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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지미 라이(黎智英): 지오다노와 애플데일리(蘋果日報)의 창업자

by 중은우시 2021. 6. 29.

글: 이용(李勇)

 

작년 6월 21일, 홍콩의 Beacon Hill(筆架山)에는 큰 플랭카드가 걸렸다: "중공이 지미라이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中共計劃暗殺黎智英)". 폭은 개략 2미터가량이고 길이는 20미터였다. 주룽당(九龍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홍콩사람들은 모두 안다. 지미라이는 중공정권의 눈엣가시라는 것을. 왜냐하면 그가 발행하는 인기신문 '애플데일리'는 홍콩의 반공신문이기 때문이다. 지미라이는 중공의 탄압에 맞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년에는 직접 미국의 백악관으로 가서 트럼프 정권의 부통령 펜스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홍콩반송중운동 및 일체의 중공정권에 대한 항의시위대에도 참가하여, 중공은 그에게 '서방적대세력의 매판이자 주구'라고 비난한다. 그후에 신비인물을 보내어 추적하고, 그의 주소지 밖에는 두 대의 검고 흰 멘바오차가 지키고 있었다. 이를 보면 중공이 그에게 얼마나 원한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1997년 홍콩회귀전에 지미 라이가 홍콩에서 반공의 입장을 견지했고, 쉽게 중공에 의해 '국민당특무'라고 규정짓거나 혹은 '국민당에 매수되었고' 특수한 사명을 가진 '반중분자'라고 규정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규정은 일률적으로 '서방반중세력'으로 옮겨갔다.

 

지미 라이는 타이완에서 중화민국국적으로 입적하였지만, 그는 국민당이나 민진당, 혹은 통일, 독립에 대하여 아무런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지금은 대만독립경향의 민진당의 중공과의 밀월기는 이미 지났으므로, 중공은 대만독립에 반대한다는 이유를 들어 중화민국을 없애서, 자신들이 중국의 유일한 정부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실 지미 라이도 좋고, 국민당원도 좋고, 모두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홍콩이나 대만으로 피신한 사람들이다. 특히 지미 라이는 어려서부터 중공의 가혹한 통치하에 광저우에서 생활했다. 중공이 광저우를 '해방'할 때, 그는 2살도 되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공산군이 입성하기 전에, 애인을 데리고 홍콩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그의 모친과 쌍동이여동생 리후이잉(黎慧英)과 정신지체인 누나만 광저우에 남았다. 기실 그의 모친은 광저우가 '적화'되기 전에, 친공여청년이었다. 다만 중공의 빈번한 정치운동에서 부침이 있어, 어떤 때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다가 어떤 때는 반동분자로 비판받았다. 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복이 있으며 화와 복이 수시로 바뀌었다. 당내투쟁에서 그의 모친은 자주 비판을 받았고, 무릎꿇고 벌을 받거나 노동개조영에 보내어지기도 했다. 지미라이의 오누이 3명은 제대로 끼니도 해결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3살때 지미 라이는 모친을 따라 한 부잣집의 주방에서 일했다. 한밤중이 되어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와 쉴 수 있었다. 이런 생활이 6살때까지 계속된다. 모친이 교외의 노동개조영으로 끌려가자, 살아남기 위하여, 그는 할 수 없이 바깥의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식당에 가서 남은 음식을 구걸해서 자매들에게 먹였다. 그 후에 그는 그의 여동생이 계속 공부할 수 있게 하고, 정신지체인 누나도 챙기기 위해서 스스로 밖에 나가 음식을 구했다. 겨우 6,7살짜리 어린아이가 밖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는 없었다.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광저우의 화교신촌에 있는 주택에서 다른 사람의 옷을 훔쳐서 팔아 약간의 돈을 얻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깥에서 말리는 오징어, 납육(臘肉)같은 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먹었다. 어떤 때는 광저우의 교외로 가서 고구마를 캐서 배를 채웠다. 8,9살때, 지미 라이는 장사를 시작한다. 과일가게에서 버린 과일을 깨끗하게 말려서, 소학교학생들에게 팔았다. 다 팔리지 않으면 집으로 가져와 자매들을 먹였다.

