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신동팡(新東方) 창업자 위민홍(兪敏洪) 스토리

by 중은우시 2021. 11. 15.

글: 토조군(吐槽君)

 

나는 일찌기 붕괴의 끝자락을 걸은 바 있다

          -위민홍

 

베이징대학 삼각지(三角地)

 

1987년, 위민홍은 베이징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당시는 출국붐이 일어 위민홍 주변의 친구들은 하나하나 출국했고, 그는 그들을 선망해 마지 않았다.

 

위민홍도 그런 붐을 타고 2달간 공부하여 토플은 673점, GRE는 700점을 얻는다. 그리고 2,30곳의 미국대학에 입학신청을 내서 출국하고자 한다. 모든 것은 갖추어졌지만, 오직 동풍만이 부족하다. 그럼 동풍이 무엇인가? 바로 돈이다.

 

유학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위민홍은 학원을 찾아가서 토플과 GRE를 가르친다. 매달 수입은 1,2천위안으로 베이징대학의 급여보다 열배는 많았다. 위민홍은 만일 스스로 학원을 차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베이징대학에서 토플강좌를 개설했고, 금방 2,30명의 학생들이 등록을 했다. 

 

그런데, 베이징대학에 원래 토플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다. 위민홍이 한 일은 학교의 담장을 파내는 일이었다(학교에 손해를 끼치는). 물론 그는 학원의 허가증도 없었다. 베이징대학의 간부들이 위민홍을 찾아와서 매우 듣기 불편한 말을 했고, 쌍방은 말싸움까지 벌인다. 그리하여 위민홍은 베이징대학에서 징계를 받게 된다. 그의 '영광스러운 사적(징계처분서)'은 베이징대학의 유명한 삼각지에 1달간이나 붙어 있게 되고, 베이징대학의 교내방송에서 1주일간이나 보도하게 된다.

 

학교에서 징계를 받은 후, 위민홍은 철저히 버림받는다. 학교에서 나워주는 학교주택도 배정받지 못하고, 베이징대학에서 해외로 연수를 내보낼 때도 그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1990년, 위민홍은 사직서를 내고, 삼륜차 1대에 모든 살림을 싣고, 베이징대학을 떠난다. 그리고 육랑장(六郞莊)이라는 곳의 현지 농민에게 방 한칸을 임대한다.

 

중관촌이소(中關村二小)

 

위민홍은 영어공부의 붐이 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많은 학생들이 출국을 위해 절박하게 토플과 GRE성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두 시험은 비교적 난이도가 있어 전체 베이징대학에서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많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단어량이 2만개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위민홍은 폐결핵으로 병원에 1년간 입원해 있었다. 할 일이 없어서 죽어라 단어를 외웠고, 베이징대학을 졸업할 때는 그가 외우고 있는 영어단어가 2만개에 가까워졌다.

 

생각ㅇ르 했으면 바로 해야 했다. 그는 중관촌이소(중관촌제2소학교)의 교실을 하나 빌려 학생들을 모집한다. 그 교실은 낡았고, 20여평방미터에 불과했다. 비가 오면 비가 샜다. 어떤 학생은 등록하러 왔다가 교실을 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떠나기도 했다.

 

위민홍은 사방에 모집광고를 붙였다. 붙일 수 있는 곳이면 다 붙였다. 심지어 성병광고 옆에도 붙여서 보는 사람이 많도록 했다. 그래도 등록하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위민홍은 무료강의를 진행했다. 그가 무료강의를 진행한 곳은 중관촌이소의 운동장이었다. 음향설비도 없어서 그저 목소리를 높여서 강의해야 했다. 1회에 개략 십여명씩 등록을 했다.

 

학생이 적어서, 위민홍은 시간이 남았다. 학생이 그에게 얘기를 걸면, 이런 저런 얘기들을 모두 나누었고, 흥이 나면 학생에게 간식도 사주면서 밤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위민홍은 학생들에게는 유머스럽고 뜻을 가지라고 말하는 스타일이 잘 통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다음부터는 그런 방향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이렇게 한동안 강의를 하자, 위민홍은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된다.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인민대학, 베이징사범대학의 학생들이 모두 위민홍이라는 사람은 토를 GRE강의를 할 때, 열심히 하면서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한다고 소문이 난다.

