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대야(二大爺)
2021년 11월 18일, 발트해의 해안선에 위치한 탄환소국(彈丸小國) 리투아니아는 타이완과 상호 '대표처'를 설치한다고 선언했다. 소위 대표처(Representative Office)는 실제로 외교기구의 또 다른 명칭이다. 이는 사실상 '일중일대(一中一臺)'를 의미한다.
이전에 타이완이 돈으로 외교관계를 샀던 태평양의 도서국이나 중남미의 빈국과는 달리 겨우 280만의 인구에 6.5평방킬로미터의 국토를 가진 리투아니아는 소국이기는 하지만 정통 유럽국가이고 EU회원국이며 NATO회원국이다. 2018년의 데이타를 보면 1인당 GDP가 2만달러에 육박한다. 중국의 2배이다. 세계은행의 평가체계에서 보자면 '고수입경제체'라 할 수 있다.
이런 나라가 적극적으로 타이완에 기울어지다니 사태는 심각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신속히 대응했고, 바로 외교관계를 '대사급'에서 '대표처급'으로 격하시킨다. 이 수법은 중국당국이 40년전에 딱 한번 써보았다. 그때도 타이완문제때문이다. 네덜란드와의 외교관계를 격하시켰던 것이다. 중국당국이 외교역사에서 단교 바로 다음가는 엄중한 사태이다. 그렇다면 리투아니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12월 15일, 중국측은 리투아니아외교관에게 증명서류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정식으로 외교신분을 강등시키려 한 것이다. 그때 리투아니아는 19명의 외교관 및 가족을 중국측의 이 조치가 <비엔나외교관계조약>에 위반한다는 것을 이율 하룻밤만에 짐을 싸서 떠나버린다. 텅빈 대사관만을 남겨두고,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것이다.
이건 듣기에 약간 웃기는 사건이다. 중국과 리투아니아가 거의 단교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마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양국의 외교가 충돌하고, 말싸움하고, 대항하고 심지어 단교까지 하려면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중국과 미국은 무역전때 싸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인원을 철수시키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찌 리투아니아는 즉시 철수조치를 단행한단 말인가? 이 소국이 어떻게 이런 강인한 성격을 지녔을까? 그리고 대국에 맞서 도전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실상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이해하면 바로 알 수 있다. 리투아니아는 오늘날에 비로소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고, 기실 계속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발트해연안에 위치한 리투아니아는 유럽국가중 비교적 일찍 세워졌다. 1230년에 건국되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한때 유럽최대의 국가가 되었다. 유럽의 지리상 요충지에 있으므로 나중에 강적들의 공격을 받게 되고, 점차 쇠락한다. 역사상 다사다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후로 독일, 폴란드, 러시아등에게 차례로 얻어맞는다. 1차대전이 끝난 후, 강적들이 모두 정신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서 리투아니아는 러시아로부터의 100년지배에서 벗어나 신속히 나라를 다시 세우고 발전했다.
불행하게도, 행복한 나날은 길지 않았다. 2차대전전 소련과 나치가 암암리에 세력범위를 나누고 다시 한번 발트해3국을 침략한다. 병력을 보내 리투아니아를 점령한다. 리투아니아인들이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스탈린은 1.2만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을 체포한 후 강제수용소에 감금한다. 많은 개인재산은 몰수되고, 화폐도 소련의 루블로 바꾼다. 세금도 대폭 올랐으며, 리투아니아군대는 소련홍군 제29보병으로 개편되어 총알받이가 된다. 특히 나치독일이 소련으로 진격하기 전에, 스탈린은 리투아니아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다시 1.7만명의 리투아니아인들(대부분은 각 분야의 엘리트이다)을 시베리아로 유배보낸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베리아에서 소리소문없이 죽어나갔다.
이런 피눈물의 역사에 비추어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인의 수백년에 걸친 침략과 압제에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친다. 그래서 나치가 소련을 침략할 때, 아예 나치독일을 도와 소련을 치게 된다. 양쪽의 피해를 형량한 다음 그중 가벼운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자 소련이 권토중래했고, 리투아니아인들은 더욱 탄압받게 된다.
리투아니아정부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소련당국은 약 15만명의 리투아니아유격대와 반대자를 강제수용소로 보낸다. 최소 13만명(그중 70%는 부녀와 아동)이 강제로 소련의 구석지고 멀리 떨어진 지역의 강제수용소 또는 정착지로 보내어져, 무상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그중 최소한 2.8만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이 결국 사망한다. 1963년에 이르러 소련의 정책이 완화되면서 결국 6만명의 리투아니아인들만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인구는 다 해서 백여만이었다. 그중 3할이 죽거나 다쳤다. 당연히 소련이라는 대감옥에서 고난을 받은 것은 리투아니아인들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큰 피해를 입은 리투아니아인들은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자유투사연합(LLKS, Lietuvos laisvės kovos sąjūdis, Union of Lithuanian Freedom Fighters)"은 1944년부터 나치와 소련에 동시에 저항한다. 이 리투아니아유격대는 극도로 곤란한 상황하에서 시골지역에서 소련의 통치에 항거했다. 주요지도자가 1965년 전사한 상황에서도 리투아니아유격대는 여전히 궤멸되지 않고 마지막 유격대원인 미쿠리스는 1980년에 비로소 나이들고 쇠약해져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소련군에 체포구금된다. 이들은 전후로 36년간 싸웠다.
