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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공청단(共靑團) 건단 80주년 기념대회의 5가지 특이사항,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는가?

by 중은우시 2022. 5. 12.

글: 악산(岳山)

 

20대까지 반년이 남은 2022년 5월 10일 공청단은 건단80주는 기념대회를 거행했다. 중공의 7명 정치국상위가 모두 참석했고, 시진핑이 치사를 했다. 그런데, 이번 회의는 최소 5가지 심상치않은 모습이 있었다. 아마도 중남해의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첫째, 왕치산이 공청단 대회개최때 외국에 파견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북경청년보>의 계정인 '정지견(政知見)'은 5월 10일 이런 글을 내보냈다. 공청단은 20년동안 3번의 동일한 회의를 개최했는데, 금년에만 의장의 신분이 달랐다.

 

2002년 건단60주년대회때는 당시 정치국상위, 국가부주석 후진타오가 주재했다. 2012년 건단70주년대회는 당시 정치국상위, 국가부주석인 시진핑이 주재했다. 그런데, 금년에는 정치국상위, 중앙서기처서기 왕후닝이 주재했다. 

 

왕후닝이 주재하는 건 말이 되긴 한다. 왕후닝은 중공의 소위 군단조직(群團組織)의 총책임자로 공청단의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중공의 고위층권력분배와 약간 부합되지 않는 점이 있다.

 

현임 국가부주석 왕치산은 원래 지위가 미묘하다. 그는 당직도 없다. 만일 그가 공청단회의를 주재하도록 한다면, 중공의 관례에 부합하지 않는다. 왕치산이 이번에 한국의 대통령취임식에 참석하도록 파견된 것은 역사상 직급이 가장 높은 인물이 참가한 것이다. 그러나, 원래 다른 사람이 참석해도 되었다. 아마도 시진핑이 일부러 그를 멀리 보내버린 것이 아닐까. 국내에 남아 있으면 공청단회의를 주재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여러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이전의 두 차례 대회에서는 당수의 후계자로 선정된 사람이 공청단대회를 주재했다. 이번에는 20대에 은퇴할 예정인 왕후닝이 주재했다. 결국 시진핑은 아직 자신의 후계자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둘째, 20년만에 규격이 가장 낮고, 장소를 바꾸어 거행되었으며, 참석자도 겨우 천명이었다.

 

2002년 건단60주년대회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의 대예당(大禮堂)에서 거행되고, 5천여명이 참석했다. 2012년 건단70주년대회도 역시 인민대회당의 대예당에서 거행되고, 약6천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금년에는 2층의 연회청(宴會廳)으로 바꾸어 개최되었고, 규격이 아주 낮았다. 겨우 약천명이 출석했다.

 

출석인원수가 급감한 것은 한편으로 아마 방역의 필요때문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공청단의 쇠락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최근 들어 중공은 공청단에 문제가 많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공청단대회의 참석자수가 대폭 축소되고, 금년에 전인대와 전국정협회의에 330명이 결석한 것은 역대이래 최고기록이다. 그리고 작년 중공6중전회의 참석자수도 5년만에 가장 적었다. 

 

셋쨰, 시진핑의 치사때 얼굴을 굳히고 있었으며, 암중으로 '광망분자(狂妄分子)'를 비난했다.

 

비록 공청단중앙 제1서기 허쥔커(賀軍科)가 치사때 시진핑을 극력 추켜세워주면서, 시진핑이 "장타영항(掌舵領航)'하고 있으며, 공청단은 '시종 핵심을 옹호하고, 핵심의 최전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허쥔커이 치사를 할 때, 시진핑은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전혀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진핑이 치사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계속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어조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발언내용의 첫부분과 끝부분에 호응을 부르는 식도 아니었다. 이는 지도자들의 연설에서의 통상적인 양식과 달랐다.

 

시진핑의 발언내용에도 새로운 것이 없었다. 그가 언급한 "청년우(靑年友)가 되고 청년관(靑年官)이 되지 말라"는 요구는 기실 9년전에 단중앙이 새롭게 구성되었을 때 집단학습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시진핑이 이것을 다시 언급하면서 공청단은 "광망분자를 배양하여서도 안되고 풍두주의자(風頭主義者)를 배양해서도 안된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듣는 사람들의 귀에 많이 거슬렸다.

