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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법률/사건이야기

중국고대소송에서의 4가지 친자감정방법

by 중은우시 2019. 1. 15.

글: 우인연화(愚人煙火)


DNA유전자기술로 지금은 친자감정을 하고 있다. 정확도는 99.9999%에 달한다. 그러나, DNA유전자기술이 없던 고대에 친자감정은 어려운 일 중에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도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적지 않은 드라마, 영화, 희극과 고대소설에서 '적혈인친(滴血認親)'의 스토리가 나오게 된 것일 것이다. 기실 '적혈인친' 이외에 고인들이 친자감정을 하느데는 여러가지 수단이 더 있었다.


첫째, '친정법(親情法)'


현대에도 자주 벌어지는 자식을 서로 빼앗으려믄 탈자대전(奪子大戰)은 고대에도 자주 발생했다

DNA와 같은 하이테크 감정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의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인들도 자신의 방법이 있었다. 자주 '인지상정'에서 단서를 찾기도 한다.

서한(西漢)때, 영천(지금의 하남성 우주시)에는 큰 집안이 있었고, 형제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다. 형제둘의 부인이 모두 임신을 했다. 형의 부인은 유산을 했지만, 그 사실을 감추고, 동생의 부인이 낳은 아들을 빼앗아서 자기의 아들이라고 했다. 소송이 3년을 끌었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 일은 동한때 응소(應劭)의 <풍속통(風俗通)>에 나온다. 한선제때 승상을 지낸 바 있는 황패(黃覇)는 이를 듣고, 친자감정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 방법은 이러했다. 사람을 시켜 아이를 대당(大堂)으로 데려오게 한 다음, 형수와 제수를 불러놓고 서로 아이를 빼앗아 가라고 했다. 누구든지 빼앗아가면 그의 것으로 하겠다고. 그러자 형수는 힘을 다하여 아이를 빼앗으려 했고, 제수는 아이가 다칠까 겁이 나서 표정이 슬펐다.


이 광경을 보고, 황패는 감정결론을 내린다: 아이는 제수가 낳은 것이다. 황패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너는 집안 재산을 탐내서, 아이를 네 것으로 하려고 했으니, 어찌 그가 다칠까봐 걱정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윤리, 친정의 각도에서 친자감정을 진행하는 방법은 후세의 사법관리들에게도 계속 이용되었다. 예를 들어, 북위때 이숭(李崇)은 양주자사를 지냈는데,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여, '쟁자안(爭子案)'을 해결한 바 있다. <북사.이숭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구태(苟泰)라는 사람이 3살짜리 아이를 잃어버렸고, 나중에 조봉백(趙奉伯)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아이를 발견했다. 그러나 두 집안은 모두 아이가 자기의 것이라고 우겼다. 이웃들의 증명도 받아와서 군현에서 결정하기 어려웠다.


이숭은 사건을 맡은 후, 아이를 두 집과 며칠간 떨어뜨려 놓는다. 그 후에 사람을 두 집안에 보내어 아이가 급병으로 죽었다고 통보하며, 아이를 데려가서 매장하라고 한다. 구태는 그 말을 듣고 비통해 마지 않았는데, 조봉백은 그저 탄식을 한번 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숭은 아이가 구태의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 일은 일찌감치 후진의 화씨부자가 쓴 <의옥집(疑獄集)>에 수록되어 있고, 고대 사법친자감정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코멘트: 황패와 이숭은 고대의 유명한 사법고수이다. 그들이 사용한 친자감정방법은 '친정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합상정(不合常情)'은 왕왕 친자감정때 가장 관건적인 판단근거중 하나가 된다.


친정법은 고대의 사법감정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통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만일 황패의 사건에서 형수와 제수가 모두 아이가 다칠까봐 겁을 냈다면 어떡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이숭의 사건에서 구태, 조봉백 두 집안이 모두 아이의 죽음에 비통해 했다면 어떡할 것인가? 사실상 황패 본인도 해결방법이 없는 친자감정사건을 맡은 바 있다. <절옥귀감(折獄龜鑑)>의 "황패"조에 이런 기록이 있다. 한선제때, 지금의 하북 경내에서 '삼남공처(三男共妻)'사건이 발생한다. 처가 아들을 낳은 후, 세 남자는 모두 자기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황패는 인륜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세 남자를 처형하고, 아이를 모친에게 준다. 수위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므로 금수로 보아 처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각도에서 보자면 실패한 사건이다.


둘째, '상리법(常理法)"


'불합상정(不合常情)'여부를 따지는 것은 친정법 친자감정의 주요한 '이론적 기초'이다. 고대의 친자감정사건처리에서 이에 상응하게 ''불합상리(不合常理)'여부를 따지는 것도 고대 친지감정의 또 하나의 사법수단이었다.