무장투쟁외에 일반 리투아니아인들의 저항도 멈추지 않았다. 1972년, 19살의 학생 로마스 카란타가 분신으로 소련통치에 항거한 것은 리투아이아인들을 크게 뒤흔들었다. 1976년 반소인사들이 헬싱키소위를 만들고, 외국방송을 통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선언한다. 1989년 8월 23일 전세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리투아니아의 제안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대규모 반소시위를 벌인다. "발트해해안의길" 모두 200만명이 손에 손을 잡고 675킬로미터에 이르는 사람띠를 형성하여 발트해삼국을 관통했다. 인류역사상 평화시위의 대표적인 사건이 된다.
결국 소련해체전날 리투아니아인들은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1990년 3월 11일 복국을 선언한다. 소련에 가맹한 공화국들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선언한 국가가 된다. 이어서 소련군대가 침입했으나, 전세계의 성토하에 참패하고 만다. 리투아니아가 앞장서자, 각 가맹공화국들도 속속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하여 결국 소련이 해체되고 만다. 다음 해, 스스로를 돌볼 힘도 없었던 소련은 어쩔 수 없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한다. 오랜 고난을 겪은 발트해의 소국은 이렇게 러시아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문명의 서광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리투아니아는 비록 나라가 작고, 국력도 약하지만, 기개는 있는 나라라는 것을. 강권앞에 절대 굴종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강인한 자세를 보이는 나라라는 것을.
그리하여 리투아니아는 독립한 후 어렵게 얻은 자유의 공기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이데올로기측면에서 옛 소련의 것들은 철저히 배척한다. 주류민의는 일방적인 친서방이다. 2003년 EU와 NATO에 가입한 후, 러시아에 대항한다. 특히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입하여 크리미아반도를 병합한 후, 러시아의 확장기도 및 러시아와 갈수록 가까워지는 중국에 대하여 리투아니아는 극히 경계하게 된다. 그리하여 앞장서서 목소리를 낸다. 중국러시아연합은 리투아니아의 국가안전을 위협한다고.
벨로루시에서 반정부시위가 일어나자, 리투아니아는 가장 먼저 벨로루시의 반대파를 받아들이겠다고 표시한다. 작년 유익연합정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리투아니아의 외교는 더욱 강경해진다. 명확히 '가치관외교정책'을 실시한다고 표시한다. 이 단어는 새로운 발명은 아니고, 미국의 바이든이 취임한 후 여러번 사용한 것이다. 사실상 리투아니아는 외교정책에서 미국의 편에 서겠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특히 2019년 8월에 발생한 하나의 작ㅇ느 사건은 리투아이나인들의 자유에 대한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다. 당시 홍콩국면으로 인하여 일부 리투아니아인들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벨뉴스에서 집회를 열고 지지했다. 동시에 또 다른 '애국군중'도 이에 맞서서 집회를 열고 '애국입장'을 표시한다. 그 결과 쌍방이 충돌한다. 이는 독립을 위해 수백년간 분투해온 리투아니아인들의 금기를 건드렸다. 리투아니아 외교부 차관 만타스는 금년 8월 매체와의 기자회견에서 그때부터 리투아니아는 방향전환을 고려했다고 말한다.
이 소국은 단순히 말만 한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들이 직접 해낼 줄은 몰랐다. 2019년부터, 리투아니아는 신장, 홍콩등문제에서 공개적으로 중국과 대립한다. 비록 EU의 구성원이고 일관되게 친유럽이지만 앞장서서 EU의 난민정책과 대중정책을 반대하고 집행하지 않았다. 금년 2월, 리투아니아는 직접 러시아,중국은 국가안전의 최대위협이라고 말하고, 5월에 리투아니아는 중국-EU국가의 17+1합작매커니즘에서 퇴출하겠다고 말한다. 리투아니아는 이 매커니즘이 '유럽의 분화'를 만든다고 여겼다.
이어서 놀랍게도 타이완과 상호 대표처를 설립한다. 그리고 중국의 모든 외교관을 철수시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금년부터 리투아니아의 변신속도는 매달 다르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상 결과를 설계해놓고 한걸음 한걸음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리투아니아가 이렇게 변신한 논리를 따져보자면, 역사의 상처도 아직 남아 있고, 대국에 대한 경계심이 뼛속까지 심어져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시시각각 위협하고 있으나, EU는 그다지 의지할만하지 못한다. 세계를 돌아보면 오직 미국만이 자신의 뒤를 밀어줄 수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외교에서 미국에 우호적이 되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관계를 잘라버리면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 확실한 의사표시일 수 있다.
중국과 리투아니아의 무역액은 아주 적다. 2020년에 겨우 22.8억달러이다. 그중 18억달러는 중국의 수출이다. 그래서 양국에 있어서 이 정도의 무역량은 영향이 미미하다. 중요하게 볼 만한 것이 아니다. 이 정도 손실은 실제로 다른 곳에서 배로 챙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이미 리투아니아에 6억달러의 수출신용대출을 약속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는 겁날 것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9월에 리투아니아 외교부장관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리투아니아의 이런 변화는 아주 명확했다. 공동회견에서 쌍방은 이미 묵계를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지지와 약속이 있으니 리투아니아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리투아니아 외교장관은 "중국의 압력에 대항하는 모범"이라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외교관계가 격하되는 것은 바로 리투아니아가 생각하고 있던 바이다.
12월 20일, 중국측은 리투아니아에 대하여 "일부 세력이 마침내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리투아니아 국회의원인 Matas Maldeikis는 트위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Which is ironic, because that's where communisim already is"(아이러니한 것은 거기가 바로 공산주의가 이미 들어간 곳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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