 

등록하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중관촌2소의 교실로는 부족하게 된다. 위민홍은 베이징대학전교센터(電敎中心)에 연락해서 8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교실을 빌린다. 원래 적은 인원으로 강의하다가 갑자기 인원을 늘이게 되면 학생들로부터 불만이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원망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으로 강의에 임했다. 위민홍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노력하여 수업을 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해서 강의실에 웃음이 넘쳐났다.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한개의 반이 두개로 늘고, 두 개의 반이 네개로 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위민홍이 모두 감당할 수는 없게 되면서 강사를 고용해야 했다. 개설한 강좌도 계속 늘어났고, 한 반의 강의를 듣는 수도 계속 커졌다. 한번은 그가 베이징대학 화학루의 300명이 들어가는 교실을 빌렸는데, 개강때 500명이 왔다. 어떤 학생들은 아예 계단에 앉아서 들었다. 머리는 뜨겁고 엉덩이는 차가운 상태로.

 

이 상황을 보고 위민홍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다음에 학생모집을 할 때는 아예 우리 수업을 들으려면 이런 황경이다. 책상은 없고, 의자만 있다. 어떤 때는 의자도 없을 수 있어, 계단에 앉아 들어야 한다고 사전에 공고해버린다.

 

비록 강사를 고용했지만, 시간만 있으면 위민홍도 직접 강의에 나섰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급여를 줄 필요가 없으니, 돈을 아껴서 확대재생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위민홍은 강사들 중에서 반기를 들어 독립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자신의 수업을 잘 준비해서, 학생들의 눈에 가장 재미있는 강의로 여겨지게 했다. 그는 오너이면서 가장 유명한 강사였다. 그래야 사업이 안정되는 것이다.

 

단지 1개 과목만은 위민홍이 가르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GRE의 수학논리였다. 그래서 전문적인 고수를 초빙했다. 반년후 그 강사가 보수를 올려달라고 했다. 그의 말은 다 옳았다. '원장님, 당신은 다른 과목을 모두 가르칠 수 있지만, 이 과목은 못가르치지 않습니까. 다른 강사들도 못가르칩니다. 나에게 돈을 더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민홍이 묻는다. '얼마나 올려주면 되겠습니까?' 상대방이 대답한다. '이 강좌의 1/4의 수입을 저에게 주십시오' 위민홍은 머리 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만일 그에게 보수를 더 주게 되면, 다른 강사들도 마찬가지로 요구할 터였다. 그러니 그에게 보수를 더 줄 수는 없었다.

 

그 강사는 보수를 올려주지 않자 아예 강의를 하지 않았다. 위민홍은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돌려주어야 했다.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없도록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모든 과목에 2,3명의 강사를 두고, 특히 수학논리에는 4,5명의 강사를 두게 된다.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 외에도 위민홍은 하나의 핵심포인트를 깨닫는다. 우수한 강사를 장악하는 것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 점을 깨달은 후, 위민홍은 강사들에게 주는 급여를 배로 올린다. 동시에 자신의 유머스럽고 뜻을 키우도록 격려하는 스타일을 강사들에게 교육시킨다. 전문적인 내용은 잘 모르면 공부하면 된다. 그러나 유머스러운 이야기를 끼워넣지 못하면 강사로서의 인기를 얻을 수 없다. 그리하여 베이징대학에서 온 많은 강사들이 나중에 쫓겨나게 된다.

 

베이징시인재교류센터

 

학원을 하려면 학원허가증이 있어야 한다.

