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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심리

포용(包容)은 인생의 경지이고 처세의 책략이 아니다.

by 중은우시 2022. 4. 21.

글: 안순구(顔純鉤)

 

어떤 네티즌이 인터넷에 글을 올려서, 여자친구와 애국문제로 서로 싸워서 기분이 좋지 않으며, 앞으로 둘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네티즌이 그에게 댓글을 달아서, 서로 다른 정치입장에 대하여 마땅히 포용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의 핵심은 서로 다른 의견을 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문답을 보고, 그 네티즌이 심히 걱정되었다. 나중에 여자친구와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모르겠다.

 

서로 다른 의견을 포용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것인지, 어떤 문제에 대한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 상대방의 출발점이 어떠한지, 상대방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한다. 포용은 일방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서로간에 포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 포용할 수 있다. 너는 편집증적인 사람에 대하여 포용해줄 수가 없다. 네가 상대방을 포용한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입장을 양보해야만 이뤄지게 되기때문이다.

 

네가 중공을 포용할 수 있는가? 캐리람(홍콩현임행정장관), 존리(홍콩현정무사장, 차기행정장관)를 포용할 수 있는가? 반대로 홍콩공산당이 홍콩사람의 정치적인 이견을 포용해줄 것인가?

 

상호포용의 전제는 서로 이치를 따지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 따르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이치를 따지지 않거나,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성하려 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포용할 방법이 없다. 네가 스스로의 입장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따르지 않는 한. 이 지경에 이르면 그건 포용이 아니라. 그저 구차(苟且)일 뿐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는 이치에 밝은 사람이고, 다른 한종류는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는 아집을 고집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종류는 스스로를 잘 되돌아보는 사람이다.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무서울 것이 없다. 무서운 것은 이치를 모르면서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뇌가 없는 사람이 고집스럽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바굴 것이다. 이런 사람은 부지런히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가면 계속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치를 모르면서도 자만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신선이 와도 구해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천하에게 가장 나쁜 두 가지 결점을 모두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인생문제에서 모든 사람을 자신과 같이 생각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어떤 관계는 바꿀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부모관계, 형제자매관계, 처자식과의 관계. 이런 관계는 일생을 함께 한다. 벗어날 수가 없다. 이렇게 운명에 의해 정해진 관계에서 조화되지 못하는 입장차이가 나타나면, 너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이해하고 양해하려고 해야 한다. 그런 상황일 때 포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외에 친구, 동료, 이웃등 사회관계는 모두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만나고 헤어질 수 있다. 반드시 억지로 일치시킬 필요가 없다. 서로 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로 이성을 가진 것이다. 입장에 차이는 있지만, 그게 치명적이 되지 않는다. 정말 극단으로 가더라도 기껏해야 서로 헤어지면 그만이다.

 

포용은 민주의 최종의의가 아니다. 민주는 서로 다른 의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의견에 구차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사회에도 모순투쟁은 있다. 어떤 때는 잔혹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모순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순과 투쟁을 평화롭게 공존하는 범위내로까지 끌어들이는 것이다. 반드시 상대방을 없애야 해결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부모, 형제자매, 처자식과의 모순이나 충돌은 해결되면 좋은 것이고, 해결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골육관계를 해소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신문에 성명을 내서 가족관계가 해제되었다고 성명을 낸다. 이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일 수 있다. 이를 보면 포용은 최고원칙이 아니다. 최고원칙은 진리이다. 진리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간에 서로 포용하는 것은 포용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지를 보아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보아야 한다. 포용의 결과로 컨센서스를 이룰 수있을지를 보아야 한다. 만일 잠시의 포용은 그저 문제를 잠정 덮어둘 뿐이고, 두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은 영원히 충돌한다면, 결과는 바로 네가 이 문제를 포용했지만, 모순과 갈등은 다른 문제에서 폭발해버릴 것이다.

 

인생은 길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서로 남원북철(南轅北轍)로 다르면, 충돌이 언제든지 발생한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영원히 그녀를 포용해줄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서로 알아가는 단계일 때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면, 관계를 잘라도 늦지 않다. 지금 자르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잘라야 한다. 어쨌든 잘라야 한다. 차라리 일찌감치 잘라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일야부처백일은(一夜夫妻百日恩)이라는 말이 있다. 어찌 백일뿐이겠는가. 백년간 생사를 함께 해야 한다. 사람들은 부부간에 정투의합(情投意合)해야 하는데, '정투'는 쉽지만 '의합'은 어렵다고 한다. 정투(감정)가 맞는 것은 의합(의지)이 맞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래서 정식 부부가 되기 전에 서로간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살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포용을 최고원칙으로 삼다가는 자신의 일생을 그르칠 수 있다.

 

당연히 현대사회는 이혼이 다반사이다. 맞으면 같이 살고 맞지 않으면 헤어진다. 젊은이들은 아마도 결혼하기 전에 이혼부터 생각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혼인은 인생의 대사이고, 절대 쉽게 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간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깊이 따져보지도 않고서.

 

반송중운동때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정치적입장에서 부모와 달라 일반사람들보다 더욱 큰 정신적고통을 느낀 경우가 많았다. 이는 방법이 없다. 그저 스스로 직면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자주 젊은 한쌍이 손에 손을 잡고 항쟁의 제일선에 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어찌 되었건 일단 관계가 확정되기 전에 상대방이 이미 뇌는 없고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인다면, 너에게 있어서 그것은 포용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포용은 인생의 경지이다. 처세의 책략이 아니다. 어떤 일은 포용할 수 있지만 어떤 일은 그럴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포용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포용은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어떤 때는 심지어 포용하지 않는 것이 옳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