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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임두두(林豆豆): 임표가 죽은 후 그녀는 어떻게 살았는가?

by 중은우시 2020. 6. 27.

글: 왕우군(王友群)

 

1971년 9월 13일, 중국공산당 당장(黨章)에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로 기재되었던 임표(林彪)는 그의 처인 섭군(葉群), 아들 임입과(林立果)와 함께 탑승한 트라이던트비행기가 하북 산해관공항에서 이륙하여 몽골의 원두르칸에서 추락한다. 비행기에 탔던 9명은 전원 사망한다. 이것이 당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9.13사건"이다.

 

임표는 중공의 십대원수중 한명으로,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임표는 국무원 부총리, 중공중앙부주석, 국방부장, 중앙군위제1부주석등의 직위에 오른다. 문혁때, 모택동의 다음가는 2인자가 된다. 임표가 죽은 후, 중공은 그를 '반당반국(叛黨叛國)'의 야심가, 음모가, 매국노로 매도되며, 모택동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민 원흉으로 규정된다. 문혁이 끝난 후, "임표,강청반혁명집단"으로 규정된다.

 

임표가 산해관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의 딸인 임두두는 이 소식을 당시의 총리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그리하여 임두두는 한때 "당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해졌다.

 

임두두가 주은래에게 전화걸다.

 

임두두의 원래 이름은 임립형(林立衡)이고, 1944년 8월 31일 연안(延安)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임표와 섭군의 딸이다. 6살때, 임표는 모스크바로 요양을 가고, 그녀도 따라간다. 1962년, 청화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고, 그후 북경대학 중문과로 전과한다. 문혁기간, 나이 23세의 임두두는 <공군보(空軍報)>의 부편집장이 된다.

 

1971년 9월 12일, 임표 일가는 북대하(北戴河)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임두두와 장청림(張淸林)과 약혼식을 거행한다. 이는 임표일가가 북대하에서 휴가를 보낸 7일째 되는 날이다. 그 동안 임두두는 집안의 분위기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날 저녁 11시가 지나서, 임두두는 북대하의 중앙경위단을 통하여, 주은래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한다: "섭군, 임입과등이 자동차로 그녀의 부친을 데려갔다." 당시 임표는 이미 수면제를 먹은 상태였고, 북대하에서 자동차에 탈 때, 두 사람이 부축해서 차에 탔다.

 

임두두는 섭군, 임입과의 '음모'가 성공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중앙경위단에 4가지를 건의한다: 첫째, 큰 트럭을 동원하여 도로를 막을 것, 둘째, 큰 나무를 잘라서 도로를 봉쇄할 것. 쌍봉산의 도로는 넓지 않고, 양측에 큰 나무들이 있으니 나무 한그루 자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셋째, 20명의 경위전사를 동원하여 차량통행을 막을 것. 넷째, 공항도로를 봉쇄할 것. 다만, 중앙경위단이 주은래에게 보고했는데, 주은래가 동의하지 않았다. 임두두는 전화를 건네받아 직접 주은래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들은 것은 상반된 '지시'였다. 그녀는 그 지시를 듣자 수화기를 떨어뜨린다. 이때 바깥에서는 총소리가 이미 울리기 시작했다.

 

그 후, 임표는 순조롭게 산해관공항에 도착하고, 순조롭게 이륙한다. 보도에 따르면, 임표는 원래 남으로 비행하여 광주(廣州)로 갈 생각이었다. 다만, 비행기는 북으로 몽골국 경내로 들어간다. 다시 몽골에서 비행기는 추락당해 모두 사망한다. 이 기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사건발생후, 모택동은 그의 기요비석(機要秘書) 사정의(謝靜宜)를 통해 임두두에게 말을 전한다: "넌 큰 공을 세웠다!"

 

임두두의 소위 '진술'

 

1971년 10월 4일, 임두두와 그녀의 약혼자 장청림은 북대하에서 북경 옥천산으로 불려가서 중앙전안조(中央專案組)의 심문을 받는다. 그후 북경위수구 모사단주둔지로 옮긴다. 전안조의 책임자는 모택동의 기요비서 사정의였다. 사정의는 임두두에게 진술할 내용을 내놓는다: "9.13사건"의 경과, 임표와 유소기, 등소평등과의 관계등등. 특별히 9월 12일 밤에 섭군과 주은래가 통화한 내용도 조사했다.

 

임두두는 단지 하나씩 하나씩 얘기했다: 임표는 섭군, 임입과에 속아서 비행기를 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모택동이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사정의는 반복하여 그녀를 설득한다. 한때는 네가 잘 진술해 주었다. 너의 <공군보>부편집장의 위치는 남겨두겠다고 하고, 또 한때는 너는 계속 고집 부리지 말고 가족과 선을 확실히 그어라. 임표의 음모를 고발해라 그렇지 않으면 어쩌고 저쩌고...

