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베트남의 제조업이 중국을 대체할 수 있을까?

중은우시 2021. 10. 14. 11:15

글: 노극문(盧克文)

 

이야기는 911사건 20주년인 그 날부터 시작된다.

 

그날, 중국의 외교부장 왕이(王毅)는 사전에 예정된 바에 따라 베트남을 방문했다. 괴이한 점은 아베신조(安倍晋三)의 친동생이자 일본의 방위대신인 기시 노부스오(岸信夫)가 왕이의 베트남방문소식을 듣고 같은 기간에 하노이를 방문하겠다고 요구한다.

 

중국과 일본 양국의 고위관료가 동시에 베트남을 방문하자, 베트남사람들은 전세계가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자랑스럽게 대거 선전을 한다. "베이징(北京)과 도쿄(東京)가 동시에 고위층을 하노이로 파견했다." 이러한 모습은 스스로를 치켜올리는 동시에 양쪽 모두에게서 이득을 취하겠다는 자태라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트남의 인터넷에는 하나의 새로운 용어나 나타난다: "양면국(兩面國)"

 

먼저 관점을 분명히 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중국의 국가이익에서 출발하면, 베트남이 양면국의 자태를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괜찮은 국면이다. 왜냐하면 경제를 보건, 정치를 보건, 사회층면으로 보건, 베트남은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베트남산업체인의 패러독스

 

여러분들은 이런 제목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중국제조업은 지금 외국기업들이 포기하고 있다." "삼성이 중국의 마지막 공장을 폐쇄했다." "베트남의 제조업이 굴기하여 중국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이런 류의 글에는 통상 광저우 어느 공장의 노동자들이 다 떠나고 없는 잡초가 가득 자란 공장의 사진을 덧붙인다. 그리고, 이런 류의 글의 댓글난에서는 "친베트남파"와 "반베트남파"의 논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양자의 관점을 대체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친베트남파": 베트남의 인구구조는 아주 양호하고, 노동력이 풍부하다. 인건비는 중국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그리고 중저급산업뿐아니라, 일부 고급제조업도 유치했다. 인텔, 삼성, 샤프, 리신정밀등 반도체칩, 핸드폰, 모니터에 관련된 IT기업이 모두 베트남에 공장을 건설했다. 국제환경상으로 2014년부터 일본과 베트남은 허니문에 들어갔고, 2018년부터 베트남은 미중무역전의 득을 보고 있다. 2019년, CPTTP가 베트남에서 발효된다. 2020년, 베트남은 EU와 자유무역협정을 발효시켰다. 2020년 베트남의 연간 수출입총액은 5,500억달러에 달하였고, 중국의 저장성보다 많아졌다.

 

"반베트남파":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출발하여 25킬로미터의 거리를 가는데 차를 타고 1시간을 가야 한다. 하노이에서 호치민시까지 가려면 육로로 가건 해로로 가건 모두 광저우까지 가는 것보다 더 걸린다. 인건비가 비록 싸지만, 토지와 공업용수와 전기는 중국보다 비싸다. GDP총액은 광시보다 적다. 1인당소득은 깐쑤보다 못하다. 수출입총액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높지만, 절대다수의 원재료와 부품은 모두 수입한다. 베트남인들이 피땀흘려서 겨우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제조의 제품을 베트남에서 조립하고, 메이드인베트남을 붙여서 수출함으로써 미국의 고관세를 피하기 위한 것에 다름아니다. 어찌 되었건 중국이 돈을 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기본적으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각가 한면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상을 보면, 인건비와 관세의 우세로, 베트남의 노동밀집형산업은 확실히 중국에 대해 어느 정도 충격을 준다. 거시적으로 보면, 베트남은 독립된 산업체인이 없을 뿐아니라, 중국산업체인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런 현상을 볼 때 다음 단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베트남의 산업체인의 발전방향은 앞으로 3가지 길이 있다:

 

1. 현상유지. 계속하여 중국산업체인의 일부분이 되고, 미시적으로 중국의 일부 사람들의 수익에 충격을 주지만, 거시적으로는 중국에 유리하다.

