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광고사(時光故事)
예로부터 지금까지, 세월이 흘러도 용모가 노쇠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많은 여인들의 갈망이다.
오늘 얘기할 주인공은 천생여질(天生麗質)의 미인으로 환갑의 나이에도 여전히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그녀의 미모가 그녀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비극적인 운명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그녀는 바로 "상해탄제일미녀"라고 불리우던 장매영이었다. 그녀는 바로 "미려(美麗)"브랜드 담배의 모델이기도 했다.
강소, 절강은 자고 이래로 미녀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장매영은 1913년 절강성 진해(鎭海)의 한 부유한 상인집안에서 태어난다. 부모는 모두 비교적 개명한 사람들이어서, 당시 사상이 수구적인 사람들처럼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장매영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했고, 재능이 있었으며, 용모도 뛰어났다. 그녀를 앙모하는 사람들이 문앞에 줄을 서서 그녀의 미모를 한번 보려고 할 정도였다.
하루는 장매영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남자가 계속 뒤를 쫓아왔다. 문앞에 이르자, 그 남자는 앞을 막아선다.
원래 이 남자는 장매영에게 모델을 제의하려는 것이었다. "미려"브랜드의 담배의 선전화를 찍고자 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그냥 사진만 몇장 찍으면 되고, 그러면 명성을 떨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그녀는 호기심에 상해로 가서 '미려'브랜드의 모델사진을 찍는다. 장매영이 모델을 한 미려브랜드담배가 출시되자 인기리에 팔리게 되고, 심지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이 미인화를 소장하기 위해 담배를 살 정도였다.
당시 미려브랜드담배는 상해화성연초공사(上海華成煙草公司)에서 생산했고, 장매영을 모델로 하는 외에 담배갑에는 수호전의 108명의 호한의 그림도 한장씩 그려놓았다. 108명의 그림을 모두 모으면 황금2냥을 받아갈 수 있었다.
이런 마케팅전략으로, 미려브랜드담배는 인기를 끌게 되고, 상해탄에서 최고로 잘 팔리는 담배가 된다. 장매영의 미모도 담배가 인기리에 팔림에 따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심지어 국민당 특무국장 대립(戴笠)까지도 상해로 올 때마다 장매영을 그의 댄스파트너로 지명할 정도였다.
인기를 글게 되니, 그녀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들은 각종 수단을 써서 장매영과 만나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미친 듯한 거동과 행동들에 장매영은 불편함을 느끼게 되어,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하루빨리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금방 장매영은 성실한 주군무(周軍武)를 만난다. 그녀는 바로 마음이 동하고, 두 사람은 취미도 같았으며 공동의 화제가 있었다. 둘은 금방 사랑에 빠졌고, 자연스럽게 혼인에 골인한다. 결혼후 장매영은 1남1녀를 낳고, 남편과 자식들을 돌보면서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시간은 흘러 1971년이 되었다. 장매영은 이미 58세이다. 남편 주군무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자녀들도 모두 성인이 되어 다른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장매영은 혼자서 상해 연안서로의 20여평방미터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자녀들은 모친이 다시 좋은 인연을 만나 노년생활에 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장매영은 사랑은 하나뿐이라며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당시의 장매영은 비록 환갑의 나이이고, 남편을 잃은 고통을 겼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녀의 용모는 마치 하늘의 보살핌을 받은 것인지 세월이 흘러도 그녀의 얼굴에 그다지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성숙한 여성의 특유한 우아한 매력이 넘쳤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소녀처럼 탄력이 있었고, 그녀의 손동작이나 걸음걸이도 세월로 닦여진 우아한 기질을 드러내어 더욱 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장매영의 용모를 이렇게 평했다; 그녀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데, 의사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은행에 돈을 예금하러 갔는데, 은행원이 그녀의 얼굴에 시선이 꽂히더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1974년, 이미 61세가 된 장매영은 야채를 사러 외출했다. 그런데 그때 한 젊은 상해의 공안(公安) 주영학(周榮鶴)을 만나게 된다. 주영학은 26살이었고, 군대에서 퇴역한 후, 장녕공안분국(長寧公安分局)의 강소로파출소(江蘇路派出所)로 배치받아 호적을 담당하는 경찰이었다.