 

사정의의 계속된 비판을 받은 후, 임두두는 임표가 일찌기 모택동에 관한 "나쁜 말"을 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모택동 견에도 섭군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 자료가 보고된 후, 전안주는 비판을 받는다. 임두두는 더욱 격렬한 비판을 받는다. 그녀가 고의로 '독을 풀어' 위대한 영수를 공격한다고 말했다. 그후, 그녀의 처지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신분은 "9.13사건"의 공신에서 "임표가 남겨놓은 송곳"으로 바뀐다.

 

임두두가 말을 바꾸게 하기 위하여 사정의는 그녀와 장청림에 대한 "육채일탕(六菜一湯)"의 우대를 취소하고, 1일 3찬으로 보통전사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준다. 그후 매일 그녀에게 압력을 가한다. 다만, 아주 오랫동안 모택동이 원하는 거슬 얻어내지 못한다. 사정의는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들 둘을 나누어 각각 다른 건물에 살게 한다. 그후 사정의는 장청림을 설득한다. 그에게 모택동의 편에 서라고 요구한다. 자신에게 잘 협조해야 비로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정의는 임두두, 장청림과 반년간 힘들게 싸웠다. 장청림은 마침내 사정의가 원하는데로 진술자료를 만든다. 사정의가 수정한후, 다시 임두두에게 넘겨서 쓰게 한다. 그 후에 모택동에게 보고한다. 모택동은 만족했고, 이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임두두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시도하다.

 

1972년 8월 16일 밤, 주은래는 인민대회당에서 임두두, 장청림과 얘기를 나눈다. 임두두는 다시 한번 임표는 섭군, 임입과에게 속아서 비행기를 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은래는 그녀를 혼낸다. 주은래는 그 자리에서 선언한다. 그 본인이 직접 임두두를 단속하겠다고 하면서 즉시 임두두에게 공군으로 돌아가, 군중운동에 참가하여 '재교욱'을 받으라고 말한다.

 

임두두가 공군으로 돌아온 후, 공군은 저명한 여성조종사 주후이펀(諸惠芬)등을 시켜 윤번제로 그녀에게 소위 '교육'을 진행한다. 중앙조직부의 책임자 곽옥봉(郭玉峰)과 공안부 부부장 이진(李震)도 이삼일에 한번씩 찾아와서 진행을 감독한다. 이런 압박하에 임두두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신이 붕괴된다. 수면제를 여러 알 먹고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301병원에서 응급조치를 해서 다시 살아난다. 그후 임두두는 <공군보>사로 보내어지고 다시 격리조사를 받는다.

 

공군보사에서 임두두는 대회비(大會批), 소회투(小會鬪)를 받는다. 그녀가 다시 자살을 기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녀를 겨우 8평방미터의 작은 방에 가둔다. 매일 24시간 누군가의 감시를 받았다. 방의 창문은 창호지로 막아놓았다. 방안에는 밤낮으로 불이 켜져 있었고, 모기장을 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의 온 몸이 모기에 물려 물린자국으로 가득했다. 간수는 매일 희석한 농약(DDT)를 지면에 뿌렸다. 방안의 공기는 혼탁했고, 수개월간 바깥으로 나가서 바람을 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햇볕을 쬘 수 있는 것은 그녀의 팔이었다. 간수는 작은 구멍을 내서 매일 그녀가 팔을 뻗을 수 있게 해주었고, 반시간도안 태양을 쬐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이빨이 6개 빠지고, 머리카락은 절반이 빠지며, 몸무게는 겨우 35킬로그램 정도만 남는다.

 

1974년 7월 31일이 되자 공군정위 고후량(高厚良)이 임두두에게 모택동의 '최고지시'를 전달한다. 감호를 해제하고, 그녀가 장청림과 만나는 것을 허락한다. 중공저치국의 토론을 거쳐 임두두는 농장으로 하방되어 노동개조를 받게 한다. 1974년 8월초, 임두두와 장청림은 황하가의 한 농장으로 간다. 농장은 처음에 그녀에게 과일나무에 농약을 뿌리는 일을 시켰다. 농약으로 그녀는 피부과민을 일으켜 온몸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나중에 그녀는 소를 끌고 농사를 지었다. 그 히우에는 풀뽑기, 돼지기르기, 양조등을 담당한다.

 

임두두가 정주(鄭州)로 하방되다.

 

1975년 10월, 문혁에서 '당내제2호자본주의도로의 당권파"로 타도되었던 등소평이 복권된다. 그가 병중의 주은래를 대신하여 중앙업무를 주재한다. 등소평은 임두두를 부대에서 지방으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임두두는 북경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거절당한다. 결국 하남 정주로 보내어진다.

