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는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는가?

중은우시 2014. 11. 27. 01:35

글: 장계광(章繼光)

 

신중국성립이후, 임표는 건강때문에 장기간 휴양상태였다. 다만 모택동, 주은래등은 그의 탁월한 전공을 잊지 않았다. 1954년 그는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는데, 부총리로서의 서열은 등소평보다 앞이었다. 1955년 원수의 계급을 수여받는데, 10대원수중 서열3위였다(임표는 병으로 수여식에는 참석하지 못한다). 1958년 8월, 제8기 5중전회에서 중앙상위, 중공중앙부주석, 중앙군위부주석에 당선된다. 1959년 여산회의후 중공중앙군위 제1부주석, 국방부장이 된다. 1965년 1월 제2기전인대 제1차회의에서 제1부총리 겸 국방부장에 임명된다. 단, "임표의 신체는 확실히 좋지 않았다. 한동안은 특히 나빴다." 모택동은 "임표의 신체에 대하여 걱정이 많아서, 특별히 그를 위하여 조조의 시 <귀수수(龜雖壽)>를 써주었고, 왕동흥을 보내어 자신의 상당한 금액의 원고료를 보내주기도 했다.

 

1966년 1월, 문화대혁명이 서막을 여는 비상시기에, 중공제8기 제11중전회가 북경에서 소집된다. 임표는 이때 휴가를 얻어 대련에서 휴양하고 있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다.

 

8월 4일, 정치국상위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유소기가 파견한 공작조의 문제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한다. 유소기는 자신의 업무중 과오를 반성한다. "북경의 상황을 얘기하자면 내가 주요 책임을 져야 한다." 모택동은 그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는 북경에서 독재를 했지. 독재를 잘 했다." 이어서, "좋게 말하면 방향상의 과오이지만 실제로는 부르조아계급의 입장에 서서 프롤레타리아계급혁명을 반대한 것이다" 모택동이 이렇게 기세좋게 몰아부치자, 유소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만두면 되지 않겟는가. 그만두는 것은 겁나지 않는다. 오조(五條)가 있으면 겁나지 않는다." 이는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수십년이래로 첫번째 벌어진 격렬한 논쟁이었다.

 

그날 저녁, 모택동은 비서에게 대련에서 요양중인 당중앙부주석 임표에게 전화를 걸게 하여 빨리 북경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한다. 이전에 그는 왕동흥에게 몇변 전화를 걸게 하여 북경의 회의에 참석하도록 재촉한 바 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모두 병을 이유로 완곡히 거절한다. 임표는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핑계로 출석하지 않는다. 모택동은 대노하여 이렇게 말한다: "너 임표가 오지 않고, 협조하지 않으면, 회의를 중단한다. 임표가 오면 회의를 재개한다." 모택동은 주은래에게도 전화를 걸어 임표에게 오도록 재촉하게 한다. 그리고 주은래를 통하여 임표에게 말한다: "나의 현재 처지는 아주 곤란하다. 네가 오지 않으면 나는 더 일하기 힘들다."

 

다음 날, 모택동은 중남해의 집에서 옛날 신문을 한 장 꺼내어, 모서리에 연필로 <포타사령부(炮打司令部)> 대자보의 원고를 쓴다. 그후에 비서에게 옮겨쓰게 시킨다. 이 대자보에서는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지만, 유소기가 파견한 공작조가 군중을 압제하는 방식을 비판한다. 명확히 당중앙에 부르조아계급사령부가 있다고 함으로써 유소기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진지하게 유소기 이후의 후계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8월 7일 저녁 9시경, 주은래는 전화로 오법헌에게 지시한다. 다음날 오전에 전용기를 대련으로 보내어 임표와 섭군을 북경으로 데려오라고. 주은래는 특별히 당부한다: "절대로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 이 일은 너 혼자만 알아야 한다. 다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된다." "임표 있는 곳은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연락하라"고 한다.

 

8월 8일 새벽, 오법헌은 주은래의 지시를 받아, 전용기를 대련으로 보내어 임표를 맞이한다.

 

"오전 10시반, 대련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전용기가 서교공항에 착륙한다." 임표의 전용기는 북경 서교공항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비행기문이 열리자, 주은래가 즉시 비행기에 올라 임표를 만난다." 오법헌은 "비행기의 아래에서 기다린다" 바로 이 때, 모택동을 대표하여 임표를 맞이하러 온 중앙판공청 주임 "왕동흥도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고, 급히 비행기내로 들어간다.: 그들 세 명은 기내에서 개략 반시간동안 얘기를 나눈다. 임표가 비행기를 떠날 때, 오범헌은 원래 앞으로 나가서 몇 마디 인사를 나누려고 했는데, 그의 표정이 아주 엄숙하여 감히 앞으로 나가서 말을 걸지 못했다. 모가만(毛家灣)의 주택은 당시 수리중이어서, 임표는 북경으로 돌아온 후, 인민대회당의 강소청에 머물렀다. 모택동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휴식할 틈도 없이, 임표는 직접 중남해로 가서 모택동과 만난다.