 

당시의 법규상으로 대학교수만이 연명으로 신청할 수 있고,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위민홍은 '동방대학'이라는 학원을 눈여겨 본다. 이 학원은 중국인민대학의 몇몇 교수들이 만든 것이고, 주로 검정고시시험을 대비하는 것이고, 외국어과목은 없었다. 위민홍은 이곳의 몇몇 교수를 찾아가서, 합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 교수들은 우리는 외국어는 가르칠 수 없다. 우리 이름으로 당신이 알아서 외국어를 가르치고, 우리에게는 이익을 나눠주는 방안을 만들어오면 좋겠다.

 

위민홍은 동방대학의 외국어학원은 내가 하겠다. 총수입의 25%를 나눠주겠다. 하겠는가? 위민홍의 제안을 들언 노교수들은 모두 미소를 띄며 동의했다.

 

노교수들의 학원허가증을 이용해서 위민홍은 바로 외국어학원사업을 크게 벌인다. 짧은 몇년이 지나고, 1993년 학원수입은 이미 6,7백만위안에 이르렀다. 원래 합의한 바에 따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노교수들은 백여만위안의 수입을 챙긴다. 위민홍으로서는 가슴아픈 일이었다.

 

위민홍은 속으로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내 이름으로 된 학원허가증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위민홍은 하이덴구의 성인교육국을 찾아가, 학원허가증을 신청한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는다. 위민홍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1,2주에 한번씩 교육국을 찾아가서 얘기를 나눈다. 반년가량이 지났을 때, 그들은 위민홍에게 말해준다. 위선생 당신은 학원허가증이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는 당신이 동방대학에서 오랫동안 해오면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만일 학원허가증을 갖고 싶으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다.

 

위민홍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원합니다." 교육국의 사람은 이렇게 말해준다. "학원허가증을 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번째 조건은 우리가 약간 느슨하게 적용해줄 수 있다. 당신은 베이징대학의 강사였으니, 다른 대학으로 따지면 부교수쯤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조건은 우리가 인정해줄 수 있다. 다만 두번째 조건은 전직장증명을 반드시 가져와야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는 머리에 찬물을 끼얻는 것같았다. 베이징대학에 가서 부탁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러자, 교육국의 사람이 다시 그에게 방안을 일러준다. 호구당안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가면 된다.

 

1980,90년대에는 베이징의 많은 사람들이 원래의 직장에서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전문적으로 호구당안을 보관하는 곳이 생기게 된다. 바로 인재교류센터이다. 만일 인재교류센터에서 위민홍에게 학원을 열어도 좋다는 증명을 해주면, 교육국도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다.

 

인재교류센터를 찾아갔으나, 위민홍은 다시 거절을 당한다. 그들을 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이유는 그가 사기칠 것이 겁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민홍은 다음날 다시 찾아갔는데, 문앞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게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위선생님, 안녕하세요? 위민홍은 멍해져서 물었다. 나를 아느냐? 그러자 그 여자아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토플강좌를 듣고 있어요라고.

 

그 여자아이의 도움으로 인재센터에서 증명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1993년 11월 16일, 위민홍은 드디어 학원허가증을 받는다. 그날은 큰 바람이 불었고, 길가에는 버드나무잎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위민홍은 자전거를 타고 갔지만, 마음은 따스했다.

 

위민홍은 노교수들을 만나서 다시 제안한다. 나도 학원허가증이 있다. 더 이상 25%의 이익배분은 해줄 수 없다. 그러자 노교수들은 아주 실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좋게 만났으니 좋게 헤어지자. 학원허가증 받은 걸 축하한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동방대학의 외국어강의는 이미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위민홍이 떠나자 마자, 다른 누군가가 그들 노교수를 찾아와서 이름을 빌려주면 25%의 이익을 나눠주겠다고 하였다.

 

위민홍이 그 소식을 듣자, 급히 다시 그들 노교수를 찾아간다. 그리고 다시 그들에게 제안한다. 새로 찾아온 사람들이 25%를 주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차라리 내가 매년 20만위안을 드릴테니 이 이름을 3년간 내가 계속 쓰게 해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빌려주지 말라. 노교수들은 다시 상의한 후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위민홍은 더 이상 동방대학외국어배훈부의 명의로 학생을 모집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 '신동방'으로 학생들을 모집한다.

