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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6중전회에서 역사상 3번째 "역사결의"가 나올 것인가?

by 중은우시 2021. 9. 10.

글: 악산(岳山)

 

중공 19대 6중전회가 11월에 베이징에서 개최된다. 소문에 따르면, 당사상 세번째 "역사결의"가 나올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결의일지에 대하여는 현재 정보가 혼란스랍다. 다만 최소한 3가지 이슈는 있다. 그것은 모두 1개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8월의 마지막 날 개최된 중앙정치국회의에서는 6중전회의 주요의사일정은 중공100년의 전면적인 결산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소위 "중대성취와 역사경험문제"라고 하였다. 

 

이치대로라면 이는 마땅히 "7.1" 건당100주년때 했어야 한다. 왜 뒤로 미뤄서 한단 말인가. 하물며 모택동의 잘못을 옹호하고, 시진핑사상을 떠받드는 중공당사도 이미 나왔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무게감있는 결의가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

 

여러 친공배경의 사이트에서는 최근 계속하여 이런 소식을 전하고 있다. 중공은 역사상 3번째 "역사결의"를 내놓을 것이라고.

 

중공의 이전 2번의 "역사결의"는 각각 1945년 중공 6기 7중전회를 통과한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와 1981년 11기 6중전회를 통과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다. 

 

그중 1945년에 모택동이 주도하여 이루어진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는 연안정풍운동의 배경하에 형성된 것이다. 당시 모택동은 당내 고위간부를 숙청하고 1943년 3월 정치국확대회의에서 주석에 오르며, 정식으로 중공의 최고권력을 장악한다. 그후 모택동은 1928년이래의 중공당사에 대한 검토를 제기하고, 주로 좌경의 왕명(王明)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제파를 공격했다. 1945년의 6중전회의 결의는 '왕명노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1981년 등소평이 주도하여 이루어진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도 역시 당내의 과거 정치노선을 모조리 부정했다. 등소평을 우두머리로 하는 노간부는 당시 중앙주석을 맡고 있던 화국봉을 우두머리로 하는 '범시파'를 누르고, 모택동의 문혁노선을 부정했다. 이를 통해 등소평의 당내에서의 최고지위를 확립한다.

 

금년 11월의 중앙전회에서 아마도 중공의 세번째 역사결의가 나올지도 모른다. 지금 이미 3가지 이슈가 형성되고 있다.

 

이슈 하나: 시진핑은 중공의 기존노선을 모조리 부정할 것인가?

 

타이완의 중앙사는 분석을 통해 시진핑이 만일 이번 6중전회에서 사상 3번째 역사결의를 내놓는다면, 이전의 2개의 역사결의와는 달리 중공의 기존노선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특히 등소평이래의 개혁개방노선은.

 

그 이유는 이러하다: 시진핑은 일찌기 명확히 제기했다: "개혁개방전후의 30년은 서로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부정하는 방식의 결의를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시진핑이 당내의 비난에 부닥칠 뿐아니라,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중국공산당의 집권정당성까지 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두개를 부정할 수 없다"는 기실 중공이론의 상호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택동과 등소평의 서로 다른 시기의 노선이 서로 충돌한다. 등소평이론과 모택동사상은 그 자체로 배치되는 것이다.

 

"두개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은 시진핑이 2013년 1월 5일  중앙당교에서 보고할 때 정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때 시진핑은 취임한지 겨우 1년째였다. 반부패의 기치는 민간에 일정한 호소력이 있었다. 시진핑의 부친인 시중쉰이 30년전에 모택동에게 탄압받고 박해받았기 때문에 시진핑의 "두개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이론은 그에게 정치개혁의 희망을 품었던 일부 사람들에게 실망을 가져다 주었다.

