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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지방정부

중국의 지방관료사회: 구사회로 되돌아가고 있다.

by 중은우시 2021. 8. 3.

글: 복안백성망(福安百姓網)

 

이 보고서는 북경대학의 박사인 펑쥔치(馮軍旗)가 허난성(河南省) 신예현(新野縣)에 2년간 관직을 맡으면서 조사하여 쓴 것이며 중국의 현급 지방정부의 관료사회현상을 심도있게 보여주고 있다. 더더욱 큰 문제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대부분 젊은이들은 왜 고향으로 돌아가서 일하려 하지 않는가? 상방(上訪, 민원)과 유온(維穩, 안정유지)는 중국사회특색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크고 작은 두부찌꺼기공사(날림부실공사)와 매년 전국에서 일어나는 많은 집단사건등등. 현급정부의 부패, 관료, 암흑, 일수차천(一手遮天), 그리고 예전에 하던대로 하면서 악순환이 일어나 중국 현급경제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고, 대도시는 갈수록 악성팽창하고 있어 중국발전의 불균현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 글을 읽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고향, 우리는 왜 돌아갈 수 없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사회에 융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예현은 난양(南陽)에 예속되어 있고, 후베이(湖北)의 샹판(襄樊)과 경계선을 접하고 있다. 98만무의 토지와 78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농업현이다. 면방공업은 그 지주산업이다.

 

신예에는 모두 부과장급(副科級)이상의 간부가 1,013명이 있다. 그중 부과장(副科)이 680명, 정과장(正科)이 280명, 부처장(副處)이 40명, 정처장(正處長)이 5명이다. 관적(貫籍)을 보면 정과장급이하는 기본적으로 신예현 사람들이고, 부처장급이상은 난양등 다른 현의 사람들이 더 많다.

 

부과장급이상의 간부가 천여명을 겨우 넘긴 농업현에서 혈연관계와 혼인관계에 있는 정치가족이 161개나 된다. 그중 5명이상의 부과장급을 가진 대가족이 21개, 5명미만 2명이상의 소가족이 140개이다. 이는 매 10명의 간부중 최소한 1명은 가족세력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20%는 관료2세에 속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자, 신예현의 선전부장 판쯔친(潘自欽)은 급히 베이징으로 가서 펑쥔치를 만나, 펑쥔치에게 당분간 매체와의 인터뷰는 하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고, 일부 정치가족의 구성원들은 펑쥔치에게 전화를 걸어, 압력이 아주 크지 펑쥔치에게 자신들의 고충을 헤아려줄 것을 부탁했다.

 

35세의 펑쥔치는 허난성 루난현(汝南縣) 사람이다. 2005년에 북경대학에 들어가 사회학박사를 받았다. 2008년 3월부터 신예현에서 현장조리(縣長助理)를 맡는다. 신예현은 그에게 단독 사무실, 차량 1대와 비서 1명을 붙여주었다.

 

펑쥔치는 신예현의 권력핵심에 들어가기 위해, 평균 매일 비서에게 3명이상의 관리로 하여금 자신의 사무실로 와서 담화를 나누도록 했다. 자신보다 직위가 높은 현의 고위간부들에 대하여는 펑쥔치가 직접 그들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얘기했다.

 

북경대학으로 돌아올 때, 펑쥔치의 두 트렁크에는 면담자료가 가득 들어 있었다. 수백명의 면담대상중에는 현위서기를 포함한 161명의 당정1인자도 포함되어 있다.

 

2010년 8월, 펑쥔치는 당대중국연구소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근 30만자의 논문초고를 <남방주말>에 보냈고, 남방주말에서 관심을 둔 것은 정치가족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펑쥔치는 이 논문을 신문에 급히 실리길 원치 않았다.

 

금년이 되어, 지방정부는 인원교체가 이루어지고, 신예현위서기 팡셴중(方顯中)은 난양시로 전보되었고, 다른 간부들도 다른 시,현으로 전보되었다. 펑쥔치는 비로소 이 논문을 신문에 싣는 것에 동의한다. 펑쥔치는 이렇게 말한다. 네티즌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학술논문이 이상하게 알려지는 것은 그가 원치 않았다.

