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주충(周冲)
홍콩의 미디어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가장 홍콩을 잘 대표하는 것은 침사추이(尖沙咀)의 종루(鐘樓)도 아니고, 빅토리아피크(太平山)의 피크타워(老襯亭)도 아니고, 오션파크(海洋公園)도 아니고, Club Bboss(大富豪夜總會)도 아니며, 미스홍콩이다."
최근 근 50년동안 인기를 끌어온 미인선발대회가 다시 열렸다.
6월 16일, 2021년 미스홍콩 2차예선이 정식으로 개최되었고, 65명의 미녀들이 본선에 뽑혔다.
이전에는 2차예선이 미스홍콩선발대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단계였다.
그러나, "화간수괴수(花間誰魁首), 월쇄동라만(月灑銅鑼灣)"의 성황은 이미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이 더더욱 얘깃거리로 삼는 것은 매년 낮어지는 참가자의 수준과 형편없는 수준의 참가자들이다.
그러나, 3,4십년전에 뽑힌 미스홍콩은 홍콩에서 가장 빛나는 '도시명함'이었다.
포토샵도 없었고, 성형도 없었지만, 그녀들은 아름다웠고, 그 시대를 빛냈다.
그녀들은 풍운이 교차하는 홍콩의 전성기를 함께 만들었다.
그녀들의 외모는 다른 사람들이 성형하는 모델이 되었고,
그녀들의 의상은 시대를 앞서가는 유행의 풍향계가 되었으며,
그녀들의 작품은 홍콩연예게의 황금시대를 만든다.
미스홍콩이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은 이미 다툼없는 사실이다.
예전에 쌓아놓은 휘황한 성취를 생각하면 탄식이 나오게 된다.
아쉽게도 밀레니엄시대에 접어든 후, 더 이상 유명한 스타는 나오지 않게 된다.
선발된 미스홍콩의 우승자를 거의 90%의 홍콩인들은 잘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한때 그렇게 대단했던 미인선발대회가 왜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일까?
미스홍콩의 역사는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전쟁이 막 끝났던 때이고, 상류사회에서 "여지화원야총회(麗池花園夜總會)"에서 첫번째 쇼를 개최한다.
말이 미인선발대회이지 실제로 참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겨우 11명이었고, 대부분 댄서였다.
당시는 아직 인식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 홍콩매체는 미스홍콩은 양갓집규수가 아니다라고 규정짓는다.
1973년에 이르러 TVB가 주최자가 되면서 미스홍콩은 정상궤도에 접어든다.
그때는 홍콩이 자그마한 어촌에서 국제금융도시로 발전하고 있었고, '아시아의 네마리 용'중 하나가 되었다.
인력이나 물력이나 모두 발전의 고속도로에 접어든 것이다.
미스홍콩선발대회는 평민여자에게 계급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제공했을 뿐아니라, 전체 홍콩의 이미지를 선전할 사명도 지게 된다.
1973년의 미스홍콩 우숭자는 데보라(狄波拉)가 차지한다.
그러나, 데보라보다 사람들에게 더욱 익숙한 것은 이때의 전군(殿軍, 4위) 조아지(Angie Chiu, 趙雅芝)이다.
당시 19살의 조아지는 수영복심사때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3위내에 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후 성공을 보면 3위내에 들었던 미스홍콩들을 압도한다.
그녀가 주연한 <희설건륭>, <상해탄>, <신백낭자전기>등의 극은 큰 성공을 거두어 70.80.90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녀는 명실상부한 불로여신(不老女神)이다.
6년후, 종초홍(鍾楚紅, Cherie Chung)은 조아지의 길을 그대로 걷는다.
1979년 미스홍콩선발대회에 참가한 그녀는 하이힐을 신을 줄 몰라서, 걷다가 실수를 한다. 그리하여 4위에 머문다.
비록 4위에 머물렀지만, 그녀가 영화계로 진입하려는 야심은 막지 못했다.
연예계에 들어간 후 그녀는 리아오(李敖)에 의해 "동방의 마릴린 먼로"라는 평을 듣는다.
홍콩매체는 한때 그녀를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관지림(關之琳), 장만옥(張曼玉), 왕조현(王祖賢)과 이름을 나란히 한다"
"임청하(林淸霞), 장만옥, 매염방(梅艶芳)과 합쳐서 '하옥방홍(霞玉芳紅)'이라 불렸다."
그녀의 자태는 당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그외에 70년대에는 "미스홍콩중의 미스홍콩"을 배출한다. 바로 1977년의 주령령(朱玲玲, Loletta Chu)이다.
주령령은 미스홍콩역사상 첫번째로 미스홍콩과 미스포토제닉을 동시에 받았다.
그녀는 미스홍콩이 된 후 명문집안에 시집가서, 이안 폭(霍震寰, Ian Fok Chun-wan)의 부인이 된다. 바로 다이빙금메달리스트 궈징징(郭晶晶)의 시어머니이다.