 

중공은 이전 30년간 토지개혁, 숙청, 삼반오반, 반우파운동, 대약진, 대기근으로 수천만이 굶어죽었다. 더더욱 잔인한 문화대혁명이 있었다; 이후 30년간 등소평은 문혁의 교훈을 받아들여 경제개혁을 진행한다. 중국을 세계로 향하게 하고, 그러나 둘 다 본질적으로는 같다. 모두 중공정권을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시진핑의 두개 30년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에 관해 헛되이 논의하지 말라는 것이고, 중공정권의 합법성을 뒤흔드는 일체의 행동을 금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당국이 보도하는 시진핑의 강연에서, 역사의 진상에 의문을 품고 추구하는 것을 '역사허무주의'라고 부른다.

 

그래서, 필자도 이렇게 생각한다. 이번 6중전회에서 시진핑은 과건노선을 부정하는 결의는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중공건당100년의 집단적인 성취를 긍정할 것이고, 2012년 11월 중공18대이후의 정치적 업적을 중점적으로 포장할 것이다. 신판 중공당사와 마찬가지로, 문혁과 모택동의 죄과를 가볍게 넘어가고, 시진핑의 집정내용이 1/4을 점하도록 할 것이다.

 

홍콩매체인 <명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지금 대륙의 모좌(毛左)와 자유파(自由派)는 모두 6중전회에서 나올 결의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중 모좌는 새로운 결의가 개혁개방에 대한 재평가를 포함시키길 원한다. "등소평노선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는 것"을 원한다. 자유파는 문혁을 철저히 부정하는 기초 위에서, 6.4사건등 역사사건에 대한 공정한 결론을 내려주기를 희망한다.

 

다만 시진핑은 자신이 "둘 다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둘 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기초 위에서 모좌와 자유파의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게 될 것이다. 

 

최근 중국의 당국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시진핑 자신도 아마 좌충우돌에 빠져 있는게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당국은 대거 민영기업을 탄압하고, 여러 업종을 정리정돈하면서 '공동부유'를 소리높여 부르짖으며, '3차분배'를 하겠다고 하였는데, 이미 체제내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모좌의 작자인 리광만이 개인미디어에 올린 글을 8월 29일 돌연 대형당매체들에 집단적으로 전재하면서 '현재 심각한 변혁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국내외의 여론은 이를 '제2차문혁'을 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논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지금까지 당의 '프리스비독'이었던 <환구시보>의 총편집 후시진은 9월 2일 리광만의 글이 '오판과 오도'라고 비판한다. 그후 부총리 류허와 당매체 <인민일보>도 모두 정부의 민영경제, 대외개방에 대한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당국에서 나오는 좌, 우의 서로 다른 목소리는 내부에서 이견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보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슈 둘: 6중전회는 정말 세번째 역사결의를 내놓을 것인가?

 

<명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1945년의 결의는 준비로부터 통과까지 4년이 걸렸다. 그리고 1981년의 결의도 1년반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 19기 6중전회까지 겨우 2개월이 남았는데, 만일 세번째 역사결의를 내놓는다면 아마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다만 중앙사의 분석은 이러하다: 앞의 2개의 역사결의는 당내의 과거노선을 부정했다. 당내에 이에 관해 분명히 이견이 존재했다. 지금 시진핑은 전체 당내에서 일존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도 부정하지 않고, 현재도 긍정한다' 그러므로 장시간동안 이견을 해소시킬 필요가 없다. 시진핑은 2018년초에 헌법수정을 통해 국가주석임기제를 폐지했는데, 이것도 단기간내에 나왔다. 만일 그가 결의를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시간이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6중전회에서 일단 역사결의가 나오면 그 형식과 등급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명보>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결의' 혹은 '결정'의 형식으로 할 것이고, 새로운 '역사결의'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중앙사의 보도에서는 '역사결의'로 내놓을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공의 이번 계획은 한번의 전회로서 중공100년을 결산하겠다는 것이다. 시진핑의 스타일대로라면 확실히 그런 대담한 조치를 할 수가 있을 것같고, 직접적으로 '역사결의'의 형식으로 내놓을 수 있을 것같다. 다만 결의의 내용과 효과는 외부에서 예측하는 것처럼 소위 '삼분단대(三分斷代)'하는 것까지는 아닐 것이다.