 

시진핑이 권력을 잡은지 10년이 되었고, 공청단 간부는 이전 30년간처럼 중용되지 못했다. 시진핑이 취임한 2년후, 계속하여 그가 공청단을 비판하는 말이 나왔다. 무슨 '고위절탄(高位截癱)', '후계자가 되겠다고 환상을 품지 말라'등등. 중공중앙순시조도 공청단에 '기관화, 행정화, 귀족화, 오락화'등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링지화등 공청단계통출신의 고관들이 속속 낙마하여, 공청단중앙의 지위가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중 링지화는 당국에 의해 '야심가'로 규정되었다.

 

넷째, 시진핑은 공청단이 돌격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방군의 신분은 없어졌는가?

 

공청단중앙 출신의 관리들은 과거에 항상 '후계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얼마전 공청단성립대회에서 비록 공청단이 "당의 충실한 조수이며 믿을만한 후방군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다시 공청단은 돌격대, 소선대(少先隊)는 후방군이라고 말했다.

 

<명보>는 이렇게 평론했다. '후방군'이 '돌격대'로 바뀌었다. 다시 한세대를 뛰어넘어 '소년선봉대'가 진정한 '후방군'인가?

 

관방자료를 조사해보면 알 수 있다. 중공은 공청단에 대한 포지셔닝을 20년전에는 공청단의 단장(團章)에 '당의 조수' '후방군' '돌격대' '후계자'등이 용어가 나온다. 2013년 공청단17대에 단장을 수정하였지만, 이 용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18년 6월의 단장수정때 용어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그중 한 곳의 '후계자'를 '청년'으로 고쳤다.

 

당연히 공청단이건 소선대이건 모두 거짓말로 학생들을 끌어들여 가입시켰다. 2015년 9월 22일, 공청단중앙은 다시 한번 "공산주의후계자가 되자"는 구호를 내놓았을 때, 대륙의 부동산업계의 저명인사인 런즈창(任志强)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반박당한 바 있다. 런즈창은 웨이보에서 "나는 이 구호에 십여년간 속아왔다"고 말했다. 그후 그의 글은 삭제된다.

 

당시 공청단중앙 서기처서기를 맡고 있던 허쥔커도 2017년 3월 인터뷰때 공청단은 현재 이익을 가지고 청소년들을 가입시킨다고 인정했다. 예를 들어, '연애를 가르치거나' 급여높은 직장을 찾아준다거나. 이는 아무도 공산주의를 정말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섯째, 주석단의 공청단출신의 정치국상위의 표정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번 공청단회의에 출석한 현임 중앙정치국위원 7명 중에서 최소 5명은 공청단 간부를 지냈다. 총리 리커창은 단중앙제1서기를 지냈고, 전인대위원장 리잔슈는 허베이성단위서기를 지냈으며, 정협주석 왕양은 안후이성단위부서기를 지냈고, 중앙기율검사위서기 자오러지는 칭하이성상업청단위서기를 지냈으며, 부총리 한정은 상하이시단위서기를 지냈다.

 

CCTV 뉴스화면을 보면, 주석단의 고위직들의 모습이 괴이했다. 허쥔커가 치사에서 시진핑을 추켜세울 때, 리커창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리잔슈는 수시로 눈을 감고 폐목양신하는 모습이었으며, 왕양은 눈썹을 찡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기고, 한정과 자오러지는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유지했다. 시진핑이 말할 때 다른 상위들의 표정은 역시 자연스럽지 못했다.

 

1980년이래, 공청단출신의 간부들은 관료사회에서 잘 나갔고, 세력도 커졌다. 최초는 당시 중공총서기 후야오방으로 단중앙제1서기출신이다. 그리고 리뤼한, 후치리, 왕자오궈, 후진타오등 단간부들이 대거 고위직에 올랐다. 후진타오도 마찬가지로 단중앙제1서기출신으로 최고지도자에 오른다. 소위 '단파'라는 말은 여기에서 기원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시진핑이라는 홍얼다이가 취임한 후 바뀌게 된다. 공청단 출신의 전 중앙판공실주임 링지화, 전 국가부주석 리위안차오, 두 사람은 중공18대때 시진핑의 취임을 방해한 바 있고, 나중에 링지화는 낙마하고, 리위안차오는 일찌감치 은퇴한다. 지난기의 단중앙제1서기인 친이즈(秦宜智), 2기에 걸쳐 단중앙상무서기를 맡은 자오용(趙勇), 양웨(楊岳)은 한직을 맡았고, 일반적인 단간부들도 더 이상 예전같이 잘나가지 못했다.