 

묘봉산(妙峰山)

 

신동방의 간판이 걸리자, 어떤 학생들을 등록하기 위하여 밤을 새워 줄을 섰다. 많은 외지학생들은 밤에 기차를 타고 와서 주말수업을 듣고, 일요일에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갔다.

 

위민홍은 학생모집에도 비결이 있었다. 가장 먼저 등록받은 학생은 베이징대학 아니면 청화대학이었다. 이어서 푸단대학, 통지대학, 우한대학, 난징대학, 난카이대학등 명문대학들이었다. 등록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아질수록 토플과 GRE점수는 높을 수밖에 없다. 신동방에서 토플 만점이 나와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후에도 5,6명의 토플만점자가 나오게 된다. 이어서 GRE만점자, GMAT만점자도 나온다.

 

신동방에서 만점자를 배출한다는 것은 학생을 모집하는데 좋은 재료였다. 또 다른 하나의 재료는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위민홍이 가장 잘하는 것은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다. 신동방을 처음 만들었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어떻게 뜻을 이루었는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기한 효과를 거둔다.

 

외지학생들이 베이징의 신동방으로 와서 수업듣는데 편의를 위해서 위민홍은 기숙반을 만들기로 한다. 학생들에게 고생하면서 공부하려는 의식을 길러주기 위해서인지(아니면 돈을 아끼기 위해서인지) 장소를 묘봉산 자락에 있는 47중으로 한다. 이곳의 버려진 2개의 교사를 교실과 숙사로 개조한다.

 

전체 숙사에 화장실이 하나도 없다. 위민홍은 숙사건물 바깥에 간이화장실을 만들었다. 전통농촌의 초가집같은 유형이었고, 가림막도 없고, 변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학생들은 수업을 듣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어떤 학생은 이렇게 농담했다. 냄새를 참기 어려우면 신동방의 그 명언을 외웠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으면, 인생은 결국 휘황찬란해진다."

 

나중에 숙사건물이 부족해서 위민홍은 두 눈을 굴려 버려진 고묘(古廟)를 확보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연영(李蓮英, 서태후의 총애를 받은 환관)이 피서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고묘의 오래된 건물은 국가의 문화재보호대상이었다. 위민홍은 국가문물국의 의견을 물었는데, 국가문물국의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주된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안을 숙사로 고쳐도 괜찮다. 위민홍은 그 말을 듣고, 이연영의 옛집을 고쳐서 수십칸의 숙사를 만들고, 일,이백명의 학생을 받아들인다.

 

신동방의 묘봉산기숙반은 십여년간 지속된다. 1993년부터 2010년까지. 거기에는 안허촌(安河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의 주민들은 낡아빠진 이연영의 별장에 살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방을 지어 학생들에게 빌려주고 돈을 번다. 학생들이 많아질수록, 촌민들은 더욱 돈을 벌었다. 위민홍이 기숙반을 옮겨갈 때, 마을의 주민들은 크게 실망하여, 길을 막고 떠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인기가 좋았으므로, 신동방의 외국어반은 1년내내 운영되었고, 명절에도 쉬는 법이 없었다. 섣달그믐날, 정월초하루에도 수업을 했다. 위민홍도 기숙반의 학생들과 함께 명절을 보냈다. 만두를 거의 10년간 빚었고, 가족들과 명절을 보낸 적이 없었다.

 

가족을 얘기하자면, 신동방은 한 때 가족기업같았다. 위민홍의 출발점은 역시 돈을 아끼는 것과 효율을 높이는 것이었다. 고기를 한 솥에 넣어서 끓이면, 급여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위민홍의 가족들은 신동방에 들어온 후 8시간근무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다. 먹고 자는 것도 함께 해서 비용을 크게 줄였다.

