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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중국은 "흑포(黑砲)"시대로 되돌아가는가?

by 중은우시 2021. 10. 22.

글: 석산(石山)

 

광산기계엔지니어인 자오슈신(趙書信)은 우전국(郵電局)에 가서 전보를 보낸다. 전보에는 이런 몇 글자가 쓰여 있었다: "丟失黑砲301找趙" 전보를 보내던 우전국의 직원은 의심을 품고, 공안국에 보고한다. 공안국은 즉시 입건한 후, 자오에 대하여 전면적인 조사에 들어간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아마 전보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90년대이전에는 핸드폰도 없었다. 더더구나 iPhone같은 스마트폰은 없었다. 중국대륙에서, 보통의 유선전화도 아주 희귀했다. 그래서 만일 긴급한 일로 연락해야하면, 사람들은 전보를 보냈다. 전보를 보내려면 우전국을 가야 한다. 거기에 받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을 적고 그 후에 보낼 메세지를 적는다. 전보는 글자수에 따라 비용을 받는다. 필자는 금액이 얼마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한자 1자당 몇마오였을 것이다. 다만 숫자의 경우는 이어져 있다면 몇개의 숫자이든 1글자로 계산했다. 그래서, 모두 글자수를 줄이기 위해, 어떤 것은 숫자로 표시하곤 했었다.

 

"丟失黑砲301找趙" 글자 자체로 이해하자면, '흑포'를 잃어버렸다. 301과 관련된 곳 혹은 사람을 찾아달라. 마지막의 '조'는 보낸 사람의 서명이다. 공안국은 의심을 품고 조사를 진행한다. 원래 자오엔지니어가 출장을 갔을 때, 가장 좋아하는 상기(象棋, 우리나라의 장기와 유사함)의 흑포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친구에게 호텔의 301호방으로 가서 찾아봐 달라고 한 것이었다. 원래 이 일은 이렇게 끝나야 하는데, 그래도 의문점이 남았다. 공안국은 장기 한 벌이 얼마나 할 것인가 기껏해야 1,2위안이면 살 수 있다. 그런데, 전보를 보내는 것에만도 몇위안이 든다. 그건 논리에 부합하는 행동이 아닌 것이다. 이 당시 광산은 마침 독일에서 설비를 도입하고 있었고, 자오엔지니어는 독일어를 할 줄 알았으며, 독일엔지니어와 오랫동안 같이 일해왔었다. 그리하여 광산당위는 자오엔지니어를 배제하고, 다른 기계를 잘 모르는 통역을 부른다. 전체 설비를 설치하고 시운전하다가 큰 사고가 나 수백만위안의 손실을 입는다. 그리고 그 '흑포'는 잘 찾아서 소포로보내온다.

 

<흑포사건>이라는 이 영화는 기실 잘 찍은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과 촬영기술이 아주 중국적이다. 그러나 당시에 많은 논쟁이 일어난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의 중국영화는 기술에서 적지 않은 발전이 있지만, 이런 류의 영화는 아마 상영허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얘기하려는 것은 영화에 대한 토론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대이다. <흑포사건>은 1980년대의 이야기이다. 중국은 그때 막 개혁개방했고, 사회는 여전히 폐쇄시대의 각종 방식과 관념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더욱 10년, 20년이전과 비교하면 상황은 이미 많이 달라졌다. 어쨌든 그 당시 중국대륙은 이미 폐쇄시대말기와 개방시대초기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문혁시기에 간첩을 잡는 '인민전쟁'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공포스러운 수준이 이른다.

 

중국의 유명한 황매희(黃梅戱) 배우인 엄봉영(嚴鳳英)은 일찌기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천선배(天仙配)>의 노래는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문혁때 그녀는 특무로 의심받아, 혹형을 당해서 그녀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가 소속되어 있던 극단의 군대표는 명령을 내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도끼로 이 여배우의 시신을 갈라, 뱃속에 숨겼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발신기를 찾으려 했다. 이 일은 중공의 공식매체에서 나중에 공개적으로 보도했고 나이가 조금 있는 중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그 시대는 '인민전쟁'의 시대이다. 뭐든지 '인민전쟁'을 벌인다. 특무를 잡고 간첩을 막는 것도 당연히 '인민전쟁'이다. 그리고 현재 '인민전쟁'의 방식으로 간첩을 잡는 일이 아마 다시 시작되는 듯하다.

 

미국 CIA는 중국임무센터를 설립하고자 하며, 공개적으로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한다. 거기에는 보통화, 광동화, 객가화, 상해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포함되고, 연봉은 17만달러라고 한다.