 

8월 8일 오후, 오법헌은 주은래의 전화통지를 받는다. 저녁에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주은래는 도착하자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곤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는 모주석이 8월 5일에 쓴 대자보이다. 원고이다. 내가 읽을테니 들어보라." 그가 읽은 것이 바로 <포타사령부>이다. 주은래는 두번 읽는다. 다 읽은 후 이렇게 말한다: "현재 보기에 유소기는 안되겠다. 그는 더 이상 중앙의 업무를 주재할 수 없다. 주석은 원래 유소기를 배양하여 후계자로 하려 했다. 지금 보니 안되겠다. 그는 모주석의 기대를 저버렸다. 지금 중앙이 결정했다. 임표동지를 북경으로 모셔와서 유소기를 대신하여 중앙제1부주석을 맡게 한다. 현재 먼저 여러분에게 통지하니, 잠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는 말라. 너희만 알면 됐다. 중앙의 결정이 하달될 때 다시 여러분에게 통지하겠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들은 후 모두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택동이 읽은 대자보와 그의 말에서, 오법헌은 비로소 중앙에서 왜 급히 임표를 북경으로 데려왔는지 알게 된다.

 

임표를 후계자로 선정한 구체적인 상황에 관하여, 1967년 가을에 이르러, 한번은 오법헌과 주은래가 같은 차를 타고 인민대회당으로 회의에 참석하러 갈 때, 주은래가 그에게 얘기해준다. 8기 11중전회 기간동안 모택동에 그에게 물었다: '보기에 유소기는 안되겠다. 나는 그를 이십일년간 관찰했는데, 완전히 실망했다. 등소평에 대하여도 7년간 관찰했는데 역시 실망했다. 유소기를 끌어내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은래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임표밖에 없습니다. 임표가 유소기를 대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그가 말을 마친 후, 모택동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말한다: "좋다. 그럼 임표를 북경으로 데려오자." 구체적인 시간으로 보면, 모택동, 주은래가 임표를 후계자로 정하는 얘기를 나눈 것은 개략 1966년 8월 5일에서 7일까지의 3일일 것이다.

 

구회작의 회고에 따르면, 임표는 나중에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시 대련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총리가 공항에서 그에게 유소기의 패를 내밀었다. 다만 임표는 어떤 일을 생각하는데 아주 주도면밀하다. 큰 문제에서 쉽게 '타지' 않는다. 이번에는 주석이 북경으로 불렀으니, 억지로 '타게' 된 것이다. 이번에 '타면'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오법헌을 잘 알고 있다. 당시 모택동이 내놓은 명단에서 중앙부주석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임표이고 다른 한명은 주은래였다. 다만 주은래는 자신의 이름은 동그라미쳐서 빼버린다.

 

모택동이 임표를 만나서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재 형세의 변화가 아주 빠르다. 군중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예상밖의 일이다. 중앙에 이렇게 큰 문제가 일어났으니 너는 지금 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임표가 말한다. "주석이 집에 가만히 앉아 계시면 된다. 그럼 모두 잘 처리할 수 있다. 현재 나타난 문제는 걱정스럽다. 그러나 주석의 지도하에 완전히 대처할 수 있다." 모택동이 말한다. "너의 현재 신분은 옛날과 다르다. 연설대에 올라가서 연설을 해야 된다." 임표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위대한 영수가 그에게 유소기문제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라는 말이다. 시간이 급박했으므로, 주은래는 뇌영부(雷英夫, 총참모부 작전부 부부장을 역임함)에게 임표를 위해 제8기 11중전회의 연설원고를 준비하게 시킨다. 이렇게 하여 임표는 유소기를 대체하고, 모택동의 후계자로 정식 등장한다.

 

[부기] 임두두의 회고에 따르면, 8기 11중전회를 전후하여, 임표는 모택동에게 여러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여 후계자에서 빼달라고 요청한다. 모택동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설신어>의 임세종(林世宗)의 전고를 인용하며 그를 비판한다. "임세종도 성이 임씨이다. 그러나 그가 지키려는 것은 송백의 뜻이 아니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모택동은 또한 특별히 강청을 보내어 설득작업을 벌인다. 그녀는 임표, 섭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총수는 항상 사직문제를 제기하는데, 주석이 아주 화를 낸다. 나에게 당신들에게 전하라고 했다. 이후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