 

이런 가족모델은 사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큰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리하여 신동방은 한동안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많은 경우 위민홍이 한 말을 그의 어머니가 듣지 않고, 그의 처가 듣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위민홍도 그의 어머니의 말이나 그의 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각자 따로 놀았고, 직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일반직원으로서는 위민홍의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잘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위민홍이 앞장서서 이렇게 하다보니 다른 신동방의 고위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무슨 고모 이모, 전체 신동방내부는 엉망진창이 되고, 마치 궁중투쟁드라마처럼 되어 버렸다.

 

가족들을 데려다 쓰는 것으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 신동방의 고위층은 회의를 열어 이렇게 결정한다: 위민홍의 체면을 봐줘서 다른 파트너들이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모든 경영진의 가족들은 신동방을 떠나야 한다. 다만 위민홍은 예외이다. 어쨌든 신동방의 창업자이니, 당신의 어머니, 자형은 이미 신동방에서 오래 일했다.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가족구성원이어도 남아 있어도 되고,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다만 다른 사람의 가족구성원들은 모두 신동방을 그만두어야 하고, 한명도 남겨서는 안된다.

 

위민홍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만 특별대우받으면 앞으로 사람들에게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쾌도난마식으로 반년의 시간을 들여 자신의 가족구성원들도 모두 내보낸다. 그의 강경한 모친을 포함해서. 이후 위민홍의 모친은 반년동안 그에게 밥을 해주지 않았고, 위민홍은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밴쿠버와 뉴저지

 

1994년, 신동방의 1년총수입은 천만위안을 넘어선다. 바로 이때 위민홍이 이전에 연락했던 미국대학에서 그에게 합격통지서를 보내온다.

 

그는 그 합격통지서를 손에 넣고 계속 쳐다보다가 결국 마지막에 쓰레기통에 쳐넣는다.

 

1년후, 위민홍은 출국한다. 그때는 유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이다.

 

위민홍이 처음 도착한 곳은 캐나다의 밴쿠버였다.

 

위민홍은 세관을 나서서 2시간을 기다린다. 멀리서 동기동창인 쉬샤오핑(徐小平)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을 마중하러 오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반가워하며 얘기를 나눈다. 위민홍은 쉬샤오핑이 밴쿠버에서 실업상태라는 것을 발견한다. 아직 신용카드도 없어서, 달러수표로 지급했다. 위민홍은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1만달러를 환전해서 갔다.

 

저녁이 되어 쉬샤오핑은 위민홍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간다. 한 수퍼마켓에 있는 식당인데, 차량을 마켓입구에서 가까운 주차장에 대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 대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가까운 곳은 2캐나다달러를 추가로 내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민홍은 그것을 보고 쉬샤오핑의 현재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다가, 쉬샤오핑은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노래하는 와중에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위민홍이 묻는다. 너의 이상은 무엇이냐?

 

쉬샤오핑이 대답한다: 귀국하여 음악을 하는 것이고, 레코드회사를 창업하는 것이다.

 

위민홍이 다시 묻는다. 레코드회사를 차리려면 얼마나 드는 것이냐?

 

쉬샤오핑이 대답한다: 개략 30만위안정도 들 것같다.

 

위민홍이 말한다: 그럼 됐다. 내가 30만위안 주겠다. 다만 내 생각에 레코드회사는 돈을 못벌 것같다. 만일 네가 귀국해서 나와 같이 신동방을 하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쉬샤오핑은 그의 말을 듣고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면 당연히 좋지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쉬샤오핑은 그날 저녁 위민홍과 신동방에 가입하기로 확정한다. 그후 그는 위민홍을 데리고 오타와의 댄스클럽을 데려가주어서 안목을 넓히게 해준다.

 

오타와의 댄스클럽을 간 다음 날 위민홍은 보스턴으로 날아간다. 거기에서 그는 랍스터를 맛보지도 않고, 친구에게 차를 빌려 보스톤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내려간다. 하버드대학, 예일대학, 맨해튼을 지나 최종적으로 그의 동기동창 왕창(王强)이 있는 뉴저지로 향한다.