당시 상사인 손발의(孫發儀)는 주영학을 데리고 관할지역의 상황을 소개해주고 있었는데, 그가 장매영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저 여자가 바로 민국시기 미려브랜드 담배의 모델인 장매영이다"
무심하게 던진 이 한 마디와 그녀의 뒷모습은 주영학의 뇌리에 깊이 박힌다. 결국 주용학은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는 문을 열고나서 주영학이 경찰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자 경계를 늦춘다. 주영학은 자신을 소개하고난 후에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장매영의 여러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내용을.
장매영은 처음에는 잘 응대했다. 공안이 찾아왔으니 최대한 협조한 것이다. 설사 주영학의 말이 좀 부적절하기는 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협조해주고, 예의를 차려서 나가달라고 말한다.
주영학은 장매영의 치파오에 가려진 풍성한 몸매를 보고서 일찌감치 나쁜 생각을 품었다. 그는 장매영을 끌어안고 강제로 키스를 한다. 그러나 장매영은 그를 밀쳐낸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주영학은 황급히 도망친다. 문을 나서면서 한 마디를 던진다: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후로 주영학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못된 행동은 장매영이 오랫동안 잊지 못했고, 자신이 모욕을 당하였다고 생각하여 침중한 심리적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나중에 아들 주덕안(周德安)이 모친을 만나러 왔을 때, 장매영은 결국 그 일을 아들에게 얘기한다.
아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978년, 즉 사건발생후 4년이 지나서, 장매영은 고발장을 써서 주영학이 일하는 장안분국으로 보낸다.
고발장을 받은 장안분국은 아무런 처리도 하지 않고, 그 고발장은 그대로 묻어둔다. 주영학은 이때 공안계통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974년 장매영에게 몹쓸 짓을 한 9년후에 주영학은 말단의 호적담당경찰에서 강소로파출소의 부소장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장안분국의 단위서기(團委書記)도 맡는다. 주영학의 직급이 고속승진하는 9년동안, 그의 사생활은 문란했다. 앞뒤로 3명의 부녀를 간음한다.
1983년, 중국대륙에는 대규모의 "엄타(嚴打, 엄중단속)"이 시작된다. 문혁때 남겨진 사회문제에 대하여 각종 범죄를 엄격히 단속하는 것이었다.
이번 "엄타"에서 가정댄스파티를 조직하거나, 혼외성관계를 가지거나, 심지어 재물을 조금 훔친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남녀간의 연애가 조금 선을 벗어나거나, 혹은 신체를 노출하더라도 바로 노동개조형에 처해졌다.
당시의 주영학은 한참 잘 나갈 때였다. 그녀가 이전에 장매영 및 3명의 부녀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니, 일단 탄로나면, 자신의 관직은 물론이고 생명도 보존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영학은 3명의 부녀를 찾아가서 이익으로 회유하고 협박하는 강온양책을 써서 그녀들로부터 자신의 고발하지 않겠다는 동의를 받아낸다. 이제 남은 것은 장매영 뿐이었다.
1983년 10월 21일, 주영학이 장매영에게 몹쓸 짓을 한 9년후, 그는 다시 한번 연안서로의 작은 집 대문을 두드린다.
이미 70세가 된 장매영은 문을 열자마자 문앞에 서 있는 주영학을 본다. 그리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9년전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영학은 장매영이 혼자 집에 있는 것을 보자 바로 걸어들어간다. 이웃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내가 오늘 온 것은 사죄하기 위함이다. 이전에 내가 당신을 모욕했었고, 당신을 존중하지 못했다. 용서해달라. 오늘 온 것은 당신에게 인사하고, 나를 고발하지 말아달라고 하기 위함이다. 내가 잘못했다." 주영학은 바로 이렇게 말한다.