 

"나는 고민된다. 신예는 나를 2년간 길러주었고, 애정도 있다." 펑쥔치는 대부분의 인터뷰요청을 거절한다.

 

1. 인척관계망

 

펑쥔치가 161개의 정치가족의 계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신예현지>, <신예연감>와 <난양간부명단1949-2000>등 자료외에, 두 명의 생각이 트인 간부집안 자제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예의 21개의 정치대가족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張)씨집안이다. 펑쥔치의 논문에 나타난 장씨집안의 핵심인물은 장타이캉(張泰康)이다. 그는 신예현의 전조직부장이자, 정협주석이었던 장이빈(張以彬)의 가명이다. 장이빈은 나중에 탕허현(唐河縣)의 현위서기를 지내고, 난양지구노동국장(勞動局長)의 직위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그의 여동생 장슈빈(張秀彬)은 신예현의 부현장과 정협주석을 지냈고, 매부(妹夫)는 위생국장이다.

 

장이빈에게는 8명의 자녀가 있는데, 아들 장신셩(張新生)은 현임 난양시 해관관장(海關關長)이다. 큰사위 장더바오(張德寶)는 난양시 관광국장(旅遊局長)이다. 둘째사위 허리민(賀利民)는 난양시 제1인민병원 원장이다. 넷째사위 왕칭(王慶)은 완청구(宛城區) 구장이다. 여동생 장슈빈의 아들은 난양시 응급구조센터 주임이고, 며느리는 완청구 공상국 부국장이다. 며느리의 부친은 신예에서 현위부서기와 정협주석을 지냈다. 장이빈의 큰사위 장더바오의 부친은 신예현 성관진 교육조장이고, 여동생 장핑란(張平嵐)은 신에현 기율검사위 부서기이다.

 

신예현에서 장씨집안에서 배출한 부과장급이상의 간부는 22명이고, 그중 절반은 난양시에 있고, 절반은 신예현에 있다. 또 다른 대가족 왕(王)씨집안의 2대에는 현임 난냥시정부 부비서장, 신예현 정법위부서기, 인대농공위주임, 항운국장등이 있다. 

 

21개의 대가족 외에 15개의 4명, 35개의 3명, 90개의 2명짜리 소가족도 있다. 이 161개의 정치가족은 신예의 크고 작은 정치부문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다. 금년 정치가족의 자제가 기율검사위, 조직부, 공검법(공안,검찰,법원), 현위판공실등 핵심부서에 집결하는 경향을 보인다. 동시에 외부로 뻗어나가고 있다. 혈연과 인척관계로 짜여진 관계네트워크는 난양, 허난성회 정저우, 심지어 베이징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인척관계로 관계네트워크를 짜는 것이 신예관료사회의 통상적인 모델이다. 아주 널리 알려진 전형적인 사례는 이러하다: 왕청(王城, 가명)은 처음에 현정부의 통신원이었다. 당시 현정부의 한 여성전화교환원이 현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왕청은 온갖 방법을 써서 그녀에게 접근했고, 결국 그 여성전화교환원의 딸과 결혼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현장과 관계를 맺는다. 왕청은 그 후 현정부판공실 부주임으로 발탁되고, 그후에 어느 국의 국장도 지낸다. 국장으로 있을 때, 왕청은 상무부현장의 조카딸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자신의 조카와 연애하도록 도와주어 성공적으로 결혼시킨다. 상무부현장은 왕청을 더욱 잘 보살펴 주었고, 결국 왕청은 승진가능성이 높은 어느 진의 당위서기로 승진해 나갈 수 있었다.

 

신예는 해방후 제1세대 간부들 중에서 군대에서 전업했거나 농공출신이 많았다. 자녀와 인척관계를 통해 정치가족을 형성한 것이다. '정치원로'들에 있어서, 다음 세대의 자녀들이 간부신분을 취득하도록 하는 것이 첫걸음이고, 이어서 관계네트워크를 통하여 계속 자녀들의 관계망을 넓혀가면서, 서로 발탁하고 중용한다. 펑쥔치가 조직부장과 면담할 때, 여러번 '노간부가 자기 자녀를 위해 청탁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난양의 조직부의 한 관리는 정치가족의 형성을 이렇게 이해한다: "포도넝쿨과 같다. 지지대를 따라서 자랄수록 커지고, 자랄수록 많아진다. 동시에 햇볕과 수분도 더욱 많이 받는다."