 

왕창은 당시 제법 잘 살고 있었다. 저명한 벨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위민홍은 그에게 신동방의 발전상황을 설명하고, 연수입 천만위안, 이윤도 백만위안이라는 것을 얘기한다.

 

다음 날, 왕창은 위민홍을 한 중국식당으로 데려가서 식사를 한다. 식당에 들어서자 마자, 한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한다. 위선생님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왕창이 깜짝 놀란다. 여기서도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구나. 위민홍은 가볍게 미소지으면서 그들은 당초 나의 토플반에서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고 지금은 미국에 유학을 왔다. 식사를 마치고 두사람은 프린스턴대학의 캠퍼스를 산보했다. 그리고 또 다른 중국학생도 위민홍을 보고 인사를 했다.

 

왕창은 그제서야 마음이 동했다.

 

뉴욕거래소

 

파트너도 있고, 더 많은 인재들이 가입하자, 신동방의 업무영역은 나날이 넓어졌다. 규모도 갈수록 커졌다. 돈은 밀물처럼 들어왔다. 밤이 되면 몇몇 파트너들은 맥수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돌연 이런 구호를 만들어낸다: 신동방이 할 것은 출국유학의 교량, 귀국창업의 무지개가 되자.

 

이 구호가 나오자, 신동방의 스토리는 다시 한번 가국정회의 광환을 두르게 된다. 신동방은 중국의 아이들로 하여금 출국하여 공부를 심화하게 하고, 더 많은 첨단과학기술성과를 낼 수 있어 조국에 공헌하게 한다. 다만 현실의 다른 한 끝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고, 출국유학을 해서는 단지 그린카드를 받아 이민하고, 대량의 인재유실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동방의 미래의 길을 탐색하기 위해, 위민홍등은 왕밍푸(王明夫)의 자문팀을 초빙한다. 왕밍푸가 한 첫번째 일은 신동방의 재무상황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신동방의 연수입은 2,3억위안이고, 이윤은 개략 1억위안이었다. 그는 상장을 건의한다. 중국상장회사의 평균시가총액은 이윤의 50-100배이다. 신동방이 상장하면 시가총액은 100억을 넘을 터였다.

 

자문을 거친 후, 신동방의 모든 고위층은 환호작약한다. 빨리 상장하자. 만일 신동방의 시가총액이 100억위안이라면 1%만 가져도 1억위안이 아니냐. 위민홍은 여러분들이 모두 상장하고 싶다면 그 방향으로 가도록 하자고 말한다.

 

당시의 신동방은 단지 학원이었지, 회사가 아니었다. 반드시 회사를 설립해야 했다. 그래야 상장할 수 있었다. 위민홍등은 "동방인"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등록한다. 나중에 이상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신동방은 브랜드이름으로 불명확하다고 하여 공상국에서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민홍은 다시 한번 그의 장기를 발휘한다. 죽어라 달라붙는 것이다. 공상국을 찾아가서 계속 상의한다. 신동방은 이미 유명한 교육브랜드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본사의 명칭은 당연히 학교들의 명칭과 일치해야 한다. 결국 공상국도 동의했고, 동방인이라는 세 글자를 신동방이라는 이름으로 고칠 수 있었다.

 

회사등록을 마쳤고, 이어서는 지분을 나누어야 했다. 신동방에 공헌이 있는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상의를 거쳐 위민홍이 55%를 가져가고, 동시에 위민홍의 55% 내에서 10%는 나중에 가입하는 사람을 위해 남겨두기로 한다. 나머지 10명이 45%를 나눠가졌다.

 

신동방이 변혁을 하는 몇년동안 개략 2001년에서 2006년까지 신동방의 고위층은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갈등이 계속되었다. 기괴한 것은 신동방의 업무는 매년 30-40%씩 성장하는 것이었다.