 

임두두는 정주자동차제조공장의 제1분공장의 과장급 간부인 공장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하급간부이지만, 실제로는 "공안부중점감시대상"이었다. 하남성 공안청은 그녀의 '안전'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그녀의 일상행동은 공장혁명위원회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보호'하도록 했다. 허가를 받지 않으면, 공장을 떠날 수도 없었다. 허가를 받아 외출할 때도 반드시 누군가 따라왔다.

 

1976년 5월, 등소평이 다시 타도된다. 임두두가 정주로 온 것은 등소평이 동의한 것이어서, 등소평이 타도된 후, 임두두도 함께 상황이 악화된다. 공장혁명위원회 부주임의 직위에서 면직되고, 공장의 일반노동자로 내려간다. 노동하면서 그녀는 힘이 약해서 무거운 것들 들 수 없었다. 불행히도 오른 발의 네개 발가락뼈가 부러진다. 그녀가 거주하는 낡은 집은 농약공장의 옆에 있었다. 농약공장은 계속하여 농약냄새가 났고, 그녀의 약물과민증세는 더욱 심각해진다. 일단 농약냄새만 맡으면 그녀는 온 몸이 발갛게 부어오르고,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으며, 설사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과민성결장염과 십이지장설사증에 걸린다. 그녀의 병은 매일 발작했고, 몸은 쇠약해져갔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다. 1984년 2월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병원에 입원한다. 노동자로 있는 동안 그녀는 출퇴근외에는 문을 걸어잠그고 밖을 나가지 않았다. 가끔 식당에 가서 음식을 가져갈 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1978년 12월 중공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시작한 후,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번다. 임두두의 한달 급여는 겨우 76위안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장청림의 월급여는 90위안이었다. 그들은 공장가건물을 개조한 작은방에서 가구도 사지 못하고, 목판과 종이상자에 물건을 넣어두었다. 가장 사치스런 물품은 작은 흑백TV였다.

 

임두두는 계속 상방(上訪)하다.

 

10년 문혁이 끝난 후, 북경에는 많은 상방호(上訪戶)가 나타난다. 임두두도 그런 상방호중 하나였다. 계속 상방하고, 청원했다. 북경으로 돌아가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1981년 11월, 임두두와 장청림은 함께 북경으로 가서 상방한다. 그녀는 총정치부를 찾고, 다시 군사위원회 접대소를 찾는다. 그날은 이미 밤 10시였고, 큰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차가운 눈 속에서 먹을 것도 없었다. 나중에 접대소에서 군사위원회에 보고한 후, 그들을 부근의 창교여관(廠橋旅館)에 하룻밤 투숙하도록 어레인지해준다. 그들을 접대한 기관은 중앙조직부였다.

 

1980년대 중반, 임두두는 당시 중공총서기였던 조자양에게 편지를 쓴다. 임표의 옛부하인 도주(陶鑄)의 부인이자 당시 중앙조직부 부부장으로 있던 증지(曾志)의 도움으로 그녀의 청원은 상부에 보고된다. 얼마 후, 조자양이 지시를 내린다. 대강의 의미는 XX로 하여금 그녀를 찾아가서 얘기해보고 상황을 알아본 다음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1987년 임두두는 마침내 북경으로 돌아온다. 중앙사회과학원에서 일을 하게 된다. 1989년 임두두는 "중국현대문화학회"라는 기구를 창립하는데 참여한다. 나중에 이 학회 산하에 기업문화전업위원회와 구술역사전업위원회를 설립한다. 임두두는 많은 정력을 쏟아 '구술역사'분야에서 일한다. 2002년 은퇴할 때까지.

 

임표사건의 진상을 복원중이다.

 

임표사건에 관하여, 중국공산당에서 공식적으로 내놓은 것들은 모두 가짜이다. 예를 들어, 1971년 9월 18일 중앙57호 문건에서는 임두두가 "긴요한 순간에 임표, 섭군, 임입과가 몰래 비행기를 구해서 나라를 배반하고 적국에 투항하려는 것을 고발해서 당에 공을 세웠다"고 했는데, 지금도 살아있는 임두두는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염황춘추> 부총편집인 유가구(劉家駒)에 따르면, 그는 해방군출판사 <성화요원> 편집부의 요청을 받아, <임표전>을 썼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근 100명을 심도있게 인터뷰했고, 많은 믿을만한 사실을 획득했다. 최종적으로 "임표반당집단"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임표는 "9.13사건"에서 무죄이다. 임표는 무슨 모택동을 해치는 범죄의 원흉이 아니다.

 

결론

 

중국공산다은 임두두가 당을 위해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은 마땅히 그녀를 잘 대해주었어야 한다. 왜 당은 임두두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부쳤을까? 강을 건너면 다리를 없애고, 맷돌을 다 돌리면 나귀를 죽이는 것이 중공의 수법이다. 네가 필요할 때는 네가 공을 세웠다고 해주고, 네가 필요없을 때는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네가 방해가 된다고 새가괴면 너를 처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