 

이슈 셋: 6중전회는 정식으로 모택동, 등소평, 시진핑으로 시대를 구분할 것인가?

 

대외선인 <둬웨이>는 최근 글을 실어 "모택동, 등소평, 시진핑의 삼분단대의 개념이 정식으로 중공역사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했다. 

 

외부에서는 이전에 시진핑이 등소평을 뛰어넘어, 모택동과 비견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예를 들어, 중공20대때 당주석의 직무를 부활시켜, 종신집권의 길을 열 것이라는 것이다.

 

시진핑은 2016년 중공18기 6중전회때 신일대(新一代)의 영도핵심의 지위를 확립한 바 있다. 이어서 2017년의 19대에서 시진핑사상을 당장에 넣었다. 경력이 모택동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시진핑이 감히 등소평, 장쩌민, 후진타오를 뛰어넘어 '모택동사상'에 비견될만한 '시진핑사상'이라는 이름을 쓰다니, 이는 마치 시진핑이 등소평을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삼분단대를 생각하지는 않는 것같다.

 

앞의 두 개의 역사결의는 모두 과거노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모택동과 등소평의 지위를 확립했고, 모택동시대와 등소평시대로 진입하는 표지적인 문건이 되었다. 만일 6중전회에서 정말 세번째 역사결의를 한다면, 시진핑은 분명 등소평과 이어지는 장쩌민, 후진타오의 노선을 부정함으로써 권위를 얻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이전에 '둘 다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선충돌의 난제를 피하면서, 세대를 나누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권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실제적으로 모택동과 비견될만한 지위를 얻으려 할 것이다. 시진핑에 있어서 모택동, 등소평의 충돌을 넘어서야만 중공당사에서 사상유례없는 권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핵심은 하나: 시진핑이 내부권력투쟁에서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이전의 정치국회의 공보를 보면, 건당백년 소위 '중대성취와 역사경험'을 결산하는 것은 시진핑의 당중앙으로서의 핵심, 전당의 핵심지위를 견결히 옹호하는 것이고, 당중앙의 권위와 집중통일영도등의 필요를 견결히 옹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진핑의 핵심지위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6중전회의 핵심이슈인 것이다.

 

중공정치국은 6중전회의 의제는 시핵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당내에서 다시 한번 시진핑의 지위를 끌어올리는데 잡읍이 어느 정도 나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보면 6중전회에서 겉으로 보기에 실질적이 아닌 의제가 고도로 민감해진 것같다.

 

중공의 중대회의는 역대이래로 내부투쟁의 관건적인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전의 2번의 역사결의는 중공내부투쟁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19대 6중전회에서 역사결의가 한번 나온다면, 이번 전회에서 아마도 고위층의 내부투쟁은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

 

시진핑당국은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정치안전'을 확보할 것을 강조했다. 그 속에 숨은 의미는 정권안정이다. 중공의 정권안정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중앙의 안전이다. 핵심은 바로 시진핑 자신의 안전인 것이다.

 

지금 중공정권은 위기가 사방에 잠복해 있다. 19대에서 시진핑이 '일존'에 오른 후, 중공은 외부의 거대한 압력과 내부의 여러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시진핑은 중공내부의 불만과 반시진핑세력이 외부환경의 변화를 기화로 움직이려 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그리하여, 6중전회에서 시진핑이 말했던 '둘다 부정할 수 없다'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을 것이다. 핵심문제는 기실 시진핑의 핵심지위를 부정할 수 없다는 문제인 것이다. 만일 6중전회에서 시진핑의 지위를 한단계 더 올리는 역사결의를 진행한다면, 금년 베이다이허회의에서 이미 싸우고 타협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소위 '공동부유'로 돈을 강탈하는 계획은 바로 당내에서 입을 막기 위한 것일 것이다. 중앙전회를 한번 개최하는 것은 기실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이 시진핑에 충성하는지를 검열해보는 과정이다. 당연히 그런 충성은 그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