"됐다. 됐다. 이미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장매영은 이전에 발생한 일 때문에 마음 속으로 거리낌이 있어서, 얘기를 빨리 끝내고 주영학을 내보내고 싶었다. 게다가 그녀는 주영학에게는 마음 속으로부터 혐오의 감정이 있기 때문에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게 된다.
주영학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들의 말을 이웃이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겁을 먹는다. 무의식중에 그는 장매영의 입을 틀어막는다. 장매영은 그 모습을 보자 주영학이 다시 예전처럼 무례를 범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크게 소리지른다.
아마도 그것이 주영학을 분노하게 한 것같다. 그는 장매영을 의자에 눌러앉힌다. 장매영은 죽어라 발버둥친다. 주영학의 손은 그녀의 입을 더욱 꽉 막게 된다. 또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두 다리로는 그녀의 두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발로 바닥을 쳐서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알아챌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주영학은 공안이고, 이전에 군대에도 있었다. 힘이 셌다. 장매영은 이미 70 노인이니 전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금방 주영학에 의해 입이 막히고, 목이 졸린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일찌기 '상해탄제일미녀'라고 불리던 여인이 '미려'브랜드 담배의 모델을 했던 우아한 여인이 이렇게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주영학은 진정하고 현장을 정리한다. 자신의 지문을 모두 지운 후 몰래 현장을 떠난다.
며칠 후, 이웃은 장매영의 집 문에 계속 닫혀 있는 것을 보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장매영은 매일 규칙적으로 생활했고, 매일 새벽에 나와서 신체단련을 했다 .이웃은 무슨 일이 생긴 것으로 여기고 공안에 신고한다.
공안은 장매영이 이미 살해된지 며칠이 지났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구례정(裘禮庭)을 조장으로 하는 전안조(專案組)를 조직하여 조사를 시작한다.
주영학은 당시에 이미 장안분국의 단위서기이므로, 그는 적극적으로 사건해결에 참여하겠다고 나서서, 온갖 수단으로 수사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자신이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는 구례정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곳 파출소의 부소장을 맡았다. 그래서 비교적 이 지역을 잘 안다. 장매영은 일찌기 '미려'브랜드 담배의 모델이었고, 소문에는 군통의 우두머리 대립과도 왕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민당특무가 정치적암살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구례정은 즉시 주영학의 말을 부정한다. 그는 국민당특무라면 해방초기에 손을 쓸 수 있었는데, 30여년이나 기다려서 손을 쓸 이유가 없다. 그후 전안조는 중점을 장매영의 생전 인간관계로 두고 모두 100여명을 조사한다. 그러나 모두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었다.
조사가 미궁에 빠질 때, 한 수사관이 구례정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장매영의 아들에 따르면, 모친이 생전에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해를 당하면, 흉수는 아마도 장녕분국의 주영학일 것이라고. 모친은 1974년 주영학이 집에서 강제로 입을 맞추려했다는 것도 얘기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장녕분국에 고발장도 냈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고 했다.
이 단서를 전안조는 중시한다. 다만 공안내부인원이고, 특히 주영학은 이미 공안계통의 간부이므로, 전안조는 틉결히 장안분국의 국장에게 보고를 한다. 그러나 국장은 이것은 인민경찰을 모함하는 것이라 여기고 주영학에 대한 입건조사에 동의하지 않는다. 결국 전안조는 단서를 상해시형정처에 보고하고, 거기에서 수사개시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다.
며칠 후, 주영학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전안조는 회의개최를 명목으로 주영학을 신강빈관(申江賓館)으로 부른다. 주영학이 회의실 문을 들어서면서,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전안조조장인 구예정등이라는 것을 보고는 어찌된 일인치 바로 눈치챈다.
1985년, 주영학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다. 전안조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원래 처음 장매영이 주영학에 대한 고발장을 냈을 때 그 고발장을 중시했다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두 사람의 운명은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다. 인생은 이렇다. 영원히 시간은 앞으로 흐른다. 뒤로 돌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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