그녀를 시작으로 홍콩매체는 미스홍콩에 대하여 이런 불문의 규칙을 만든다:
"관군(冠軍, 1위)은 처를 뽑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숙대방(賢淑大方)해야 한다; 아군(亞軍, 2위)는 여자친구를 뽑는 것이다. 풍정만종(風情萬種)해도 상관없다; 계군(季軍, 3위)은 여동생을 뽑는 것이다. 천진단순(天眞單純)하면 된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스홍콩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1983년 19살의 장만옥이 검은 머리카락에 빛나는 눈을 가지고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다.
일거에 미스홍콩 아군(2위)와 미스포토제닉을 차지하며, 연예계로 진출한다.
많은 홍콩의 명사들은 그녀를 칭찬한다.
"장만옥을 가장 좋아한다. 모양도 좋고, 피부가 너무 희다. 머리카락도 좋고, 작은 눈에 작은 입, 체격도 흠잡을 곳이 없다. 웃으면 순결한 토끼같다."
"백지와 같다. 아무런 심기가 없다. 성격이 외형보다 더 귀엽다."
영화계로 진입한 후 그녀는 순탄하게 성공의 길을 걷는다. 매염방, 장국영(張國榮)같은 업계의 거물들과도 같이 찍는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열심히 했다.
그녀는 실력으로 처음 영화계에 들어왔을 때의 꽃병이라는 레테르를 떼어버렸다.
영화계의 큰 상은 모두 차지한다.
금상장 여우주연상 5회, 금마상 여우주연상 4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1회,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 1회....
그녀는 아무도 넘보기 힘든 영화계의 신화를 썼다.
90년대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의 여배우들은 모두 미스홍콩무대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미스홍콩에서 입상하지 못하더라도 연예계로 진출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예를 들어, "성형풍파"로 스스로 중도포기하여, 미스홍콩에 입상하지 못한 구숙정(邱淑貞, Chingmy Yau)이 대표적이다.
1987년 구숙정이 미스홍콩이 되느냐가 당시의 핫이슈였다.
대회중 다른 참가자인 황앵(黃鶯)은 구숙정이 턱수술을 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해명하려 했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자, 대회를 포기한다.
미스홍콩선발대회를 포기한 후, 피부가 하얐고, 얼굴도 예쁘며 허리는 가늘고 다리는 긴 그녀를 왕정(王晶)감독이 영화에 출연시킨다.
그녀는 섹시함으로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어서 1988년의 미스홍콩선발대회에서는 또 한 명의 공인된 미녀가 등장한다.
그녀는 바로 중국-포르투갈혼혈인 이가흔(李嘉欣, Michele Monique Reis)이다.
독설로 유명한 홍콩매체도 그녀의 미모에는 찬탄을 금치 못한다.
"홍콩제일미인" "동방의 진주" "석파천경(石破天驚)"등으로 그녀의 미모를 형용했다.
설사 죽는 장면에서 드러누워있는 모습을 찍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는 연예계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명문집안에 시집가는 것에 더욱 흥미가 있었다.
전반생을 그녀는 부호들 사이를 오갔고, 어렵사리 부호3대인 줄리안 후이(許晋亨)과 결혼한다.
미스홍콩은 항상 '지혜와 미모를 모두 갖춘다'는 선발이념을 가졌다.
그러나, 70,80년대에 선발된 미스홍콩은 '미모'를 중시하고 '지혜'는 경시했다.
1980년대말, 1990년대초에 이르러, 이런 선발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미스홍콩의 고학력시대가 열린다.
1989년의 미스홍콩 관군(1위)는 터론토대학을 졸업한 진법용(陳法蓉, Monica Chan Fat Yung)이 차지한다.
시원시원한 단발머리와 영기가 넘치는 도시적 기질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1990년에는 홍콩이공대학을 졸업한 원영의(袁詠儀. Anita Yuen)이 미스홍콩 관군(1위)를 차지한다.
무대에서의 그녀는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는다.
물기촉촉한 큰 눈과 탱탱한 뺨으로 사람들은 그녀에게 "정정(靚靚)"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나중에 영화계로 진출하여서도 원영의는 순조롭게 성공한다.
미모뿐 아니라, 연기도 발군이어서 연속 3년 금상상을 받는다.
1993년에는 금상장신인여우상을 받고, 1994년, 1995년에는 연속 2년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아쉽게도 지금 원영의를 얘기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녀의 미스홍콩 관군도 아니고, 그녀의 여우주연상도 아니고, 그녀와 장지림(張智霖, Julian Cheung)과의 사랑이야기이다.
이는 그녀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시 원영의와 같이 무대에서 활약한 사람으로는 계군(3위)의 양소빙(梁小冰, Sabrina Leung Siu-bing)이 있다.