 

2. 독립자주적인 산업체인을 건립한다. 여기에는 상당히 많은 투자가 들어가고, 시간도 길게 걸리며, 효과는 느린 중화학공업을 건립해야 한다. 다만 베트남이 이를 달성하려면 두 가지 장애가 있다:

 

(1) 베트남 내부를 보면, 우선적으로 중화학공업같은 자본회수율이 낮으나, 국가전체에 유리한 업종을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강력한 인물이 자원을 집중시키고, 자본을 억눌러야 실현될 수 있다. 1976년 베트남통일이후 원래 소련의 원조로 자신의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베트남이 선택한 것은 연방의 명의로 라오스, 캄보디아를 병합한 후에 다시 공업화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냉전이 끝나면서,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의 패권을 실현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공업화의 호기를 놓쳐버리게 된다. 지금, 베트남은 사회주의의 길을 고집하는 북방파와 자유경제를 주장하고 심지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깃발을 바꿔들려는 남방파가 균형을 이뤄나가는 것이 이미 어렵게 되었다. 남방파를 완전히 억누를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되었다.

 

(2) 국제환경으로 보면, 베트남은 이미 자유무역협정에 대거 가입했다. 예를 들어 RCEP, CPTTP, 베트남-EU자유무역협정등 외부에서 베트남의 정부를 구속하는 규제가 있다. 

 

확실히, 베트남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을 가진 미국이 베트남의 역략을 집중시키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에 있어서, 그런 것에 힘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베트남이 '매판파'집단의 색깔혁명을 도우는 것이 나을 수 있다.

 

3. 미국이 주도하는 탈중국 산업체인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베트남의 국가이익으로 보면, 중국의 의존하는 것에서 미국에 붙는 것은 우선 국가체면상 그다지 좋은 점이 없다. 이론적으로, 선진국에서 자금과 기술을 대고, 베트남,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멕시코등 개발도상국이 노동력을 내서, 중국을 피해서 새로운 산업체인을 건설하는 것은 실현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베트남은 이 시스템에서 확실히 독보적인 장점이 있다. 종교관념이 희박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다. 힘든 일을 견디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집단주의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제조업에 유리하다. 다만, 일단 베트남과 중국의 산업체인이 단절되면, 그것은 신속히 저비용의 원재료와 부품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베트남과 중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다른 몇몇 파트너들은 모두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게 되면 베트남의 장점은 상당히 약화된다.

 

아세안 10국에 관하여, 하나의 유행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들은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고,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의 상황은 비교적 특수하다. 경제적으로, 베트남은 제조측면에서 중국에 의존하고, 무역측면에서 미국에 의존한다. 화평연변을 우려하는 측면에서 베트남은 중국에 의지한다. 그러나 도서분쟁의 측면에서는 미국에 의지하여 중국에 대항한다.

 

이런 특수한 상황으로 베트남은 아세안의 다른 국가들보다 '양면파'가 되어야할 필요성이 더욱 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베트남의 국가이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만 매판집단에 있어서 이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둘째, 북방파 vs 남방파

 

금년 아프가니스탄의 국면으로 우리는 자주 1975년 4월 30일 미군이 황급히 베트남에서 철수한 '사이공함락'을 언급한다. 그리하여 1975년, 미국이 지원하던 베트남공화국이 멸망했던 옛일이 중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베트남통일의 시간은 1975년 4월 30일이 아니라 1976년 7월 2일이라는 것이다.

 

즉, 사이공함락이후, 베트남통일까지 15개월이 소요되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 기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 직접 남베트남을 멸망시킨 것은 북베트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북베트남은 남방의 통일전선대상이었다. 베트남남방민족해방전선. 이는 반미지식인, 민족자본가, 종교단체와 사회단체로 구성된 연맹이다. 그들은 당연히 북베트남의 지지를 받았다. 다만 북베트남과 상하급관계가 아니라 파트너관계였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일단 이들을 '반미우파'라고 부르겠다.

 

남베트남이 멸망한 후, 이들 반미우파는 남베트남공화국을 건립한다. 그리고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80여개국가의 승인을 받는다. 이는 충분히 증명한다. 반미우파와 북베트남은 원래 한 마음이 아니었다. 1976년 베트남이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반미우파의 무장역량이 친미우파와의 전쟁에서 거의 소모되었고, 어쩔 수 없이 북베트남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소련의 교훈을 받아들여, 권력투쟁이 상당히 온화했다. 베트남공산당내부의 패배자이건, 원하지 않았지만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반미우파이건, 모두 그저 핵심에서 밀려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온화한 방식은 나중에 베트남의 남북양파투쟁의 화근이 된다.

 

1986년부터 시작된 베트남의 도이모이정책은 자주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베낀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90년대이후 베트남은 한걸음 한걸음 토지사유화를 시행하고, 호적제를 폐지하며, 국유기업을 매각한다. 더 이상 공유제를 주체로 여기지 않았다. 남방파가 점차 강세를 보이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2006-2016년까지 베트남총리를 맡았던 응우옌떤중(Nguyen Tan Dung, 阮晋勇)이다.