 

이런 국면에 직면하여 위민홍은 회의를 개최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한다. 동사장의 직위를 내려놓고 그저 주주로서 남겠다고 했다. 동사장은 왕창이 맡고, 부동사장은 쉬샤오핑이 맡는다. 후민(胡敏)이 총재를 맡았다.

 

이렇게 몇년을 하였지만 다툼은 끊이지 않고 오히려 계속 심해졌다. 2004년초에 이르러, 신동방은 미국상장을 계획한다. 관건적인 순간에 모든 사람들은 역시 위민홍이 이끄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를 다시 동사장의 자리에 올린다.

 

신동방이 미국에 상장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미국의 저명한 타이거펀드가 찾아온다. 이 펀드의 중국총대리인은 천샤오홍(陳曉紅)이다. 그는 위민홍에게 배운 학생이었다. 타이거펀드는 신동방에 3천만달러를 투자했다. 이는 미국시장에서 신동방을 보증서준 것이나 같았다. 당시 신동방의 평가금액은 3억달러였고, 타이거펀드는 신동방의 10% 지분을 차지한다. 나중에 그들은 몇배 몇십배의 이익을 얻어간다.

 

2006년 9월 7일, 신동방이 미국뉴욕거래소에 상장한다. 위민홍등은 종을 치러 올라갔다. 종소리가 울리면서, 신동방은 미국에 상장한 최초의 중국교육기업이 된다.

 

상장한당일저녁, 뉴욕거래소에서는 초대연을 베푼다. 모든 사람이 취했고, 위민홍은 붉어진 얼굴로 술기운을 풍기면서 신동방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얘기했고, 미래에 더욱 휘황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만찬이 끝난 후, 위민홍은 허드슨 강변을 걸으면서 뉴욕이 야경을 보았다. 강가의 벤치에 1시간여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100년후

 

2012년 7월, 미국의 머디워터스는 공매도조사보고서를 내놓는다. 합계 90여페이지로, 신동방의 재무회계가 조작되어 있고, 학생수, 교학구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짧은 이틀동안 신동방의 주가는 폭락했고, 20여달러에서 9달러까지 떨어져 시가총액이 60%가 날아갔다.

 

머디워터스는 중국회사에 대한 공매도를 주로 했다. 회사명칭은 중국의 성어인 "혼수모어(渾水摸魚)"에서 왔다. 이 회사의 영리모델은 바로 공매도이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공매도조사보고서가 나오면 그들의 '사냥감'의 주가는 폭락해버린다는 것을. 그 기회를 틈타 머디워터스는 큰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이때 위민홍은 점심식사자리를 마련하여 많은 기업가들을 초청했는데, 마윈, 류촨즈, 궈광창등도 있었다. 식사때 위민홍은 신동방이 직면한 위기를 설명한다. 거기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에게 솔직히 말해달라. 머디워터스의 당신에 대한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는 너를 믿는다. 만일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솔직하게 말해달라 우리가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 만일 사실이 아니면 우리가 신동방의 주식을 매입해서 주가를 끌어올리도록 해주겠다.

 

위민홍은 말한다. 신동방은 지금까지 회계조작을 한 적이 없다. 이것은 나의 마지노선이다.

 

위민홍의 말을 듣고, 기업가들은 더 말할 필요없다. 술이나 마시자고 한다. 

 

그날 저녁 개략 3억달러의 자금이 신동방의 주식에 몰려든다. 이틀만에 신동방의 주가는 12달러로 끌어올린다.

 

그후, 신동방의 주가는 처음 상장한 10년동안 오래 20달러선에 머물렀는데, 2015년에 급격히 상승하여 단기간내에 80달러를 찍는다. 2018년 6월 1일 신동방의 주가는 108.3달러에 이르러 2014년과 비교하여 359%상승했다.