 

나중에 그는 광저우 기차역에서 승객들의 짐을 들어주고 팁을 받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승객의 짐을 들어주다가 한 홍콩사람을 만나게 된다. 지미 라이가 그의 짐을 들어주었는데, 홍콩사람에게는 잔돈이 없었다. 그래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초콜렛을 꺼내 그에게 팁 대신에 주었다. 지미 라이는 처음 초콜렛을 먹어본 것인데, 아주 맛있다고 여겨서, 그 홍콩사람을 쫓아가서 이렇게 맛있는 과자는 어디에 가면 살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홍콩사람은 그에게 홍콩에는 도처에 있다고 말해준다. 이렇게 물은 것으로 인하여 그는 홍콩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법밀항에서 운좋게 마카오에 도착한다. 거기서 다시 홍콩으로 간다. 그해에 그는 겨우 12살이었다. 몸에는 겨우 1홍콩달러의 돈만 있었다. 광저우에서 받은 팁이었다. 그가 홍콩의 한 사이클복공장에 취직한다. 공장의 사장은 그가 똑똑한 것을 보고 그에게 일자리를 주어서 잡일을 시킨다. 월급은 겨우 8홍콩달러였다. 나중에 그는 이 사이클복공장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복장제조업에 뛰어들게 되고, 그로 인해 큰 돈을 벌게 된다. 그는 인터뷰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내가 1홍콩달러에서 오늘날 5억홍콩달러의 부자가 된 이야기이다"

 

전설이라면 전설이다. 지미 라이는 사이클복을 만들 때,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그는 공부를 해야만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도처에서 공부할 길을 찾았다. 공장의 사장은 그에게 공부하려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홍콩에서 생활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를 잘 배워야 한다.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영어학원에 가서 영어를 배워라, 들을 줄 알고 말할 줄 알면, 출로가 없을 걸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미 라이는 공장 사장의 말을 듣고, 영어학원을 찾아서 열심히 공부한다. 과연 1,2년후에 영어에 발전이 있었다. 공장 사장은 그에게 잡일을 시키다가, 공장에서 구미로부터 받은 주문을 처리하는 일을 맡긴다. 그가 이들 사이클복업체들과 교분을 쌓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그가 의류사업을 하는 기초를 이룬다. 마지막에 그가 이 업계에서 성공한 것은 역시 한 사이클복상인의 도움이 있었다. 그는 막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젊은이였다. 홍콩에 돌아와서 그의 부친이 경영하던 의류공장에서 책임자로 일했다. 나이도 젊고 기세도 대단했다. 그가 바로 나중에 홍콩입법국의원이 되는 스티븐 청(張鑑泉)이다. 당시 스티븐 청의 부친은 홍콩에서 방직염색업을 경영하는 부호였다. 스티븐 청은 회사에서 주문을 받는 일을 했고, 지미 라이는 사이클복공장에서 주문을 내는 일을 했다. 그가 스티븐 청에게 서명을 받고 날인을 받아야 비로소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지미 라이는 그의 회사로 가면, 자주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비로소 그의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가 퇴근 하기 전에 스티븐 청의 사무실밖으로 갔다. 비서가 그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은행이 문닫을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스티븐 청의 사무실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비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바로 스티븐 청의 사무실로 뛰어 들어간다. 그는 두 발을 책상위에 올려 놓고, 친구와 즐겁게 통화하고 있었다. 지미 라이는 화가 나서 서류를 그의 탁자 위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은행에 가야되니 빨리 서명해달라고 한다. 스티븐 청은 즉시 전화를 내려놓고 서명을 해주었다. 지미 라이는 서류를 즉시 집어 바로 은행으로 달려간다. 생각지도 못하게, 사이클복공장의 사장은 다음 날 다시 그에게 스티븐 청을 찾아가서 서류에 서명을 받아오라고 한다. 그는 정오전에 스티븐 청의 사무실에 도착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스티븐 청의 비서가 그에게 스티븐 청이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해주며,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라고 한다. 스티븐 청은 그가 들어오자 바로 일어나서 악수를 하며, 그에게 점심을 어디가서 먹으면 좋을지 물어본다. 이렇게 둘은 같이 지미 라이가 자주 가던 갈비집으로 간다. 앉아서 갈비덮밥 2그릇을 주문하고, 2접시의 반찬도 시킨다. 둘은 아주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스티븐 청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다고. 이때부터 지미 라이는 스티븐 청과 무슨 말이든지 서로 다하는 가까운 친구가 된다. 그리고 스티븐 청으로부터 많은 도움도 받는다.

