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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신세내력(身世來歷)에 관한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20. 3. 12.

글: 엽서도(獵書徒)


북위의 효문제는 논쟁이 많은 인물이다. 그리고 신세내력도 마찬가지로 아주 신비하다. 동시에 그처럼 논쟁이 있는 조치와 그의 신세내력간에는 아주 강력한 관련성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분석을 펴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의 평생의 행위를 보아야 한다.


북위 효문제의 이름은 척발굉(拓拔宏)이고, 헌문제(獻文帝) 척발홍(拓拔弘)의 장남이다. 생모는 이부인(李夫人)이며, 북위의 제7대황제이다.


북위의 자귀모사(子貴母死)제도에 따라, 척발굉이 태자에 오를 때, 생모는 사사당한다. 그리고 조모(祖母)인 문명태후(文明太后)가 그를 어른이 될 때까지 길러준다. 척발굉은 5살때 즉위하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한다. 조모인 문명태후가 임조집정(臨朝執政)하며, 선비화된 조정에 일련의 중앙집권의 개혁을 진행한다. 효문제는 그 영향을 크게 받는다. 태화14년(490년), 효문제가 정식으로 친정한 후, 추가로 개혁을 진행한다. 그는 먼저 관료를 정리하고, 삼장제(三長制)를 세우고, 균전제(均田制)를 실행한다. 태화18년(494년), '남벌(南伐)'의 명목으로 낙양으로 천도하고, 전면적으로 선비의 구풍속을 개혁한다. 한복(漢服)으로 선비복(鮮卑服)을 대체하고, 한어(漢語)로 선비어(鮮卑語)를 대체한다. 선비족을 낙양으로 옮겨서 관적(貫籍)으로 삼게 하고, 선비족성을 한족성으로 바꾼다. 그리고 스스로 '척발'을 '원(元)'으로 바꾼다. 선비귀족과 한족사족(士族)의 혼인을 장려하기 위하여, 남조전장제도(南朝典章制度)를 참조하여 북위의 정치제도를 개혁한다. 그리고 엄격하게 개혁에 반대하는 수구귀족을 진합한다. 심지어 이를 위하여 태자 원순(元恂)을 죽음을 댓가로 치른다.


태화23년 사월 초하루(499년 4월 26일) 곡당원(谷塘原)의 행궁(行宮)에서 붕어한다. 향년 33세이다. 시호는 효문황제이고, 묘호는 고조(高祖)이며, 장릉(長陵)에 묻힌다. 그러나 효문제가 죽은 후 겨우 25년만에, 북위의 변방을 지키는 선비군사집단이 '반한화(反漢化)운동인 육진기의(六鎭起義)'가 일어난다. 북위는 금방 훈란과 붕괴의 길로 접어든다.


위에서 언급한 효문제의 정치적 조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핵심요점은 '한화'와 '탈선비화'이다. 이는 완전히 유목민족의 전통을 포기하는 것이고, 중원왕조의 농경사회의 제도로 천하를 다스린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없이 본족의 작용과 지위를 약화시킨다.


확실히, 선비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의 행위는 스스로 자신의 장성을 무너뜨리는 의미가 있다. 선비족이 중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자연히 선비족의 한족과 다른 호족에 대한 무력상의 우세에 의지하는 것이다. 한족이 협력과 지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효문제가 사망한 후의 형세발전이 이런 추단을 확인시켜준다. 북부변방에 주둔하고 있던 선비족 사병들이 '육진기의'를 일으켜, 신속히 북위를 쇠락과 멸망의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한다.


효문제는 어려서 모친을 잃고, 그의 조모인 문명태후(명목상으로 조모이지만, 실제로는 혈연관계까 없다)이 그를 키워준다. 그리고 문명태후는 순수한 한족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이해가 되지 않지만, 실제로 정리에 들어맞고, 논리에 부합하는 주장이 나타난다: 효문제의 생모가 문명태후 풍씨(馮氏)이고, 양자는 말그대로 친모자관계이다라는 것이다.


이런 추단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명태후가 사망한 후, 효문제는 3년간 상복을 입기를 고집한다. 예제에 따르면, 우너래 자녀가 부모에 대하여 행하는 상례이다.

둘재, 효문제는 생모의 일족에 대하여는 냉담했고, 오히려 문명태후의 가족은 후대한다.

셋째, 문명태후는 권력욕이 극히 강하고 능력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효문제가 출생한 후 그녀는 즉시 조정에 관여하지 않고, 효문제를 기르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헌문제에게 권력을 돌려준다. 

넷째, 선비족은 '수계혼(收繼婚)'의 풍속이 있다. 즉 가업을 게승하는 아들이 부친의 생전 처를 처로 삼는다(생모제외).


우리는 이들 논거가 증거가 되는지 하나하나 분석해 보기로 하자.


3년간 상복을 입는 것은 관수(官修)의 사서(史書)이건, 야사이건 모두 효문제는 어려서부터 문명태후가 길러주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이 점을 보면, 문명태후는 그의 양모나 다름이 없다. 이는 의문이 없다. 그렇다면 모친에 대한 예제로 상복을 입는다고 해서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생모일족을 냉대한 것에 관하여는 확실히 이상하다. 통상적으로 말해서 모친은 자신때문에 일찌감치 사사당했는데, 등극후에 모친일족을 후대해주는 것이 하늘에 있는 모친의 영혼을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내심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효문제가 외척을 억누느려는 고려에서라고 하면 말은 된다. 다만 태후의 일족을 후대한 것에 관헤서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어쨌든 효문제는 태후가 길러준 것이다. 권력도 그녀가 물려준 것이다.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태후일족은 모후일족은 아니기 때문에, 설사 득세하더라도 발호하지는 못한다.


헌문제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효문제를 기르는데 전념한 것에 관하여, 한편으로, 황제의 친정은 원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당시 헌문제는 비록 14살에 불과하지만, 이미 아들을 낳았다. 자연히 성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때에 권력을 넘겨주는 것은 정리에 부합한다. 효문제를 기르는데 전ㅁㅕㅁ한 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문명태후는 이미 자신과 헌문제간에는 이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미래의 황제를 기르는 것을 통하여 영향력을 늘여가려고 했을 것이다. 이런 조치는 궁중정치에서 보기 드문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녀는 아주 강력한 권력욕을 지닌 여강자이다.


수계혼의 습속은 보통의 유목부락에서 성행한다. 북위가 창립된 초기에, 이미 계속 한화되기 시작했다. 설사 이런 사정이 제국의 변경에 있는 선비족 부락중에 나타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황궁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설마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알 숭 ㅣㅆ다. 이미 문관중에 주도적인 지위를 지닌 한족관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결과가 어떠하든지간에 모두 사서에 흔적이 남아 있다. 그외에 설사 이런 조치가 있더라도, 북위의 사서에서 아마도 기휘하거나 회피하였을 것이다. 다만 적대적인 남조에서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 리가 없다. 반드시 크게 써서 선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효문제와 문명태후가 친생모자간이라는 주장은 억지스럽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연히 진상이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장래 어느 날, 고고학적으로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