관하고, 5번 장백령을 방문한다. 그리고 남개중학의 운동장을 빌려 열병식을 거행했다.

 

1942년, 장백령이 병을 앓자, 장개석이 직접 병문안을 온다. 1944년 1월, 국민정부는 장백령이 평생 교육사업에 종사한 것을 치하하기 위해 1등경성훈장(景星勳章)을 수여한다. 장백령은 항전기간 어떤 때이건 모두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명했다: "장개석은 전국의 항일영수이다." 그는 1941년 국민당에 가입한다.

 

그러나, 그때 남개의 학생들은 분열되기 시작한다. 혹은 군대에 들어가 항전하고, 혹은 서구로 가서 공부하고, 혹은 관망하며 방황하고, 혹은 중공에 가입한다. 적지 않은 남개의 학생들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 예를 들어, 국민정부 공군에서 희생된 남개의 교우는 기록상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 7명이다. 그중에는 장백령의 넷째아들 장석호(張錫祜)도 포함된다.

 

항전후의 남개

 

항전승리후, 1946년, 천진남개중학과 남개여자중학(나중의 제2남개중학)은 천진에서 학교를 다시 연다. 중경남개중학은 중경에서 계속 운영된다. 항일전쟁기간 남계계통이 위탁받아 운영한 사천자공촉광중학(四川自貢蜀光中學)은 남개의 자매학교가 된다.

 

남개대학은 캠퍼스가 일본군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항전승리후 장백령은 다시 돈을 모아 재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46년 국민정부 교육부에 의해 국유로 귀속된다. 1946년 4월, 장개석은 직접 남개대학을 국립대학으로 변경하는 문서에 서명한다. 이는 장개석이 장백령에게 약속한 것을 이행한 것이었다: 이 대학은 1937년 7월 29일-30일 천진에서 일본중국침략군대에 의해 무너진 것에 대한 보상이다. 동시에 3개학교의 복교경비예산을 확정한다. 이전비 70억원, 건물재건비 30억원(북경대학 10억원, 청화대학 12억원, 남개대학 8억원)

 

1948년 여름, 장백령은 국민정부 고시원 원장이 된다. 그러나 얼마 후 사임한다.

 

장백령과 주은래

 

주은래는 1913년 가을 남개중학에 입학한다. 입학후, 학습과 과외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교동 엄수에게 인정을 받는다. 엄수는 주은래의 가정이 곤란한 것을 보고 학비를 면제해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주은래는 당시 남개중학의 유일한 학비면제생이었다. 재학기간동안, 장백령은 자주 주은래등을 자신의 집에 불러 식사를 같이 했다.

 

1917년 6월 주은래가 졸업한 후, 엄수와 장백령등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을 간다. 1919년 9월, 남개대학이 성립되기 전에, 주은래는 엄수의 부름을 받아 귀국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남개대학 제1기 학생이 된다. 그러나, 그때의 주은래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더 이상 공부에 전력을 쏟지 않고, '폭력혁명'의 길을 걸었다. 1920년초, 학생항의활동을 조직하여 주은래등 4명이 천진당국에 체포되고, 감옥에 반년간 갇힌다. 석방후 북양정부 교육부는 남개대학에 주은래등의 학적을 제적시킬 것을 명령하고, 주은래의 행위에 찬성하지 않았던 장백령은 교육부의 명령을 받아들인다.

 

남개대학에서 제적된 주은래는 그후 엄수의 자금지원하에 프랑스유학을 떠난다. 주은래는 엄수의 학문에 정진하라는 바램을 어기고 프랑스에서 중공에 가입하고, 중공유럽지부활동을 주재한다. 그리고 중국프랑스유학생들이 중국주프랑스영사관, 리옹대학등에서의 폭력활동을 주도한다. 이때부터 주은래의 운명은 중공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한다.

 

8년후, 주은래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다. 그리고 계속 중공혁명에 참가하고, 행적이 아주 신비했다. 십여년간, 장백령과는 교류가 끊긴다.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후, 장백령은 남개학교의 자금모집을 위해 무한, 중경에 있던 주은래와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다. 국공내전기간동안 쌍방의 연락은 다시 끊긴다.

 

주은래를 믿고 대륙에 남았다가 우울하게 죽는다.