 

의류업계에서 여러 해동안 일하면서, 지미 라이는 회사를 여러 군데 옮겨다녔고, 마지막에는 아주 큰 회사의 사장을 지낸다. 그는 영어를 잘 하고, 일도 잘했기 때문에, 회사는 그를 미국뉴욕에 2년간 파견보내기도 했다. 그는 신문에서 "애플컴퓨터"회사가 아주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고, 스티브 잡스가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직접 그를 만나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약속을 잡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차를 몰고 애플회사의 정문앞까지 가서 차 속에서 애플회사의 대문을 주의깊게 바라본다. 결국, 어느 날 스티브 잡스가 대문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즉시 앞으로 달려가서 자신을 소개하고, 대명을 듣고 찾아왔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IT업계의 거물은 그의 낡은 차에 올라타서 그와 차 안에서 45분간이나 얘기를 나눈다. 지미 라이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이 45분의 대화에서 그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는 애플회사의 성공을 흠모하여, 나중에 그가 홍콩, 타이페이에서 창간한 신문을 '애플'로 짓게 된다.

 

지미 라이는 비록 의류업으로 시작했지만, 그가 큰 돈을 번 것은 주식시장에서 주식투자로 번 것이다. 그는 이 돈을 가지고 '공명직조창(公明織造廠)'을 인수하고,  이때부터 스스로 의류회사를 경영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직조창의 원료부족으로 원료를 구매해야 했는데, 원료회사는 외상을 하지 않고, 반드시 현금거래를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지미 라이는 현금이 잘 돌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 스티븐 청을 떠올린다. 그는 스티븐 청에게 부친에게 말해서 200만홍콩달러의 수표를 빌려주어 급한 불을 끄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절대로 그 수표를 은행에 제시하여 현금화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만일 스티븐 청의 부친이 믿지 못한다면 수표를 발급한 후, 즉시 은행에 분실싵고를 해도 좋다고 말한다. 스티븐 청은 과연 그를 도와준다. 그의 부친에게 수표를 받아 그에게 건네준다. 스티븐 청은 그 수표를 가지고 원료상인들이 모이는 차루(茶樓)로 가서 점심식사를 하며, 아는 사람에게 이 수표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는 의류제조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업체와 가까운 친구사이고, 사업상 거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원료상인은 그 수표를 가지고 동종업계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그들은 모여서 수표를 본 후에 문제없는 수표임을 확인한다. 수표를 지미 라이가 돌려받기도 전에, 그중 한 원료상인이 그에게 원료를 공급해 주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지미 라이의 자금곤란은 해결된다. 그후 그는 수표를 스티븐 청을 통해 그의 부친에게 돌려준다. 이를 보면 지미 라이의 기지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생각지도 못하게 지미 라이는 홍콩에서의 수십년동안 두 가지 총명하지 못한 일을 한다. 하나는 1994년 7월 그가 홍콩에서 "일주간(壹週刊)"을 발간하면서 중공국무원총리 리펑(李鵬)을 공격한 것이다. 리펑이 도시를 도륙하고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인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글을 쓰면서 리펑의 존재야말로 '초급국치'이며, 그는 'IQ가 제로인 왕빠단'이라고 욕한다. 그런데 이것이 중공당국의 화를 불러온다. 그리하여 그가 연 대륙의 100여개 지오다노점포가 문을 닫아야 했고, 그의 의류공장은 몰수당한다. 할 수 없이 지미 라이는 지오다노의 주식을 모두 매각해야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중공정권과 피맺힌 원한을 맺게 된다. 다른 하나는 홍콩에서 '반송중'항의시위가 일어날 때, 그는 돈을 내서 군중을 도운다. 그리고 직접 군중을 이끌고 길거리로 나서서, 중공정권이 '일국양제50년불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항의해서, 중공의 분노를 산다. 그리하여 애플데일리는 보이콧하고, 대륙과 거래가 있는 회사는 애플데일리에 광고를 싣지 말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그의 영업수익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수입이 지출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심지어 누군가 그에게 대만으로 가서 대만의 애플데일리를 내면서 잠시 폭풍우를 피하라고 권했지만, 지미 라이는 홍콩에 남았다. 그리고 시위를 하는 것은 홍콩인의 권리라고 여긴다. 그는 중공이 그에게 손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지미 라이는 대만에서 이미 중화민국국적을 얻었다. 그러나 홍콩의 공산정권은 그를 계속 체포했고, 애플데일리에 대하여는 압수수색을 계속했다. 그는 홍콩정부가 시진핑의 명을 받들어 그를 치는 것이라고 알았다. 그런데도 그는 홍콩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으니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지미 라이가 홍콩에서 발행하는 애플데일리는 이때 홍콩에서 두드러진 반공미디어였다. 기실 지미 라이가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정치가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가 애플데일리를 창간하기 전에, 먼저 '일주간'잡지를 창간했다. 원인은 그가 의류제조업에서 지오다노로 홍콩의 부호가 되었는데, 이제 다른 업종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문업을 시작한 것이다. 영국점령시기에는 홍콩은 언론자유가 있었고, 신문, 잡지출판에 제한이 없었다. 시장에는 친공, 반공 심지어 황색, 도박, 마약같은 간행물도 버젓이 팔렸다. 신문을 발행하는 사람은 그저 손해만 보지 않으면 된다. 다만 지미 라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사회유명인사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폭로한다면 반드시 독자를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돈을 분명 벌 수 있다. 그가 의류를 만들 때처럼, 기발한 방법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타이페이 신문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미 라이는 전형적인 '상인신문'이다. 전통적인 '문인신문'과는 달랐다.