 

당연히 리커창과 왕양, 저우창, 후춘화, 루하오같은 옛날의 공청단간부들은 여전히 고위직에 머물러 있다. 다만, 기본적으로 시진핑에 대하여 충성을 표시하고서 평안을 얻은 것이다. 예를 들어, 왕양은 최근 들어 자주 시진핑을 높이 추켜세운다. 저우창도 법치방면에서 당중앙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설사 샨시천억광업권사건에서 문제가 생겼지만,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리커창은 수시로 시진핑과 다른 입장을 보이지만, 주로 직무상의 필요에 따른 것이고, 시진핑의 적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현임 부총리 후춘화는 계속 시진핑의 말을 잘 들으면서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시진핑의 이번 발언후, 어떤 사람은 그가 공청단을 접수하려 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기실 시진핑은 2016년에 공청단에 대한 정돈을 선언했고, 단중앙의 여러 간부들은 다시 하층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2017년 9월 20일에는 친이즈의 단중앙제1서기직을 면직시켰으며, 2018년 6월이 되어서야 허쥔커가 넘겨받는다. 시진핑은 이미 정식으로 공청단을 접수한 것이다.

 

허쥔커는 시진핑의 고향인 샨시 펑샹(鳳翔) 사람이다. 1969년 2월생으로 군공(軍工)을 배경으로 한다. 2005년 단중앙에 들어왔고, 단중앙 서기처 서기를 맡았다. 2018년 6월에 제1서기로 승진한다. 소문에 따르면, 허쥔커의 가족은 시진핑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당시 15살의 시진핑이 시골인 량자허로 내려갔을 때, 허쥔커의 할아버지가 시진핑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허쥔커는 친이즈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단중앙제1서기의 위치에서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는 지방에서 재직한 바 없다. 설사 다음번에 지방에 낙하산으로 내려가더라도, 나이로 보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단파는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견해도 있다. 시진핑의 이번 발언은 중공20대전에 '단파'를 끌어들이고, 경고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청단계통 전체에 경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파'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재미학자 허칭롄은 일찌기 중공관료사회에 실제로 '단파'는 형성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공청단계통은 한때 중공이 후계자를 배양하는 기지였다. 담나 단중앙이 단간부를 보살펴주면서 발탁하지만, 왕왕 그들은 단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후 거기서 끝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더 이상 단중앙과 이익유대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리커창, 리위안차오, 링지화 3 사람은 모두 공청단계통출신이다. 다만 3 사람간에는 서로 연결이 없다. 게다가 그들의 공통된 보스인 후진타오는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으고 권력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 관리들을 정치적 방파로 부르기는 약간 억지스러운 점이 있다고 본다.

 

필자는 단파는 하나의 방파가 되지 못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만일 후진타오가 방파를 만들 결심을 했다면, 자신의 대내총관 링지화가 스스로 일파를 만들어 우두머리가 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관찰가들은 소위 '단파'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는 '장쩌민파'로 불리는게 더욱 적합한 사람들이 많다고 본다. 예를 들어 전 광둥성단위서기로 전 광저우시위서기를 지낸 완칭량(萬慶良), 그는 리창춘과 장더장이 만든 장쩌민파의 '광둥방'의 인마이다. 그는 일찌기 제양의 서기로 있을 떄 석유화학업을 발전시켜 저우용캉의 아들인 저우빈의 노선을 탔다. 단파의 거물로 불리는 링지화의 서산회에도 적지 않은 장쩌민파의 인물들이 있다.

 

일찌기 광둥성단위서기를 맡았고 나중에 장시, 내몽골에서 관료생활을 한 판이양(潘逸陽)은 장쩌민파의 전 정치국상위 우관정(吳官正)의 심복이다. 일찌기 산시공청단계통에서 16년간 일한 허베이성 전성위상위, 조직부장 량빈(梁濱)의 뒷배경은 장쩌민파의 전 정치국상위 자칭린(賈慶林)이다. 한정은 비록 상하이시단위서기를 지냈지만, 공인된 장쩌민의 심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