북송때, 이남공(李南公)은 장사지현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과부가 아이를 데리고 개가를 했다. 7년후 전남편 가족이 찾아와서 아이를 데려간다. 이 부인은 내놓지 않으면서, 아이는 전남편의 자식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남공은 이 '쟁자안'을 맡은 후, 단지 두 마디를 묻고는 사건을 종결지었다.


<송사.이남공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남공이 첫번쨰 음은 이러하다: "아이는 몇 살인가?" 전남편의 집안사람들은 아이는 9살이라고 대답한다. 여자는 아이가 7살이라고 대답한다. 두번째 물음은 이러하다: "아이는 이빨을 갈았는가?" 여인은 작년에 이미 이빨을 다 갈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이남공은 아이가 전남편의 혈맥이라고 결정한다. 이남공이 왜 이런 감정결론을 내렸는가? 그 근거는 사내아이는 일반적으로 7살이면 이를 간다는 상식때문이다.


<명사.노목전>에 기록된 "아사귀산(兒似歸産)"안이 있는데, 아주 대표적이다. 노목(魯穆)은 복건첨사로 있을 때, 주윤문(周允文)이라는 ㅏ람이 일찌감치 후손이 없었는데, 조카를 데려다가 아들로 삼았다. 나중에 그의 첩이 아들을 낳는다. 주윤문이 죽은 후, 조카는 집안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첩이 낳은 아들은 숙부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첩모자를 쫓아버린다.


노목은 첩의 고발장을 받은 후, 주씨집안의 가족들을 모조리 불러모은다. 그르기 몰래 첩이 낳은 아이를 아이들 사이에 둔다. 그들에게 누가 주윤문을 닮았는지 물어본다. 사람들은 모두 첩이 낳은 아들을 가리켰다. 결국 노목은 주윤문의 조카는 거짓말을 한다고 인정하고, 첩의 아들을 주윤문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다. 그리하여 주윤문의 가산은 모두 주윤문과 첩의 사이에 낳은 그 아들에게 돌아간다.


위에서 언급한 두 건의 친자감정사건은 전자는 아이가 이빨을 가는 생리연령에 근거했고, 후자는 얼굴이 닮은 것으로 판단했다. 감정근거는 모두 생리, 생황상식이다 그래서 이를 '상리법'에 따른 친자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얼굴, 목소리, 나이, 걸음걸이등은 모두 상리법에 따라 친자감정할 때의 주요조건이다. 예를 들어, <원사.간문전전>에 기재된 '험유지아(驗乳知兒)"안이 있다. 아이가 엄마의 젖을 먹는지 안먹는지를 가지고 모자간의 혈연관계를 감정한 것이다. 다만 친정법과 마찬가지로, 상리법의 한계성도 분명히 드러난다. 법관의 개인지혜로 사건을 결정하는 것은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얼굴모양새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도 인위적으로 조종될 가능성이 크다.


셋째, "합혈법(合血法)"


혈액의 응고정도로 혈연관계를 감정하는 것은 고대에 친자감정을 진행하는 수단이었다. 어떤 경우는 더욱 신기했다. 청나라 기효람의 <열미당초당필기 괴서잡기일>에는 친자감정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는데 스토리성이 좋다:


산서의 어떤 상인이 외출하여 장사를 했는데, 가산을 동생에게 맡겨서 관리하게 했다. 외출기간동안 그는 처를 얻어서 아들을 하나 낳는다. 10여년후, 처가 병사하자, 상인은 아들을 데리고 고향집으로 간다. 상인의 동생은 형이 가산을 내놓으라고 할까 우려하여, 이 아이는 형이 입양한 것이므로, 부친의 가산을 승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재판을 맡은 현령은 재판현장에서 친자감정을 했다. 상인과 아들의 피를 동시에 맑은 물에 떨어트리자, 부자 두 사람의 피가 금방 응고되었다. 현령의 감정결론이 바로 나왔다: 상인의 아들은 친아들이다.


상인의 동생은 '적혈' 방식을 믿지 못해서, 집에 돌아온 후에 친히 시험을 해본다. 자신과 아들의 피를 물에 떨어뜨리니 서로 응고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상인의 동생은 반박할 이유가 생겼다. 소장을 내어 현령이 사용한 친자감정방식이 맞지 않으니 결론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이야기는 더욱 극적이다. 고향사람들은 동생부자의 피가 응고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뒤에서 아들이 그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쑥덕대기 시작한다. 분명 동생의 처가 외간남자와 사통해서 낳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인의 동생은 외부의 소문이 돌자,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처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랬더니 정말 처가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아낸다.