 

지미 라이가 홍콩에서 '일주간'을 출간하자 인기리에 팔렸다. 2년동안 4000여만홍콩달러를 번다. 잡지창간에 성공하면서, 지미 라이는 신문을 발행할 생각을 한다. 그는 '일주간'에서 뉴스를 처리하던 방식대로 신문을 만들면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독자들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여겼고, 그들이 좋아하는 분야를 보도하면 독자는 자연히 늘어나고, 신문은 잘 팔릴 것이라 여긴다. 전통적인 신문업계 사람들은 '문인신문'의 각도에서 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독자를 교육시키거나 독자를 인도하는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 신문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고 여긴다. 그들은 신문업계종사자는 '스승'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독자들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다.

 

지미 라이는 신문의 목적은 우선 독자를 끄는 것이라고 여긴다. 독자를 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누가 돈을 내서 신문을 사겠는가? 신문을 아무도 보지 않으면, 팔 수가 없고, 생존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구호는 "고심(高深)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한다"였다. 신문이 지위를 갖느냐 아니냐는 얼마나 팔리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지미 라이는 전문적으로 신문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신문윤리는 따지지 않으며, 더더구나 누군가의 스승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다.

 

지미 라이의 또 다른 스타일은 소송전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내용이 진실하면, 우리는 끝까지 소송전을 벌이겠다!" 그의 이유는 자유사회는 너무나 많은 명사들이 변호사에게 위임하여, 변호사서신을 보내어 신문사에 책임을 추궁하거나 겁을 주어서 신문사가 진상을 밝히지 못하게 막고, 기자도 감히 법정에 나가서 싸우려고 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사실이 웅변을 이긴다' 이것이 바로 지미 라이의 편집방침이다. 지미 라이가 가장 좋아한 직원 취재책임자인 왕쉐쥔(汪學君)이다. 그는 계속 지미 라이와 만나서 뉴스처리방식을 논의했고, 잡지를 만들 때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표지이야기'였다. 자주 표지에 어떤 이야기를 올릴지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지미 라이의 결정이 항상 판매를 끌어올리는 원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지미 라이의 신문발행에서 또 다른 비결은 높은 급여를 주고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것이다. 왕쉐쥔이 홍콩을 떠나 이민가겠다고 사직하면서 왕쉐쥔은 이런 말을 한다: 지미 라이의 최대 장점은 급여를 많이 주는 것이다. 이익분배까지 해준다. 1년에 14개월의 급여를 주는 외에, 세전이익의 20%를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나눠주었다. 왕쉐쥔이 그를 떠날 때, 그는 5만홍콩달러를 들여 롤렉스금장시계를 사주면서 눈물을 보인다: 만일 네가 외국생활이 지겨워져서 홍콩으로 돌아오려면 반드시 애플데일리로 와서 일해야 한다. 두 손을 들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겠다.

 

