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진천설(一眞濺雪)
1986년말, 베이징, 상하이, 허페이...등지의 대학생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탐관오리의 부패를 처벌하고, 정치체제개혁을 진행하고, 민주, 자유를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당과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등소평과 그 주위의 완고한 원로들은 등소평의 추종자들인 리펑, 천시통같은 자들과 함께 학생들의 행위는 국외반중세력의 책동에 의한 반당, 반사회주의적인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당시 당중앙주석을 맡고 있던 후야오방등 당내의 개혁파들은 학생들의 행위를 애국행위로 보았다. 그들의 많은 요구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정확하게 인도하고, 설명하고 소통하여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학생들에 대한 무력진압에 반대했다. 후야오방과 다른 개혁하관리들이 고집하여 학생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사태가 가라앉은 후, 등소평과 원로들 및 그 추종자들은 후야오방을 대표로 한 개혁파들에게 크게 불만을 가지게 된다. 등소평은 후야오방이 자신의 뜻에 따라 학생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하지 않은 것이 등소평의 당내, 국내의 태상황으로서의 존엄을 해쳤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등소평과 원로들 및 그의 추종자들은 후야오방등 개혁파들이 1981년 반'자유화', 1983년 반'정신오염'과 1986년의 학생시위신업시 힘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후야오방에게 당주석의 직위를 사임할 것을 압박했고, 그후 후야오방은 집에서 쉬면서 반연금상태에 처한다. 나머지 개혁파관리들도 당적을 박탈당하거나 관직을 면직당하거나 강등당했고, 한명도 그 화를 벗어날 수 없었다.
등소평이 주장한 소위 개혁개방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동시에 완고하게 '4개항기본원칙'을 견지하는 것이고,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견지하는 것이었으며, 등소평의 개인독재체제를 견지하는 것이었다. 정치체제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느다. 그리하여, 각급 당정기관과 각급관리의 권한은 전혀 효과적으로 견제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위로는 중앙에서 아래로는 향촌에 이르기까지 부정부패가 흥성하고 독재권력과 흑사회세력이 횡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체 사회는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관리와 그 자녀와 친지등 소수인들만이 갑자기 부자가 된다. 그리고 많은 인민군중들은 압박을 받아 생활이 힘들어지고, 도탄에 빠져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된다. 그외에 1978년이후 국가를 개혁개방하고 대외교류가 증가하면서, 학생과 인민대중의 견식과 안목도 크게 제고되었고, 그들의 인류사회의 보편적가치에 대한 인식과 갈망도 크게 제고되었다. 그들은 점차 수십년간 굴레지워졌던 중공에 우롱당하고 기만당하는 상태에서 각성하게 되었고, 엄혹한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사회, 경제, 정치의 폐단의 근원이 중공의 일당독재와 등소평의 개인독재에 있다고 깨닫게 만든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던 학생, 민중들은 마침내 1989년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6.4 천안문사태를 일으킨다. 수백만의 민중이 길거리로 나와 학생들이 부정부패단속, 탐관오리처벌, 독재반대, 민주와 자유, 평등요구, 생존요구를 내세우고 시위, 정좌(靜坐), 단식활동을 벌이는 것을 지지했다.
1989년 4월 15일, 학생, 민중의 옹호를 받고 진정한 정치체재개혁을 진행하고 학생, 민중의 민주요구를 동정, 지지하여 등소평에게 쫓겨난 전 중공중앙총서기 후야오방이 심장병발작으로 사망한다. 베이징, 상하이등지의 대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여러 방식으로 추도회를 연다. 베이징의 많은 대학교학생들은 천안문광장으로 나가 추도회를 연다. 그리고 후야오방에 대하여 다시 평가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떄 천안문광장으로 가서 추도회에 참가한 학생이 수만명에 달했다. 학샐들은 추도회를 빌미로 마음 속에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 자유와 부정부패처벌의 요구를 하게 된다. 많은 시민들도 길거리와 천안문광장으로 몰려가 학생들이 시위활동과 정치적요구를 지지했다. 이런 활동과 정치적요구는 전국각지에서 갈수록 많은 민중과 학생들의 지지, 호응을 받았고,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왔다. 4월 22일에 이르러, 후야오방 추도회가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다. 천안문광장과 부근의 길거리는 정좌, 수업거부 및 시위에 참가한 학생, 민중이 이미 수십만에 이른다. 그리고 학생과 민중들은 시위, 정좌, 수업거부와 민주,자유의 요구 및 부정부패엄벌을 요구하는 활동이 신속하게 전국의 각대도지, 중도시로 퍼져간다.