 

이 소식은 중국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인터넷에서 민간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중국 외교부대변인까지 언급하고, 국방부도 대응한다. 인민해방군의 공개계정은 직접 조양대마(朝陽大媽)와 노동어민(撈銅漁民, 남해에서 미국군함을 따라다니다가 미군잠수함이 설치한 탐지기를 건져낸 어민이 있었음)을 동원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인민전쟁의 방식으로 CIA의 이 중국임무센터에 대응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중공이 중국대륙을 다시 엄봉영시대로 되돌리려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게 된다. '흑포시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생각하면 아주 웃기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조양대마가 붉은 완장을 차고 벌떼처럼 007 제임스본드에게 달려든다고 생각해보라. 그게 무슨 장면일 것인가?

 

당연히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당국은 전국인민들이 경계심을 끌어올리길 바란다. 마치 흑포사건에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의심스러운 인물과 의심스러운 사건을 보고하는 것이다. 단지 이런 방식은 근본적으로 엉뚱한 사람을 잡는다는게 문제이다.

 

정보업무는 기실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사람을 보내어 정보를 수집한다. 당연히 행동도 민첩하고 반응이 신속하며 각종 언어와 지식을 알아야 한다. 제임스 본드와 마찬가지로. 둘째, 정보원을 매수한다. 상대방의 진영에서 목표를 찾아, 돈이나 기타 이익으로 유혹하여 쓸모있는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다. 셋째, 각종 공개된 정보와 획득한 단서를 가지고 분석평가하여 가치있는 결론을 얻어내는 것이다.

 

현대의 첩보업무는 솔직히 말해서 셋째유형이 가장 중요하다. 여러해 전에 미국 정보기관의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현재의 정보업무는 데이타와 정보분석이 정보업ㅁ의 95%이상을 차지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미국 CIA가 채용한 중국어를 아는 인재는 아마 99% 정보분석에 투입될 것이다.

 

미국이 신뢰할만한 중국어를 알면서 심지어 각종 방언까지 아는 제임스 본드를 훈련시키고, 그를 중국에 보내어 일하게 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CIA에서 일하는 것은 일반적인 배경조사외에 최고등급의 안전배경조사를 하기 때문이다. 즉 security clearance이다. 원래 백인이나 흑인을 파견한다면 그가 천진화, 산동화, 하북화, 사천화, 사천화 심지어 동북사투리까지 다 배운다고 하더라도, 아마 쓸모가 없을 것이다. 다만 만일 중국에서 온 중국언어천재이며 전문분야천재를 기용한다면, 필자의 생각에 아마도 안전배경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경력이 너무 복잡하여, 근본적으로 확인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은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부모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미국인인 동아시아계의 황색인종뿐이다. 다만 이런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일자리를 쉽게 찾는다. 평화적인 시기에 누가 그런 모험을 하려 할 것인가? 그리고 여기에는 본인의 정치적 성향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CIA가 정말 운이 아주 좋아서 정말 그런 사람을 찾았다고 치자. 3년 5년을 훈련시켜, 성공적으로 중국에 잠입시킨다. 그럼 인원은 몇명이나 될까? 3명? 5명? 10명? 8명? 만일 중공이 인민전쟁을 동원하여 대응하려면, 아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흑포사건>에서 광산은 수백만위안의 손실을 입었다. 조양대마도 모두 비용이 든다. 한 사람이 하루 출근하면 최소 50위안을 받는다. 많으면 100여위안이다. 모두 돈을 요구한다. 

 

인민전쟁은 모택동 군사사상의 중요구성부분이다. 유격전에 인민전쟁, 운동전에 섬멸전까지. 중공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모택동군사사상의 정수이다. 단지 인민전쟁은 조건이 있다. 즉 이데올로기에서 가치관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해야 한다. 백성들이 스스로 협조해야 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위에서 아래로 명령하는 전쟁방식이 아니다.

 

현재 중공은 그런 자신이 없다. 지금 중국대륙에서 정부의 관제는 이미 문혁시대보다 훨씬 엄격하다. 문혁시기, 대부분의 혁명거동은 모두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졌다. 하층민중이 모종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발적으로 한 행위이다. 그래서 위에서 아래로의 정부관제는 현재보다 훨씬 느슨했다.

 

그래서, 인민전쟁은 기실 이미 중공이 두려워학고 우려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해방군의 공개계정에서 인민전쟁으로 CIA에 대응해야한다고 호소한 것은 엉뚱한 사람을 잡게 될 뿐아니라,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만 이는 중공의 현재 정신에는 아주 부합한다.

 

국가주의의 독재체제 자체는 일종의 전쟁상태제도이다. 그것은 명확하고 즉시적인 직접적 위협이 필요하다. 명확한 적이 필요하다. 적이 없으면, 이 체제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독재권력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CIA가 중국어인재를 채용하는 것은 당연히 놓칠 수 없는 선전자료인 것이다.