 

신예현 정치가족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적지 않은 정치가족은 업계내 혹은 계통내에서 번식하여 일종의 세습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장인이 어느 향의 서기이면, 그의 사위가 나중에 그 향에서 서기가 된다. 형부와 남동생이 모두 조직부 부부장의 지위에서 일한 적이 있기도 하다.

 

2. 부처장급이상의 현지도자들의 자녀들은 최소한 부과장은 되고, 많은 경우 정과장이다.

 

3. 정치가족의 크기와 가족핵심인물의 권리와 지위는 정비례한다. 핵심인물의 권리와 지위가 더욱 중요하다. 가족내에서 배출한 간부가 많으면 많을 수록 동시에 후대의 수량도 정비례로 늘어난다. 후대가 많을수록 가족내에서 배출되는 간부는 더욱 많아진다.

 

정치가족의 최대특징인 지방이익집단과 세력집단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 현의 한 주요지도자는 자주 많은 조치들이 집행되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원인은 바로 지방이익집단의 방해과 반발때문이다. 많은 경우에는 잘못 건드려서 문제될까 겁을 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집행하려는 관리가 물러나게 된다.

 

2. 가족자제와 '외부인'

 

정치가족의 독과점은 평민출신의 간부들의 불만을 날로 커지게 만든다.

 

펑쥔치가 고찰한 신예관료사회의 규칙은 이러하다: 보통간부는 고장급(股級)에서 부과장까지 8년이 걸린다. 부과장에서 정과장으로 승진하는데 3년이 걸리고, 정과장에서 부처장으로 승진하는데 7년이 걸리며, 부처장에서 정처장으로 승진하는데 7년이 걸린다. 즉 22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관직에 들어오면 30세에 부과장이 되고, 33세에 정과장이 되고, 40세에 부처장이 되며, 47세에 정처장이 된다. 그리고 정처장의 직위에서 몇년 더 일하다가 은퇴한다. 극히 드물게 부청장급(副廳級)으로 승진하기도 한다. 이것이 대부분 현,향의 간부들의 정치생명여정이다.

 

다만 이것은 이상적인 경우이다. 현실에서 이 여정을 실현하는 관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그저 허직인 부과장급에 머무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1983년에 일을 시작한 한 간부는 20여년만에, 향의 각종 위원을 모조리 거치는데, 같이 들어온 정치가족의 자제는 일찌감치 부처장급이 되어 핵심간부가 되어 있었다.

 

그 간부는 원망이 많았다. 매번 인사때마다 그는 발탁명단에 들어가지만, 항상 "배경있는 사람에게 밀렸다" 처음에는 상사들도 너는 아직 젊으니까 다음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다독거렸지만, 나중에는 다시 '군중기초가 부족하다'는 등의 핑계를 댄다. 즉 돈을 써야지만 직위를 바꿔줄 수 있다는 암시이다.

 

신예 관료사회의 시세를 보면, 승진하는 직급의 고하에 따라 1만위안에서 5만위안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배경이 없는 간부는 바라는 직위로 보내주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허직(虛職)을 돌 뿐이다. 예를 들어, 선전위원에서 조직위원으로 바뀌는 정도이다.

 

향.진의 부과장에서 정과장으로 승진하는데는 8개의 숨은 단계가 있다: 하급부서 상급까지 차례로 말하자면, 종치판공실주임, 공회(노동조합)주석, 인대부주석, 향진장조리, 무장부장, 당위위원, 부향진장, 향진당위부서기. 많은 평민자제는 평생을 노력해도 이 8개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간부자제는 '빠른 걸음으로' 정과장의 위치에 도달한다. 정과장에서 승진하는 통로는 부처장이다. 여기에는 순서대로 현정부당조위원, 현장조리, 부현장, 통전부장, 선전부장, 정법위서기, 조직부장, 기율검사위서기, 상무부현장, 현위부서기등 10여개의 숨은단계가 있다. 배경이 있는 정치가족구성원은 짧은 몇년만에 이를 건너뛰고, 마지막에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다른 현의 정처장 실직(서기, 현장, 인대주임, 정협주석)을 맡는다. 평민자제들의 불만은 그 길이 그들에게는 거의 막혀있다는 것이다.