현령이 사용한 친자감정수단은 고대에 '합혈법'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친정, 상리로 모두 판결할 수 없는 경우에 '합혈법'을 썼다.


합혈법은 적혈법(滴血法)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원리는 만일 두 사람이 혈연관계이면, 손을 동시에 찔러서 피를 맑은 물에 떨어뜨렸을 대, 피가 하나로 되고,혈연관계가 아니면 하나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혈법은 믖어도 동한시기에 이미 사법과 민간에서 친자감정수단으로 사용되었다.현대에는 이미 발견했다. 사람의 혈액형은 A, B, AB, O등 유형이 있다는 것을. 혈액형을 이용하면 확실히 부분적으로 친자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합혈법은 중국고대의 DNA감정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약간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구미보다는 훨씬 빨리 사용했다. 그러나, 합혈법은 완전히 과학적이지는 않다. 사실상, 여하한 사람의 피라고 하더라도 같이 놓으면 얼마 후 하나로 융합된다. 기실 고대인도 이미 이 문제를 인식했을 것이다.청나라 황육홍(黃六鴻)은 강희33년 편저한 <복혜전서>에서 "적혈의 일은 다 믿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기효람이 기술한 이야기는 멍청하기 그지없었던 일이라고 얘기한다.


넷째, "적골법(滴骨法)"


 위의 세 가지 수단은 살아있는 사람들간에 진행되는 것이다. 만일 한쪽이 죽었다면 어쩧게 친자감정을 해야할까? 뼈에 피가 스며드는 상황을 관찰하여 사망자와의 친자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삼국시대 사학자 사승(謝承)은 그가 편찬한 <회계선현고>에서 이런 이야기를 싣고 있다: 진업(陳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형이 바다를 건너다가 죽었다. 진업이 찾아가서 시신을 확인하는데, 함께 죽은 사람이 5,6십명이고, 시체가 부패하여, 외모, 체형만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진업은 팔을 베어 피를 낸 후, 피를 뼈 위에 뿌린다. 그리고 그 반응을 관찰했다. 그중 한 시골은 진업의 피가 떨어지자 금방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머지는 모두 피가 흘렀다. 진업은 이를 기초로 그 시신이 자신의 형이라고 말한다.


남조때 이렇게 피가 뼈에 스며드는 상황을 가지고 친자감정을 하는 방식이 아주 유행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예장왕 소종(蕭綜)이 부친을 찾은" 이야기이다. <양서.예장왕소종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조 제나라의 동혼후 소보권의 비 오숙원은 아주 예뻤다. 제나라가 멸망한 후, 양무제 소연은 그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취한다. 오숙원은 7개월만에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소종이라 한다. 궁안에서는 이 아이의 친부는 소연이 아니라 소보권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소종은 어른이 되 ㄴ후, 자신의 진실한 신세내력을 궁금해 했다. 민간의 소위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죽은 사람의 뼈에 뿌려서 스며들면, 부자간이다"라는 말을 믿는다. 그래서 몰래 동혼후의 분묘를 파서, 뼈를 꺼낸 후 자신의 피를 뼈에 떨어뜨린다.피는 금방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민간의 비법이 신뢰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소종은 자신의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차남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 아이를 죽인 후, 사람에게 매장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아이의 뼈를 끄집어 내서 자신의 피를 뼈에 떨어뜨린다. 과연 뼈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소종은 자신의 생부는 소보권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적골법"은 "적골친(滴骨親)"이라고도 부른다. 고대 사법명저 <세원록>에 상시헤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일종의 과학적 수단으로서 고대 법의한 업무수책에 기록되어 있다: "만일 모갑이 부이거나 모이고, 유골이 있다면, 모을이 친아들 혹은 딸인지를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모을의 몸을 찔러 피를 한두방울 나오게 해서 유골의 위에 떨어뜨리면, 친생자이면 피가 뼛속으로 스며들고, 아니면 스며들지 않는다."


적골법은 실로 적혈법의 일종이다. 최초에는 주로 고의로 시신을 잘못 받아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 썼다. 죽은 사람의 재산상속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적혈법과 마찬가지로, 피가 뼈에 스며드는지 아닌지 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현대법의학 시험결과에 따르면, 골막이 이미 없어졌으면 어떤 사람의 피라고 하더라도 떨어뜨리면 모두 스며든다. 반대로 만일 골막이 남아 있다면, 설사 친족이 피라고 하더라도 스며들 수가 없다. 기실 ㄱ인도 일찌감치 이런 헛점을 이용하여 불법분자가 빈 틈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청나라때 마성(馬晟)의 <담설(談屑>에서 '환관(換棺)'의 이야기가 있다. 장인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사위가 시신을 바꿔치기하는 방법으로 적골법감정을 파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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