양소빙은 나중에 TVB와 계약해서 많은 고전드라마에 출연하고, 명실상부한 '고전미인'이 된다.
그녀가 연기한 여러가지 배역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혈새금도>의 양천천, <원월만도>의 청청, <녹정기>의 아가....
1991년의 미스홍콩 관군(1위)인 곽애명(郭藹明, Amy Kwok)고 고학력 미스홍콩이다.
UCLA의 학위를 가진 그녀는 한때 NASA에서 실습엔지니어로도 일했다.
우아한 언행으로 심사위원들은 그녀를 위해 새로운 상까지 만든다 최우수유머말투상.
곽애명과 함께 3위내에 든 사람으로 계군(3위) 채소분(蔡少芬, Ada Choi Siu-fan)이 있다.
젊었을 때의 채소분은 오관이 단정하고 달콤한 소녀의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이가흔과 마찬가지로 모두 깨끗한 눈과 흰 이빨을 가진 미인이었다.
아마도 이런 외형상의 유사함때문인지, 그녀들은 둘 다 부호 조셉 라우(劉鑾雄, Joseph Lau Luen Hung)의 눈에 든다.
그녀들이 동시에 최종결선에 오르고, 당시 44%라는 TVB의 최고시청률기록을 세운다.
거의 홍콩사람의 절반이 이 날 밤의 결선을 기억하고 있다.
1990년대는 홍콩에 있어서 풍운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이 십년간, 홍몽은 홍콩영화의 황금시대를 겪고, 홍콩회귀를 겪고, 또한 아시아금융위기도 겪는다.
이 모든 것은 조용히 변화했다.
미스홍콩선발대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성기에서 몰락하기 시작하고, 더 이상 옛날의 영광은 없었다.
1991년이후, 미스홍콩은 더 이상 무슨 석파천경의 미인을 배출하지 못한다.
가끔 출중한 미인이 나오기는 하지만, 모두 TVB에서 데려간다.
예를 들어, 1993년 최우수매체환영상과 최우수연예인잠재자질상을 받은 곽가영(郭可盈, Kenix Kwok)
1994년 미스홍콩 계군(3위)의 이기홍(李綺紅, Theresa Lee),
그리고 1997년 계군(3위) 사시만(佘詩曼, Charmaine Sheh Sze Man)이 있다.
모든 것은 21세기로 향해 갔지만, 미스홍콩의 영광은 영원히 20세기에 머물렀다.
1999년의 미스홍콩선발대회는 마지막 여휘(餘暉)였다.
관군(1위) 곽선니(郭羨妮, Sonija Kwok Sin-nei)와 아군(2위) 호행아(胡杏兒, Myolie Wu Hang Yee)는 입상한 후 함께 TVB에 들어간다.
이후, 미스홍콩선발대회는 매년 하락하고, 더 이상 무슨 물결을 일으키지 못한다.
나중에는 '미스홍콩닮았다'는 말이 항간에서 사람을 욕하는 말이 되어 버린다.
많은 미스홍콩은 모두 인기가 없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중 2007년의 미스홍콩 장가아(張嘉兒), 2017년의 미스홍콩 뇌장아(雷莊兒)는 사람들의 조롱을 가장 많이 받았다.
장가아는 "돼지미스홍콩(猪扒港姐)"로 불리고, 뇌장아는 "가장 못생긴 미스홍콩(最醜港姐)"로 불렸다.
미스홍콩은 홍콩영화처럼 모두 밀레니엄 이후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둘 간에는 서로 관련이 있고, 은밀하지만 깊은 관계가 있다.
홍콩영화드라마의 쇠락으로 연예산업이 받쳐주지 못하면서 홍콩의 문화는 내리막길을 걷고, 미스홍콩선발대회의 열기도 퇴색한다.
연예계의 공급체인이 이렇게 끊어지게 된 것이다.
미스홍콩에 입선하더라도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되었다.
대륙의 여러 선발대회예능이 굴기하면서 홍콩, 대만의 여성들도 많이 참가하고 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은 모두 대륙으로 진입하여 발전하고자 한다.
왕정은 이런 말을 했다: 현재 광동어시장은 너무 좁다.
동시에 여성의 의식도 달라졌다. 여성의 자주의식이 강해져서 미인선발대회같은 것에 코웃음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가정에서는 더욱 신중해졌다. 자식이 미스홍콩에 참가하여 스캔들이 난무하는 연예계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러가고, 한때 인기를 끌었던 미스홍콩선발대회도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옛기억이 되어 버렸다.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밀물이 오면 썰물이 있다. 그것이 법칙이다.
우리가 아무리 아쉬워 하더라도, 옛날의 미인에 대하여 아무리 그리워하더라도, 옛날의 번화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더라도, 어쨌든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풍류시대를 생각하면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배웅하는 것이다.
그 인재가 배출하던 시대는 역사의 먼지 속에 점점 묻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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