 

응우옌떤중은 중앙은행 행장, 경제부장, 상무부총리, 총리를 지내면서 실적이 뛰어났다. 베트남은 WTO에 가입하고, TPP에 가입했는데 이것도 그의 공로이다. 2006년 당시 아직 임기가 만료되지 않았던 전총리가 사직하면서 그에게 총리자리를 양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응우옌던중 가족의 부패는 베트남에서 누구나 알고 있다. 그의 두 아들은 정치에 참여했다. 장남은 이미 고향인 끼엔장(堅江省)의 성위서기이다. 사위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베트남인인데, 전 남베트남정권 차관의 아들이며, 맥도날드의 베트남에서의 합작파트너이다. 딸인 응우옌탄퐁(Nguyen Thanh Phuong, 阮芳淸)은 투자기금회사인 '베트남자본관리'와 증권회사인 '베트남자본증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위키리스트에서 폭로한 후에 말이 많아지자 사임을 한다.

 

사회주의국가의 총리로서, 응우옌던중은 두 번이나 정부업무보고에서 미국을 모범이라고 칭했다. 2014년 베트남에서 반중폭동이 일어난다. 더더구나 이는 그가 직접 메세지를 보내면서 선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응우옌던중에 대하여 반중은 그저 수단이고, 진정한 목적은 그의 정적인 응우옌푸쫑(Nguyen Phu Trong, 阮富仲)을 여론의 도마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3분의 1은 성이 응우옌(阮)이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그들의 별명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응우옌던중의 별명은 "대매판(大買辦)"이다. 응우옌푸쫑의 별명은 "백두옹(白頭翁)"이다.

 

백두옹은 2011년부터 베트남의 1인자였다. 직책으로 말하자면 그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 다만 백두옹은 오랫동안 베트남의 관영매체 <공산주의> 잡지사에서 일했고, 그후 하노이시위서기, 국회주석을 맡았으며, 단 하루도 군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그러나 대매판은 12살때 베트남인민궁에 들어가서 20년간 군대에서 일했다. 경력으로 보면 2006년-2011년까지 대매판이 베트남의 3인자인 총리를 맡았을 때, 백두옹은 단지 권력서열 4위인 국회주석으로 있었다. 군대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이론가가 나중에 추월해서 서열이 앞섰다. 그러니, 대매판이 그를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1-2016년, 백두옹과 대매판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인다. 백두옹은 대매판의 심복인 전 호치민시위서기의 부정부패증거를 잡아서, 대매판의 부정부패척결권력을 빼앗아 버린다(이전에 베트남의 권력투쟁은 비교적 온건했고, 고위층은 주변으로 밀려날 뿐 처벌을 받지는 않았었다)

 

대매판은 다시 남해도서의 분쟁을 기화로 반중폭동을 선동한다. 그리하여 백두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이 대결의 결과는 2016년 백두옹은 1인자를 연임하고, 대매판은 물러난다. 다만 2인자, 3인자, 4인자는 모조리 대매판의 심복들로 채워진다.

 

이전에 베트남의 "4두마차"에서의 관례는 북방파가 1인자를 맡아 붓쟁이와 총잡이를 관장하고, 남방파는 실권을 지닌 3인자를 맡아 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2인자와 4인자는 중간파에서 맡아 남북간의 갈등을 조정했다. 2016년에는 1:3으로 그런 구조가 해체된다. 일시에 북방파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2018년에 반전이 일어난다. 2인자인 쩐다이꽝(Tran Dai Quang, 陳大光)이 병으로 급사한다. 백두옹이 2인자의 직위를 겸직한다. 남북양파는 다시 균형을 이루게 된 것이다.

 

2021년, 백두옹은 2인자의 자리를 원래의 3인자인 응우옌쑤언푹(Nguyen Xuan Phuc, 阮春福, 별명은 笑面虎)에게 물려준다. 하나의 설에 따르면, 이 소면호는 비록 대매판이 발탁해서 올린 인물이지만 일찌기 2011년에 어느 정도 백두옹에게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2016년에 대매판의 총리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금년에 소면호는 베트남역사상 최초로 서열3위에서 서열2위로 올라간 인물이 된다. 그것은 백두옹이 동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기실 백두옹은 이미 나이가 많으므로 정말 물러나고 싶었다면 소면호에게 1인자의 자리를 물려주었을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이전에 베트남에서 3인자에서 2인자로 올라간 적은 없다는 것이다. 3인자에서 직접 1인자로 승진한 경우는 있었지만. 