학생, 민중의 정당한 요구는 당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자, 전국각지에서 시위, 정좌 ,수업거부에 참여하는 규모가 갈수록 커진다. 사람수도 갈수록 많아진다. 이런 형세하에서, 중국의 실질적인 군정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상황' 등소평은 그해 4월 25일 그를 따르는 '원로'들과 중앙군정책임자를 모아서 비밀회의를 열고 거기에서 학생과 민중들이 헌법이 부여한 시위와 자기의사를 표현할 권리에 따라 이루어진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평화시위활동을 마음대로 '동란'이라고 규정해버린다. (이 규정은 이후 '반혁명폭란'으로 업그레이드되고, 계엄과 군경을 동원하여 무력진압하는 복선이 된다). '태상황'의 이런 '성의(聖意)'가 발표되자, 다음 날 중공의 각 어용매체는 속속 <반드시 기치선명하게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라는 사론을 실어, 학생, 민중의 평화적시위, 청원, 정좌, 수업거부활동을 '동란'이라고 규정지어 학생, 민중들의 더욱 큰 불만을 산다. 그리하여 4월 27일 학생, 민중은 더욱 큰 규모의 시위를 진행한다. 당국은 비록 대표가 나서서 학생들과 대화했지만, 아무런 문제해결의지도 없었고, 학생 민중들에 대해 '나중에 두고 보자'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생, 민중들의 더욱 큰 불만을 산다.
5월 18일 등소평은 다시 한번 '태상황'의 신분으로 '원로'들과 중앙당정최고책임자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한다. 1989년 상반기 동유럽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동유럽각국의 공산당 및 그들의 일당독재정권은 이미 비바람에 흔들리며 곧 붕괴될 상태에 처했다. 큰형님인 코민테른의 중견역량인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에서 진행하던 정치경제체제개혁, 민주화 자유화의 낭조가 이미 소비에트대지를 광범위하게 석권하고 있었다. 이런 국제상의 환경과 국내학생, 민중의 민주, 자유에 대한 요구과 중공의 일당독재를 끝내자는 목소리는 등소평과 그의 머리가 굳은 '원로들' 및 추종자들에게 자신들의 말일이 다가왔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러한 공산당과 독재정권 및 중공통치집단의 근본이익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등소평은 공산당의 일당독재통치와 통치집단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본성이 다시 한번 나타난다. 이번 회의에서, 등소평은 학생들의 배후에 국내외의 반중, 반공세력이 있어서 조종하고 있고, 학생, 민중의 합법적인 평화시위를 '반혁명폭란'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즉시 계엄을 실시하여, 수십만의 야전군으로 하여금 탱크, 기관총, 자동소총으로 학생, 민중에 대한 무력진압, 도살을 결정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등소평은 회의때 20만을 죽여서 20년안정을 되찾는다면 아깝지 않다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5월 19일, 등소평의 충실한 주구인 당시 국무원총리 리펑은 등소평의 지시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을 실행한다. 동시에 등소평은 중앙군사위주석의 명의로 중앙군사위의 손발인 수십만야전군을 베이징부근의 각성에서 신속히 베이징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한다. 북경시민, 학생들의 여러 저지에도 불구하고, 탱크, 장갑차를 몰고 천안문광장에서 정좌, 단식, 항의하는 학생, 민중들을 향했다. 6월 3일부터 4일새벽까지, 중국의 군대는 탱크, 기관총, 자동소총으로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학생, 민중들에게 미친듯이 난사하여, 수천의 학생민중의 사상자를 낸다.(어떤 국내인사에 따르면 사상자가 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당국의 이런 류의 사건에 대한 엄격한 기밀유지전통에 비추어보면, 지금까지도 '6.4'사태의 확실힌 사상자숫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등소평이 주도하는 중공이 만든 사상유례없는 6.4천안문사건이다.