 

중국은 지금 더욱 극단적인 독재체제로 가고 있다. 이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0월 18일, 중공정치국회의가 개최된다. 6중전회의 관련문제를 논의했다. 관영매체보도에 따르면, 회의에서 첫째, 11월 8일 6중전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둘째, '중공중앙의 백년분투중요성취와 역사경험에 관한 결의'의 큰 틀과 주요정신을 통과시켰다. 주의할 것은 이 백년역사결의를 통과시킨 것이 아니라, 이 백년역사결의의 큰틀과 정신을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중공역사상 세번의 역사결의가 있었다. 첫째는 1945년 4월 20일, 제6대 7중전회로 '약간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킨다. 이전의 몇 공산당지도자를 비판하고, 모택동의 노선을 확립한다. 삼일후, 즉 1945년 4월 23일 중공은 7대를 개최하고, 모택동은 정식으로 중공당주석에 오르고, '모주석'이 된다. 유소기는 회의에서 모택동사상을 내놓고, 모택동만세의 구호를 외친다.

 

중공의 두번째 역사결의는 181년 제11대 6중전회의 "건국이래 당의 약간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고, 모택동의 '계급투쟁노선'의 건국노선을 부정하고, 재차 3중전회의 '경제건설노선'을 확인하고, 개혁개방을 확인한다. 1982년 중공은 12대를 개최하여, 당장을 수정하여 당주석제도를 취소하고, 고문위원회를 설립하며, 등소평이 군사위주석에 앉는다. 이렇게 등소평시대를 열게 된다.

 

다음 달, 중공19대 6중전회에서 다시 한번 역사결의를 통과시킬 것이다. 지난번 역사결의로부터 40년이 지났다. 확실히 이번 결의도 중공의 또 다른 '역사단계'를 확정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를 '시진핑단계'로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사실상 중국의 관영매체도 이렇게 선전하고 있다. 모택동은 중국인을 일어서게 만들었고, 등소평은 중국인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시진핑은 중국인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진핑은 모택동, 등소평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화국봉, 조자양, 호요방, 장쩌민, 후진타오등등은 모두 과도기성 인물이 된다. 단계성 지도자에 비하면 한단계 아래가 되는 것이다.

 

다만 이번 중공의 '역사결의' 및 '단계성지도자'의 확립은 이전의 두번에 걸친 역사결의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이라면, 전단계의 지도자와 노선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택동은 진독수, 왕명등 중공지도자를 부정했고, 등소평은 모택동과 화국봉을 부정했다. 시진핑은 등소평과 장쩌민, 후진타오를 부정할 것이다. 예를 들어, 등소평의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한다. 백년간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도 부정될 것이다. 앞으로는 굴기할 것이고, 중공이데올로기와 사회체제구조를 재건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부유'로 '선부론'을 부정할 것이다. '부흥'과 '굴기'로 '도광양회, 절대로 머리를 내밀지 않는다'를 부정할 것이다. 제도적으로 아마도 종신제의 당주석을 부활할 것이고, 임기제의 총서기를 부정할 것이다.

 

다만 다른 점도 있다. 1945년과 1981년은 모두 권력투쟁에서 철저하게 승리한 후의 결과였다. 그러나 현재 시진핑과 중공의 다른 계파간의 권력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진행중이다.

 

독재체제의 건립은 개인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 고대의 봉건왕조, 황제의 개인권위는 혈통에서 나왔다. 현대의 독재체제의 개인권위는 그런 장점이 없다. 그래서 극력 개인의 권위를 세워야할 필요가 있다. 과거 몇년간, 중공의 방향이 바로 그러했다. 대거 시진핑의 개인권위를 세우려 했다. 당내에 '충성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엄중한 죄가 되었다. 부정부패나 뇌물수수보다 훨씬 엄중하게 다뤄졌다. 바로 이런 정치적 필요때문이었다.

 

다만 개인권위는 임명에 의존하여 얻어낼 수 없다. 개방된 사회에서 이 점은 선전을 통하여 달성할 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봉쇄해야 한다. 다만 이런 봉쇄의 과정에서 중국 각계층의 반대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당내의 다른 파벌도 그렇고, 사회의 각종 이익단체도 그렇다. 심지어 보통의 소분홍들도 마찬가지로 반대한다. 필자의 생각에 이것은 중공이 달성할 수 없는 임무이다. 이로 인하여 이번에 중공은 옛날로 되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것이고, 그것은 덜익은 밥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중공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당연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각양각색의 '흑포시대'를 겪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