 

1949년 11월, 중공군대가 중경으로 진입할 때, 장백령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장개석은 2번이나 중경남개중학으로 가서 장백령에게 미국으로 가라고 권한다. 장개석은 이런 말도 한다: "장선생이 가겠다고만 하면, 어떤 조건이든 모두 받아주겠다." "대만에 가도 좋고, 어디를 가든 생활일체는 모두 내가 방법을 생각하겠다." 장개석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무데도 가지 않겠습니다. 그는 자손들을 남겨두고 갈 수도 없고, 남개학교를 남겨두고 갈 수도 없습니다." 

 

이게 핑계인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전에 장백령은 남대졸업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옛 동창 비비(飛飛)가 교장선생님을 건드리게 놔두지 않습니다." 비비는 바로 주은래가 남개에 있을 때의 필명이다. 장백령은 결국 주은래를 믿었고, 장경국이 제공한 비행기도 거절하고 대륙에 남는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의 일가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처음에 주은래의 보살핌으로 장백령은 잠시 북경으로 가서 거주했다. 차남 장석양(張錫羊)은 장백령에게 ''남개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신정권을 옹호하는 글을 써달라고 요구한다. 장백령은 중공신정권을 좀더 보아야 한다고 했고, "장선생과 결별하고 공산당과 함께 장선생을 욕하는 것은 좀 더 생각해보아야겠다"고 거절한다. 이것이 아마도 공산당에게 냉대받게 된 원인일 것이다.

 

신중국건립후, 사립남개학교는 모두 국유로 귀속된다. 장백령은 1950년 9월 천진으로 돌아온 다음 날, 남개중학을 간다. 그러난 냉대를 받고 쫓겨난다. 그가 남개여중을 갔을 때는 학생들이 그를 둘러싸고 소리쳤다.

 

반세기후, 장백령을 수십년간 연구한 양길생(梁吉生)은 남개대학의 교수아파트에서 이때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백령은 말했다: 나는 신중국에게 버림받았다. 남개는 그가 만든 것이고, 거의 그의 사립학교였다. 너는 알아야 한다. 1947년 그가 외국에서 천진으로 돌아왔을 때, 전체 도시는 길거리에 환영인파로 가득했다. 수천명이 천진동역에 나왔고, 기독청년회는 전체 도시의 종을 모두 쳤다."

 

1950년 10월 17일, 남개중학의 개교기념일이다. 그러나 장백령은 참가를 거절당한다. 그는 낙망하여 의자에 앉아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주은래를 잘못 믿었던 장백령은 아마도 이때 후회하지 않았을까?

 

4개월후, 즉 1951년 2월 23일 장백령은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 <천진일보>에 간단하게 보도한 것을 제외하면, 대륙의 신문잡지에서 그의 죽음에 거의 집단적으로 침묵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의 임종유언은 남개의 선생과 학생이 "자유를 옹호하고, 자유민주의 중국을 건립하며, 독재정권을 막도록 맹세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바램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죽기 전에 이미 중공의 본모습을 본 것이 아닐까?

 

그외에 장백령의 바램은 남개대학내에 묻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남개대학은 인민의 것이지 장백령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리고 조용하게 조문한 주은래는 장백령의 유언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쉽게도 두 가지 말이 빠졌군. 장백령은 반성을 표시해야 했고, 인민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장백령이 병사한 소식을 들은 장개석은 일기에 "통도무이(痛悼無已)"라고 적었다. 3월 31일, 국민당중앙개조위원회는 타이페이에서 장백령을 위해 융중한 추도회를 개최한다. 장개석은 직접 만련 "수정불굴(守正不屈), 다사소종(多士所宗)"을 써서 그를 애도했다. 대만의 남대대학 동창들은 속속 기념집, 추도문을 내어 기념했다. 그후 장백령의 매10년 탄생기념일마다 대만에서는 기념회가 열렸다.

 

장백령이 죽은 후, 그의 가족도 액운을 피하지 못했다. 문혁때, 수학자인 장남 장석록(張錫祿), 상인인 차남 장석양과 삼남 장석조(張錫祚)는 모두 박해받아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운명은 장백령이 주은래를 잘못 믿고 대륙에 남기로 선택한 그 순간에 이미 결정된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