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엽서도(獵書徒)
"연금멸요"는 송휘종(宋徽宗) 연간에 송나라조정이 요나라가 쇠락하는 틈을 타서, 신흥제국인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국책을 가리킨다.
송나라조정은 전략요충지 "연운십육주"의 지배권을 되찾아 와서, 중원왕조의 북방 국방통제선을 재걸하고자 했다. 다만, 송금이 동맹하여 요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송군의 북벌부대가 전투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정말 형편없었다. 그리하여 금나라 통치자들은 송나라조정내부가 얼마나 허약하고 썩었는지 알아보고, 극도로 멸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원래의 맹약대로 실지를 북송에 넘겨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요를 멸망시킨 후,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일거에 송나라의 경사인 동경 변량을 점령하고,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와 종실을 포로로 잡아 끌고간다. 이렇게 북송이 멸망한다. 이를 '정강지변' 혹은 '정강지치(靖康之恥)'라고 부른다.
'연금멸요'는 북송멸망의 '정강지변'간에 시간적인 간격이 너무 짧고, 내재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후세에 많이 욕을 먹게 된다. 비교적 대표적인 견해는 이러하다: '연금멸요'의 전략은 거기에 내포된 거대한 리스크를 보지 못하였으며 확실히 안목이 단견적이었다.
먼저, 송나라조정이 요나라와 체결한 합의를 깨트린 것은 다른 인근국가들의 신뢰에도 영향을 끼친다, 다음으로, 송나라북부국경에서 백여년간 유지되었던 균형이 깨져버린다. 마지막으로, 금나라의 침략적인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전형적으로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후제갈량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판자들은 모두 후세의 사람들이고, 역사의 진전과 결과를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방관자로서, 자연히 마음대로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가 더욱 객관적으로 송나라조정의 '연금멸요'전략을 분석해본다면, 반드시 역지사지의 방식을 써야 한다. 시간을 최종결정을 하기 이전의 송나라조정으로 되돌려야 한다. 당시의 송나라조정이 직면한 구체적인 상황과 다른 확보가능한 정보를 가지고 다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합리적인지 여부, 그리고 최선의 선택이었는지여부를 보아야 한다.
1114년, 완안아골타는 여진인을 주력으로 하는 부락무장을 이끌고 요나라의 동북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한다. 이때 전체 동아시아대륙의 주인공은 셋이다: 요, 금 그리고 서하. (고려왕조는 자신의 전통에 따라 한반도를 지배범위로 삼았고, 확장할 의도가 없었다). 이 세 국가중에서, 요나라가 군사력이 가장 강했고, 송나라는 군사력이 2위였지만, 종합실력은 1위였다. 서하가 가장 약했다.
다만, 그때의 송나라는 서하에 확장주의태세를 취했고, 지속적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핵심전략지구인 횡산산맥(橫山山脈)의 지배권을 쟁탈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서하를 격패시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서하는 계속하여 사신을 요에 파견하여 간섭해달라고 요청한다. 비록 송나라는 요나라의 경고를 무시했지만, 요나라의 적극적인 외교간섭태도는 서하와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했다. 두 나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서하는 전력으로 요나라를 지지하여 여진군대에 항거했고, 그것은 요나라가 멸망하는 1124년까지 지속된다.
간단히 말해서, 삼국정립의 형세에서, 1위인 요나라와 3위인 서하가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었다. 송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고려는 여하한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하에서, 송나라조정은 상당한 실력을 가진 제3국과의 동맹기회를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 제3국이 요나라의 후방에 있고, 요나라에 골치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때, 송나라조정과 여진인간의 육로통로는 요나라영토로 막혀 있었다. 그저 발해만의 산동등주등지에서, 해로로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니 송나라조정이 장악한 여진부락에 대한 모든 정보는 오직 2가지 정보원에서 나왔다; 첫째, 여진영지로 파견한 사신이 탐색하여 알아낸 정보, 둘째, 고려왕조를 통하여 공유한 정보. 확실히 이 두 가지 방식으로 획득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충분한 확인을 거칠 수 없어, 심각한 편견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송나라조정은 여진인의 진정한 실력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했고, 또한 저평가하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여진의 최대적국인 요나라도 마찬가지로 여진인의 실력을 엄중하게 저평가하고 있었다.
요나라는 전체 여진부락을 생활하는 지역에 따라 3개부분으로 나누었다; 요나라강역과 변경부근에서 생활하며, 요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인 여진족은 숙여진(熟女眞)이라고 불렀다. 변경지역외에 요나라의 관할이 미치지 않지만 요나라의 권위를 인정하는 여진족을 순여진(順女眞)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심산노림에서 원시어로수렵생활을 하는 여진족을 생여진(生女眞)이라고 불렀다. 요나라의 북면관 관리모델은 극히 느슨했다. 그래서 뒤의 순여진, 생여진이 고려, 송과 연락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들 부락의 인구수량과 전쟁자원을 파악하고 있지도 못했다.
위에서 열거한 사실을 고려하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송나라조정이 금나라와 결맹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이 새로 굴기한 여진인왕조에 대한 정보는 극히 부족했다. 그래서 이해는 깊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교통과 통신기술이 지극이 낙후된 당시로서는 완전히 정상적인 것이다. 이런 유한한 정보를 가지고 송나라조정이 내린 결론은 여진이 요나라의 변경후방에 있고, 비록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지만, 인구는 유한하여 천하를 쟁패할 야심과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들과 동맹관계를 건립하고 나아가 협력하여 나아가서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물러나서는 요나라 및 서하와의 전략적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외에, 송나라조정은 동시에 2개의 전쟁을 수행했다. 하나는 서하와의 횡산쟁탈전이고 다른 하나는 방랍(方臘)의 난을 진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송군은 전투력에 당연히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연금멸요"의 전략은 당시 송나라조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로 그다지 큰 잘못이라 할 수 없었다. 최종적인 실패와 심각한 결과(정강지치)는 전술문제 + 우연한 사건이 겹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양자간에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은 너무 억지스럽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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