 

2016년 4월 23일, 신동방의 주식이 점차 상승할 때, 위민홍은 중국기업가구락부 10주년기념식에서 득의하여 말한다:

 

미래 10년을 보면 알리바바, 텐센트, 샤오미, 러스가 반드시 경제발전의 시야에 있을 것이다. 다만 백년이후, 중국경제의 발전과 중국의 창성에 맞추어 이들 회사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백년이후 알리바바같은 류가 나타날 것인데, 어떤 기업이 중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보증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생각에 두 글자이다. 교육. 그래서 백년후 신동방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위민홍이 이런 말을 할 때, 단하의 마윈은 계속 고개를 젓고 있었다. 위민홍이 그 모습을 발견한 후 묻는다: 마윈, 왜 고개를 흔드는가? 네 생각에 내 말이 틀렸다고 보는가?

 

마윈이 대답했다. 너는 두 가지 논리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첫번째 논리적인 잘못은 10년이내에 알리바바등 회사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현재 그 어느 인터넷회사도 진정 3년을 잘나갈 수 없다. 두번째 논리적인 잘못은 교육은 남겠지만, 신동방이 반드시 남는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건 다른 이야기이다. 교육과 신동방은 등호가 아니다.

 

마윈의 대답을 들은 후 위민홍은 웃었지만, 표정은 난감함을 숨기지 못했다.

 

2021년, 중국의 "쌍감정책"이 실행되면서, 교육사업은 거대한 격변을 맞이한다. 신동방의 주가는 원래대로 돌아와서 90%가 폭락했고, 시가총액은 2000여억위안이 날아갔다.

 

한 벤처캐피탈의 인사는 이 길은 이미 막혔다고 말한다.

 

농민의 아들

 

2021년 11월 4일, 위민홍은 단체방에 글을 하나 올린다:

 

교육학원시대는 끝났다. 신동방은 새것인 책상과 의자를 시골학교에 기부했고, 이미 8만세트에 이른다.

 

또 하나의 일이 있다. 위민홍은 이렇게 말한다. 신동방의 장부상 현재 100억여위안의 현금이 있다. 이 돈은 건드릴 수 없다. 만일 신동방을 문닫게 되면 이 돈은 첫째, 가장과 학생들에게 돌려주어야 하고, 둘째 떠나는 직원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절대로 채무하나라도 남기지 않겠다.

 

일시에 위민홍을 사내대장부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폭증했고, 인터넷에 퍼져간다.

 

시대의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위민홍은 스스로 일어서서 거기로 들어왔고, 체면을 지키면서 물러났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신동방의 젊은이의 뜻을 격려하는 문화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그저 연설에서 나온 감정이며 단지 효과적인 상업수단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위민홍은 기회를 잘 잡았고, 죽어라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런 사람은 개혁개방이후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섰다. 밀물이 밀려들 때는 그 밀물을 즐겼다. 그러나 조수가 물러나면, 아무리 아쉬워도 물러서야 한다. 옛말에 있는 것처럼. 운이 밀려올 때면 하늘과 땅이 모두 도와주지만, 운이 떠날 때는 영웅도 자유롭지 못하다.

 

위민홍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특질이 있다. 따스한 마음이 흐르는 질박함과 선량함이 남아 있다.

 

처음에 영어학원을 만들 때, 경쟁상대인 학원의 직원이 광고전단지를 좋은 곳에 붙이기 위해 위민홍의 직원을 칼로찌른 사건이 있었다. 나중에 그 학원의 여자오너는 강사들이 급여가 적다고 파업을 하여 수업을 진행할 수 없고, 자금줄이 끊어져서 학원비를 돌려줄 수도 없어, 투신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위민홍은 엣 원한은 잊고, 자신이 도와주어 강사들의 급여를 주게 해서 급한 불을 끄도록 도왔다. 이렇게 덕으로 남에게 원한에 보답하는 것은 '통이 크다'는 말 하나로 개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은 내심의 선량함에서 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인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고귀한 유전인자이자,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가장 아껴야할 마음이기도 하다.

 

필자는 위민홍이 직접 쓴 전기 <나는 일찌기 붕괴의 끝자리를 걸었다>에서 이런 선량함과 질박함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위민홍은 말했다: 나는 농민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