인류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정당, 그 어느 정부, 그 어느 독재자도 감히 수십만대군을 동원하여 본국의 평화적시위자이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학생, 민중에 기관총,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탱크, 장갑차로 깔아뭉개서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혹한 결과를 조성한 사례는 없다. 이는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같은 살인광마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런데 등소평은 그런 일을 했을 뿐아니라, 죽을 때까지도 아무런 유감도 표시하지 않았다. 필자는 여기에서 단지 사상유례없다는 말만 했고, '공전절후'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하여 등소평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공당국이 학생 민중을 살륙하는 방면에서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없다. 2008년 "3.14"사태를 보자. 후진타오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공독재정권은 군대, 무경을 출동시켜 탱크, 장갑차, 기관총, 자동소총을 가지고 평화시위를 벌이는 티넷민중들을 피비린내나게 진압한 바 있고, 2009년 "7.5"사태때 신장에서 평화적시위를 벌이는 위구르족민중을 피비린내나게 진압한 바 있다. 그러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공이 중국의 일당독재의 독재체제로 존재하는 한 이후 다시 중공의 폭정에 반대하는 군중운동이 규모에서 1989년의 "6.4"사태를 초과할 수 있다. 그러면, 중공당국 및 등소평의 계승자들은 학생, 민중을 진압 도살하는 방면에서 아마도 등소평보다 더욱 '휘황'하고 '풍성한 업적'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친구들과 "6.4"사태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등소평이 막후에서 수십만의 군경을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탱크, 장급차, 기관총, 자동소총을 사용하여 평화시위를 벌이는 학생, 민중을 진압할 때, 어떤 사람은 등소평이 일시적인 잘못된 선택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등소평이 리펑, 천시통등에게 속아서 이런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더더욱 황당한 사람은 등소평이 '파킨슨병'과 전립선병을 치료하는 약물을 먹은 후, 정서가 격동되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기실 그렇지 않다. 이상은 그저 중공과 그 어용학자들이 퍼트리는 연막탄이다. 그 목적은 단지 등소평의 "6.4사태"에서의 학생민중을 학살한 책임을 벗겨주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등소평의 영명하고, 위대하고, 정확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서의 빛나는 이미지를 유지시켜주려는 것이다.
"6.4"사태때, 등소평이 군대를 동원하여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학생, 민중을 무력진압하기로 결정한 것은 등소평이 일시적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워 내린 잘못된 결정도 아니고, 리펑, 천시통등에게 속아서 내린 잘못된 결정도 아니며, 더더구나 약물반응으로 내린 잘못된 결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등소평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일관된 냉혹무정하고 인민의 생명을 무시하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등소평은 중공의 일당독재통치와 통치집단의 근본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일관된 일처리방식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이다.
먼저, 등소평은 지금까지 침착하고, 냉정하고, 생각이 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절대로 일시적으로 머리가 흐트러져 학생민중을 무력진압하는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리가 없다. 등소평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심사숙고한 결과이다. 1989년초 국제적인 민주화, 자유화의 붐이 소련, 동유럽을 휩쓸고, 이들 국가의 공산정권은 전면적으로 붕괴될 위기에 처한 국제적인 환경이 있었다. 전국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 민중들이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고 중공의 일당독재를 끝장내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등소평은 분명히 중공과 그 개인의 독재통치가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다. 중공과 등소평 개인의 독재통치 및 중공통치집단의 근본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등소평은 심사숙고후에 중공과 등소평개인의 독재통치 및 중공통치집단의 근본이익을 위하는 측면에서, 무슨 일이든 해낸다는 일처리방식대로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하는 학생, 민중들에 대하여 무력진압과 학살하기로 결정내리게 된 것이다.
등소평이 리펑, 천시통등에 속아셔 이런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견해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등소평은 정명하고 노련하다. 그가 리펑, 천시통같은 자들에게 쉽게 속을만큼 어리석지 않다. 국내외 공산독재통치에 약간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산독재통치의 양대지주에 대하여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는 군대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기관이다. 공산독재권력의 최고통치자는 독재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민중의 반항을 진압하기 위하여, 그의 정적들을 겁주기 위하여, 두가지 도구를 자신의 손아귀에 꽉 쥐고 있게 된다. 스탈린도 그러했고, 모택동도 그러했고, 등소평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등소평이 비록 집안에 앉아 있지만, 전국,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의 상황은 리펑, 천시통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등소평이 리펑, 천시통에게 속을 경우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외에 등소평은 시위학생민중에 무력을 동원하여 진압한 것이 한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등소평이 일관되게 인민을 초개처럼 여기고, 민중의 생사는 도외시하는 냉막한 본성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정이라고 본다. 