지미 라이가 애플데일리를 창간한지 10개월후인 1996년 5월 5일, 홍콩중문대학 신문학과의 유명한 교수 클레멘트 소(蘇鑰機)는 논문을 발표한다: 애플데일리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금방 문닫을 것이다. 이 논문의 제목은 "완전히 시장에 오리엔테이션된 신문학 - 애플데일리 케이스 연구" 그는 지미 라이의 "독자는 신문의 생명선이다. 독자의 지위는 지고무상이다. 그들의 의견은 항상 옳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미 라이는 말했다. 사회에서 멀어지고, 독자에게서 멀어지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문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홍콩신문계는 모두 알고 있다. 애플데일리의 직원은 급여가 가장 높다. 원인은 홍콩신문계의 급여는 항상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미 라이는 공개적으로 말했다: 애플데일리에서 연봉이 200만홍콩달러가 넘는 사람이 10명이 넘는다. 당시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로 스카우트되어간 총편집장 펑창(馮强)을 지미 라이가 눈독들인다. 지미 라이는 바로 삼고초려한다. 펑창에게 애플데일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는 반년급여로 400만홍콩달러를 주겠다고 한다. 그외에 그에게 신문의 주식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펑창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지미 라이의 통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신문업계에서 모두 주목하게 된다. <명보>에서 소설을 쓰던 작가를 지미 라이가 애플데일리로 스카우트 하면서 계약을 체결하는데, 매일 800자의 원고를 주면, 보수를 56,000홍콩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누군가 말했다. 문인은 노회한 상인인 지미 라이에게서 글이 돈된다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지미 라이의 말은 높은 돈을 내면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 하물며 이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 그는 실력없는 인물이 그저 놀고 먹는 것은 보질 못했다.

 

지미 라이가 만든 애플데일리는 출판한지 1년도 되지 않아 홍콩에서 2번째로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된다. 발행량이 폭증하고, 광고가 밀려 들어온다. 애플데일리의 지위는 이때부터 반석에 앉는다. 그후 그는 천수이벤이 중화민국총통에 당선되는 것을 보고, 대만도 이미 전면개방되어, 자유민주의 기초가 닦였다고 보고 2000년 대만에서 '일주간'을 간행하고, '애플데일리'도 발행하길고 결정한다. 반년도 되지 않아 즉시 가장 인기있는 신문이 되고, 대만 최대의 신문이 된다.

 

다만 홍콩은 국가안보법 아래에서 지미 라이가 홍콩국가안전법 및 기타 형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금년 5월 28일 14개월형을 받는다. 6월 17일, 홍콩경찰 국가안전처는 '외국 혹은 국외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안전을 위해한 혐의'로 일전매와 애플데일리의 5명 경영진을 체포한다. 그리고 3개의 관련회사의 1,800만홍콩달러(약 미화232만달러)의 자산을 동결시킨다. 그리하여 애플데일리는 즉시 곤경에 빠진다. 6월 24일, 홍콩 애플데일리는 마지막 신문을 발행한다. 그후 정간된다. 창간된지 26년된 애플데일리는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