 

백두옹은 원래 2명의 후계자를 배양하고 있었다. 하나는 딘테휜(Dinh The Huynh, 丁世兄)인데, 2017년에 중병으로 은퇴한다. 다른 하나는 쩐꾸억브엉(Tran Quoc Vuong, 陳國旺)인데, 그는 부패척결과정에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 백두옹이 극력 밀어주었지만, 고위층 다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지러울 것이다. 그럼 간단하게 현재 베트남의 4대지도자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자.

 

백두옹: 북방파의 리더. 현재 여전히 국면을 장악하고 있다. 다만 후계자가 없다는 우려가 있다. 그리고 2019년 병이 위중하여 입원했다. 77세의 고령인 그는 다음기에도 1인자의 자리에 앉아 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소면호: 그는 대매판이 발탁한 남방파의 심복이다. 또한 그는 대매판의 장남을 발탁하여 끌어주었다. 소면호는 미국, 일본과 교류가 밀접하다. 다만 중국에 대하여도 우호적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백두옹이 돌연 사망한다면, 그가 아마도 1인자에 오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다른 한명의 대매판이 될지는 기다려보아야 할 일이다.

총리 팜민찐(Pham Minh Chinh, 范明政). 2018년 돌연 병사한 전2인자 쩐다이꽝의 부하였다. 그리고 대매판 계열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온화한 남방파로 분류될 수 있다.

국회주석 브언딘후에(Vuong Dinh Hue, 王廷惠). 북방파에 속한다. 하노이시위서기를 맡은 바 있다. 백두옹이 돌연 사망하면, 오직 그가 소면호와 한번 겨뤄볼 만하다. 다만 소면호에 비교하면, 그의 경력과 명망은 차이가 많이 난다.

 

다시 말해서, 베트남의 현재 남북양파의 균형은 극도로 백두옹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에 달려 있다. 북방파의 경제기초는 이미 계속되는 혁신으로 상당히 약화되었다. 사회기초는 주로 부패척결에 의존한다. 다만 북방파의 무력을 지탱해주는 대들보인 베트남인민군의 청렴정도는.....

 

인사에서 북방파는 후계자가 없다. 국제적으로 북방파는 중국을 제외하고 믿을만한 친구가 없다. 난감한 점은 역사적인 원인으로 도서분쟁과 베트남의 민족주의로 베트남의 민간에서는 보편적으로 중국에 대한 호감이 없다. 그래서 북방파는 비록 믿을만한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그 패를 꺼내기는 쉽지 않다.

 

셋째, 델타바이러스

 

현재 델타바이러스가 북방파를 많이 도와주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노이에서 호치민시까지 육로이든 해로이든 모두 광저우보다 오래 걸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베트남의 북방은 중국과 경제가 연계되어 있는데, 남방보다 훨씬 긴밀하다.

 

왜 이번에 베트남에서 코로나가 발발하는데, 미국이 돌연 백신원조에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한꺼번에 500만회분의 베트남에 무상공급했을까? 왜냐하면, 베트남에서 이번 코로나는 대부분 호치민시를 중심으로 한 남방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이번 코로나사태는 베트남의 공장들을 가동중단시켰다. 가동중단되지 않은 기업이라 하더라도 방역에 상당한 비용을 쏟아부어야 했다. 주문을 완성하지 못하면 고객을 잃을 수 있다. 주문을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주요항구인 깟라이항과 까이멥항은 모두 코로나로 인하여 일부 수출입작업이 중단되었다. 효율은 40%로 내려갔다. 깟라이항은 이미 10만개의 컨테이너가 쌓여 있고, 이미 85%의 부지를 점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코로나로 외국자본의 중국이외의 또 다른 공급체인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남방파의 합법성기초는 경제의 고속성장이다. 경제의 증가속도가 늦추어지면 분명 군중들이 공평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베트남의 남북 코로나사태의 차이는 북방파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고 있다. 남방파가 방역에 실패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사망자가 지나치게 많고, 화장장은 꽉 찼으며, 베트남에서 장례비용은 이미 인민폐로 환산했을 때 1인당 만천위안에 이른다. 이 수치는 일인당수입이 중국의 3분의 1에 불과한 베트남인들에게 죽어도 죽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백성들의 분노는 풀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남방파에서는 코로나를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고, with corona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백두옹은 군대를 풀어 도시를 봉쇄해 버렸다.

 

베트남 국내의 취약한 남북균형은 이번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북방파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베트남이 제2의 우크라이나로 변모할 것인지에 대한 것은 근우(近憂)에서 원려(遠慮)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