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금(張嶔)
중국 역대왕조의 "마지막 순간"들 중에서, 일찌기 북송의 반벽강산을 무너뜨리고, 남송이 백년간 어르신으로 모셨으며, 중원대지를 차지했던 '대금왕조(大金王朝)'의 멸망전후의 장면은 참혹하여 실로 탄식이 절로 나온다
얼마나 참혹했을까? 먼저 그 이름도 유명한 금나라말기의 대시인 원호문(元好問)의 글을 보도록 하자. 몽골이 남하하기 시작한 후, 한때 천하를 종횡했던 '대금철기(大金鐵騎)'는 계속 패퇴한다. 북방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 재능이 뛰어났던 원호문은 비분하여 금왕조 멸망전야의 보고 느낀 점을 기록했다. 예를 들어, 응주(應州)등지에서는 수년간 지속된 전란에 큰 가뭄까지 겹쳐서, 백성들은 도움을 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거액의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다. 실로 "참참수폐부(慘慘愁肺腑)"라 할 만하다. 그리고, '대금천자'가 있던 변경은 집집마다 양식을 강제수탈당해서, "죽은 자들이 서로를 베고 있고, 가난하건 부자이건 손을 놓고 죽기를 기다렸다(死者相枕, 貧富束手待毙而以)"
원호문의 글에 따르면, 전체 금나라의 경내에서 "인굴초근관자노(人掘草根官煮弩, 사람들은 풀뿌리를 파내고, 관리들은 활을 끓인다)"가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 된다. 즉 풀뿌리와 나무껍질, 그리고 활을 만드는데 쓰인 소가죽까지도 모두 '먹거리'가 된 것이다. 크고 작은 성에서는 "대성만시호(大城滿豺虎), 소성공작서(小城空雀鼠)"의 현상이 나타난다. 각지에는 '도적이 횡행한다' 이런 난상은 금왕조 멸망전야의 모습이다.
1232년에 이르러, 몽골이 대거 금을 공격한다. 위기에 흔들리는 금왕조에도 참혹한 광경이 끊이지 않았다. 쌍방의 주력이 대결전을 벌인 삼봉산대전(三峰山大戰)에서 15만의 금군은 대설 속에서 수일간 행군하였으며 3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하늘에서는 눈이 크게 내리고,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 부족한 금군은 "강동무인색(僵凍無人色)"(몸이 얼어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위의 몽골병은 심지어 한편으로 불을 피워 고기를 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 무리씩 내보내 금군을 공격한다. 이러한 멧돌갈기식의 대전을 거쳐 15만의 금군은 궤멸하고 만다.
금애종이 도성 변경을 포기하고 채주(蔡州)로 물러나서 최후의 저항을 할 때, 원래 몽골이라는 강적 하나를 상대하던 '대금왕조'는 몽골과 남송 양쪽과의 집단싸움에 말려든다.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은 채주를 3개월간 포위공격한다. 채주성은 식량이 바닥났고, 성안의 백성들은 "사람과 가축의 뼈와 제비집을 짓는데 쓰인 진흙으로 배를 채웠다" 채주 주위의 댐을 파괴하여, 성주위는 완전히 물에 잠긴다. 채주성이 함락되기 전날, 금애종(金哀宗)은 슬픔에 잠겨 황위를 원수(元帥) 완안승린(完顔承麟)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다음 날 목을 매어 자결한다. 금애종의 부장인 홀사호(忽斜虎)와 부하 5백명도 그를 따라 자결한다. '즉위'한 완안승린은 얼마 후에 난전 속에 사망한다. 금나라의 몰락은 이런 피비린내나는 장면 속에서 끝이 난다.
이런 일막에 대하여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금나라의 망국이 장렬했다고 탄식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장렬'한 최후의 배후에는 '스스로 죽을 길을 찾은 것'임이 분명하다.
종전에 그렇게 용맹했던 금왕조가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기실 원호문등 명가의 싯구를 보면 금왕조 멸망전의 처참한 민생 속에서 '호사'스러운 장면도 나온다. 비록 '인굴초근관자노'로 관료들 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응주의 귀족들은 여전히 '올올취가무(兀兀醉歌舞)'했다. 변방의 백성들은 '빈부속수대폐'하고 있었찌만, 금애종의 총신인 완안백살(完顔白撒)은 여전히 교사음일(驕奢淫逸)했다. 심지어 여전히 변경의 서성에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있었는데, 규모가 왕실에버금갔다. 금애종이 변경을 포기한 후, 변경을 지키던 금나라관리인 최립(崔立)은 즉시 배반하고 변경을 몽골군에 '바친다'. 그러나 몽골군이 성에 들어와서 한 첫번째 일은 바로 최립의 집안에 있던 금은보화를 모조리 몰수하는 것이었다. 응보가 이렇게 빨리 왔다.