중공의 일당독재의 독재통치와 통치집단의 근본이익과 비교하면, 수천만명의 생사는 등소평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하물며 천안문광장의 수천학생, 민중의 사상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1950년대말에서 1960년대초에 이르는 시기에 아사자가 수천만명이 이르렀던 1960년 전국각지에서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보고서가 당중앙으로 눈송이처럼 날아왔다. 그리하여 중공중앙정치국은 상위회의를 개최한다. 출석한 사람은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주덕, 등소평, 임표, 진운등이다. 회의에서는 전국도처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하에서, 국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540여만톤의 예비식량을 풀어 굶은 백성들에게 나눠줄 것인가의 문제를 논의했다. 상식대로라면, 소위 예비식량은 이런 기근사태, 전쟁등 유사시에 대비한 것이 아닌가? 전국에서 수천만명이 굶어죽는다면, 토론할 것이 뭐가 있는가. 하루빨리 전국각지에서 필요한 식량을 보내주는 것이 맞다. 그렇게 하면 수천만명의 기민들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지 않은가. (당시의 상황에 따르면 1톤의 양식을 풀면 개략 십여명가량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1톤에 10명이면 1인당 200근(100킬로)이다. 1년으로 계산하면 1인당 1일 5.48냥이다. 여기에 기아민이 원래 1인당 매일 3-4냥으로 게산하면 1인당 최소한 8,9냥의 식량을 나눠줄 수 있고, 그러면 겨우겨우 아사하지는 않도록 할 수 있다)
이번 정치국상위회의에서 유소기, 주덕, 진운은 모두 전국의 아사자들이 심각한 지경에 처했으니, 예비식량을 빨리 풀지 않으면 첫째,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어죽을지 모르고, 둘째, 굶주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산통치에 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하루빨리 식량을 풀어 이재민들을 구해주자고 한다. 그러나 간사하고 교활하며, 모택동의 뜻이 무엇인지만 바라보는 주은래는 모택동이 아직 의사표명을 하지 않으니,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임표는 그 말을 들은 후 이렇게 발언한다: 해방군에 대한 공급만 보장되면 오백만해방군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임표도 성격이 냉막하고 민중의 생사는 돌보지 않는 냉혈동물이다). 그의 뜻은 해방군의 식량공급만 보장해주면 일반백성들에게 식량을 풀어서 구해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때 등소평이 발언한다: 우리 수백만 간부, 수백만 군대는 모두 540만톤의 식량에 의존하고 있다. 농민은 식량이 없으면 초근목피로 살 수 있다. 간부, 군대는 식량이 없으면 초근목피도 할 수 없다. 등소평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창고를 열어 식량을 풀지 말자고 한 것이다. 등소평은 수천만의 아사자들의 생명을 돌보지 않는 냉막함을 보여주었다. 공산당의 독재정치를 유지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런 통치도구인 수백만군대, 수백만간부와 비교해서, 수천만의 굶주린 백성들의 생사는 등소평의 마음 속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택동이 결정을 내린다: 식량을 풀지만 전부 풀지 않는다. 540만톤의 중앙예비식량중에서 일부를 아사자가 가장 많은 지방에 나눠준다. 모택동이 이렇게 한 것은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가련하게 여겨서가 아니다. 모택동이 1957년 소련에서 10월혁명 40주년을 기념할 때 거행한 전세계 공산당, 노동당대표대회에서의 발언을 보자. 모택동은 이 회의에서 이렇게 발언한다: 우리 중국공산당원은 핵전쟁을 겁내지 않는다. 핵전쟁을 벌이면, 중국의 6억인구중 3억이 죽고 남은 3억이라도 핵전쟁의 폐허 위에서 더욱 아름다운 공산주의미래를 건립할 수 있다. 모택동은 자신의 정치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3억중국인의 생명도 별 것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당연히 수천만의 중국기아민들의 생사는 신경쓸 리가 없는 것이다. 모택동이 정치국상위에서 일부 식량을 풀어서 가장 어려운 지방에 보내도록 한 것은 첫째, 막다른 골목에 몰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했고, 둘째는 인류역사상 자신의 이름이 평화시기에 가장 많은 아사자를 낸 지도자로 오르는 것을 겁냈으며, 셋째는 아사자가 너무 많으면, 세계공산혁명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총알받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택동이 기민들에게 일부 예비식량을 풀어주라고 결정한 주관적인 동기는 떳떳하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모택동의 이 결정은 그래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번 정치국상위회의에서 보면 중공의 독재통치와 통치집단의 이익을 고려하여 등소평은 수천만이 아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1989년 "6.4"사태때 등소평은 이번 위기가 중공과 그 개인의 독재통치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는 천안문광장의 수천의 학생, 민중의 사상은 돌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런 망설임없이 무력을 동원한다고 결정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상에서 얘기한 등소평이 "6.4"사태때 수십만 군경을 동원하며, 탱크, 장갑차와 기관총, 자동소총까지 동원하여 평화시위에 나선 학생, 민중에 대하여 난사하고, 깔아뭉개기로 하는 결정은 일시적인 충동으로 저지른 잘못된 결정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내린 결정도 아니며, 더더구나 전립선과 파킨슨병을 치료하기 위해 먹은 약물작용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등소평의 일관된 생명무시의 냉혹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일관된 일처리방식이기도 하다(중공의 독재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방식)
만일 정말 어용학자들의 말대로 등소평이 일시적으로 잘못 생각했거나, 리펑등에게 속았거나 혹은 약물반응으로 인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 1989년이후 1997년 등소평이 사망할 때까지 근 8년의 시간동안 한번도 등소평은 사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이에 대해 아무런 반성이나 후회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죽을 때까지 1989년의 "6.4"사태에 대한 명예회복을 해주지 않았다. 이 글을 본 독자들이라면 어용학자, 후안무치한 전문가, 학자들이 '영명하고 위대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고 치켜세우는 등소평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비교적 객관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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