 

정치가족자제들이 관료사회에서 쉽게 승진하는 것은 평만자제들의 불만을 산다. 한 향간부는 여러번 실의를 겪은 후, 스스로 서재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서예만 연습하면서 밥도 먹지 않았다.

 

아래는 정치가족자제의 승진사례이다.

 

리(李)씨성의 관리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중학도 마치지 않고 공부를 그만두었는데, 검찰원의 운전기사로 들어간다. 몇년간 일한 후에는 재정국의 공무원이 된다. 이 기간동안 리는 다시 관계를 통해 아들의 인사자료를 수정하고, 돈을 써서 대학 졸업장을 얻는다. 그렇게 하여 그는 간부신분을 얻게 된다. 신예현의 사람들은 그가 중학교도 못나온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는 난양시로 전출가서, 어느 구판공실부주임을 거쳐 현재는 어느 구의 구장이 되어 있다. 리의 차남은 전문대학을 나왔다. 그도 연수를 거쳐 대학졸업장을 얻는 방식으로 간부가 된다. 먼저 어느 향의 일반공무원으로 들어간 후, 3년이 지나 부처장급 승진후보가 되어 간부가 된다. 나중에 난양의 어느 시직속기관으로 옮겨간다. 몇년후, 다시 신예로 돌아와서 정처장급의 실직을 맡는다.

 

이상의 방식은 신예의 사투리로 말하자면 "磨活"이다. 그 뜻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관계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승진한다는 말이다.

 

3. 일박서산(日薄西山)

 

최근 들어 허난에서도 부정부패척결이 일어나고 있다. 신예의 과장급 간부들도 낙마하고, 관료사회에는 지진이 왔다.

 

펑쥔치의 논문이 신문에 실리기 전에, 신예부현장 가오즈커(高志科), 시정공용사업관리국장 청원(程文)과 6년간 재정국장을 지낸 바 있는 방직집단 부동사장 가오자오양(高照陽)이 차례로 '쌍규'당한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청원의 낙마는 인민로 개조공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공사예산은 3천위안이었는데, 실제 공사가 완료되었을 때 들인 돈은 8,700만위안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청원은 동생 청레이(程雷)와 조폭배경을 지닌 상인 판샤오차오(樊小超)와 협력하여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청원이 '쌍규'를 당한 후, 동생 청레이와 판샤오차오도 모두 체포된다.

 

한 관리의 낙마는 왕왕 그 가족세력의 와해를 불러온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전신예현 조직부장을 지내고, 이미 상무부현장이 된 리위펀(李玉芬)도 '쌍규'를 당한다. 그녀는 카이펑(開封)의 조직부장 리썬린(李森林)사건에 연루되었다. 펑쥔치는 일찌기 신예의 10명의 여성정과장급 실직간부를 면담한 바 있는데, 거의 모두 정치가족출신이었다.

 

의미심장한 것은 정치가족의 여성구성원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리위펀은 펑쥔치와의 면담때 놀라운 말을 했다는 것이다: "가정과 업무에서 여자가 잘 처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여자가 일을 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나의 생각은 여자는 여자의 방식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젊어서 즐겁게 살고, 나이가 들어서는 편안하게 노후를 지내는 것이 좋다. 여자는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의 추세는 정치가족이 신예현에서 점점 쇠락하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가족계획이 근본원인이다. 신예의 최대정치가족이 장씨집안인 것은 자녀가 많은 것도 그 이유중 하나였다. 그러나 현재 간부들은 엄격하게 한자녀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정치가족에게 이는 치명적이다. 또 다른 원인은 간부교류제도이다. 외지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은 정치가족의 네트워크를 파괴하는데 큰 작용을 했다. 그 다음으로 취업개념의 변화와 고등교육의 보급이 있다. 1980년대, 많은 신예의 간부는 온갖 방법을 써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일자리를 찾았다. 대도시에 남으려 하지 않았다. 현재 그들의 자녀들은 취업때 온갖 방법을 써서 대도시에 남으려 한다. 간부자제들이 점점 중등이상의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면서 신예의 정치가족은 점점 물려주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더욱 큰 범위내의 체제에 흡수되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