이처럼 '바른 응보'는 그들이 이미 대금왕조가 철저히 부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슬픔에 빠져 목을 맨 금애종은? 기실 금왕조가 멸망하기 전날, 그는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바깥에서는 상황이 급박한데도, 그는 하루종일 가무를 즐겼다. 마치 '금왕조에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끝까지 즐기자는 심정이었던 것처럼. 그의 친척이라 할 수 있는 성국부인(郕國夫人, 금애종의 왕황후의 언니)도 '사치가 더욱 심했고,' '재산을 산처럼 끌어모았다' 금왕조의 관리들이 당시 고민하던 것은 어떻게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성국부인'의 환심을 사서 총애를 받을 것인가였다.
변경을 잃고, 금애종이 채주로 도망쳐 왔지만, 대금왕조의 얼마 남지 않은 땅에서 잠시 안정을 찾은 금애종은 채주성에서 토목공사를 대거 벌여서 궁전인 '견산정(見山亭)'을 건립한다. 심지어 궁녀를 대거 뽑기도 한다. 그러나 궁녀들을 선발하기도 전에 채주는 몽골, 남송 연합군에 포위되어 버린다.
그래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왜 삼봉산대전때, 15만의 금군이 왜 그렇게 옷과 식량이 부족한 지경에 이르르게 되었는지를. 삼봉산대전후 금군의 말연올전(抹撚兀典)이 11만대군을 이끌고 변경으로 구원을 왔을 때, 이 대군은 정예병을 모았을 뿐아니라, 사병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왔다. 이는 최후의 결사전을 벌이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들이 낙양에 도착했을 때, 먹을 것이 부족한 지경에 처한다. 먼저 따르던 노인, 어린이, 부녀자들을 군대가 버린다. 그리하여, "슬프게 울부짖는 소리가 길에 가득했다(哀號盈道)" 그리하여, 원래 결사전을 준비하던 병사들도 배가 고파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전투를 하기도 전에 속속 도망을 친다....
이런 군대라면 설사 완안진화상(完顔陳和尙)같은 영웅이 나타나서 이끈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엉망인 것은 금왕조 몇대 통치자들의 안목이다.
기실, 몽골과 금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금나라는 반드시 대외정책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적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남쪽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남송은 원래 금왕조가 도움을 받을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금선종(金宣宗)때부터, 그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금선종때는 기실 한때 몽골과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성을 잃은 금선종은 머리를 돌려 남송을 공격한다. 남송으로부터 '세폐'를 좀더 올려받아서 군비로 쓸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략적 안목이 부족한 조치는 금방 응보를 받는다. 남송을 이기지도 못하고, 몽골이 숨을 돌린 다음 다시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금애종에 이르러, 이미 손해를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교훈을 얻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금애종이 뭐라고 했는지 보자: "짐득갑사삼천(朕得甲士三千), 종횡강회간(縱橫江淮間), 유여력의(有餘力矣)"(짐에게 삼천의 병사가 있다면, 장강과 회수의 사이를 종횡하는데는 아직도 힘이 남는다). 이미 몽골에 공격을 받아서 엉망진창이 되었으면서도,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은 이기지 못하지만, 남송은 이길 수 있다고? 중원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남송을 점령한 다음에 다시 되돌아오면 된다고?
그리하여 채주로 간 금애종은 한편으로 남송에게 가련한 태도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병사를 모았다. '남송이 준비하고 있지 않을 때 흥원을 쳐서 얻으려고 한 것이다(出宋不意取興元)" 측, 남송의 사천지역을 치려고 한 것이다. 그 곳을 차지해서 버틸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남송을 철저히 몽골편이 되도록 밀어낸 셈이다.
그러므로, 남송이 '연몽멸금(聯蒙滅金)'한 것이 무슨 역사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남송은 원래 멍청한 짓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유독 몽금전쟁때는 끝까지 참았다. 마지막 채주전투때 비로소 '몽골의 편에 섰다' 남송에 있어서, 이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금나라는 남송을 차지하고 말았을 것이다.
엉망진창인 관리, 앞장서서 엉망진창으로 놀았던 통치자,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가는 전략. 금나라 망국전의 이런 모습은 후세인들에게 하나의 교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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