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홍콩의 25년에 걸친 제도싸움은 결판이 났는가?

중은우시 2022. 6. 27. 17:11

글: 양위(楊威)

 

홍콩이 '회귀'된지 25년이 지났다. 지금 홍콩은 신속하게 중공홍색독재정권의 마조(魔爪)에 빠지고 말았다. 두 가지 제도는 과거 1/4세기동안의 힘겨루기에서 표면적으로는 승부가 난 듯하다. 그러나, 중공은 직접적으로 공산당의 사회주의제도가 홍콩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홍콩의 원래 자본주의제도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중공은 있는 힘을 다해서 잠시 홍콩인이 자유, 민주모델의 자체를 저지했지만, 중공의 통치모델은 홍콩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홍콩민주는 요절되고 대륙모델을 복제되기 어렵다

 

과거 25년간, 홍콩인은 자유, 민주에 대한 커다란 바램을 보여주고 있다. 계속하여 행정장관의 직접민주선거를 쟁취하여 홍콩의 진정한 자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중공의 행위는 정반대이다. 죽어라 이 모든 것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왔다.

 

중공은 당연히 자유민주, 고도자치의 홍콩을 용인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제도가 사회주의제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자유민주, 고도자치의 홍콩은 중공이 수십년동안 중국대륙을 통치하면서 해온 거짓말을 철저히 들통나게 하여, 중공정권은 신속히 합법성을 잃고, 자유, 민주의 붐이 전체 중국을 석권하여, 중공 권력귀족계층은 특권을 곧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홍콩의 자유, 민주정치를 저지하는 것은 중공의 수십년동안 홍콩문제처리에서 최우선임무였다.

 

1997년 홍콩 "회귀" 이전에, 중고은 홍콩입법회의 일부 의석을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고, 심지어 선전에 홍콩임시입법회를 조직했지만, 나중에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97년이후 홍콩의 민주일정은 파란을 겪는다. 행정장관직선은 시종 중공에 의해 저지되었고, 입법회의 일부의석의 직선도 한때 촛점이 되고, 또한 홍콩민주의 유일한 일말의 희망이었다. 다만 중공이 '홍콩판국가안보법"을 추진하면서, 진정하게 민의를 대표하는 후보자들은 언제든지 인신박해를 받는 대상이 되었고, 입법회선거는 명존실망(名存實亡)하게 된다.

 

곧 캐리람의 뒤를 이어 홍콩행정장관에 오를 리자차오(李家超)는 역대 행정장관중에서 가장 중공의 말을 직접 듣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홍콩 "회귀" 25년후, 홍콩인의 민주쟁취의 길은 기본적으로 중공에 의해 막혀버린다. 그러나 중공은 홍콩에서 직접 대륙의 통치모델을 시행하지도 못하고 있다.

 

중공이 홍콩에 파견한 중련판(中聯辦)은 지금까지도 감히 중공 홍콩당위의 간판을 내걸지 못하고 있다. 중공의 명을 받드는 홍콩행정장관과 홍콩정부의 고위관료들도 감히 자신의 지하당원신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중공은 중국대륙의 각성, 직할시, 자치구에서의 통치모델을 직접 홍콩에 복제하지 못해왔다. 중공의 홍두문건(紅頭文件)도 직접 홍콩정부에 하달되지 못한다. 중공의 공작조도 마음대로 홍콩을 순시하지 못한다. 중남해는 마음대로 홍콩정부 관리를 임면하지 못한다. 심지어 명목상으로도 직접 구체적인 지령을 하달하지 못하고 있다.

 

수백만 홍콩인들 앞에서 중공은 전혀 "제도자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중공지도자는 공산당건당100주년기념식때 "중국인민은 공산당을 선택했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도 감히 "홍콩인민이 공산당을 선택했다", "홍콩인민이 사회주의를 선택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홍콩경제는 여전히 자본주의제도에 따라 운용되고 있다.

 

중공은 잠시 홍콩의 민주정치를 막았다. 그러나 홍콩의 현존 경제제도를 바꿀 수는 없었다. 사유제를 위주로 하는 홍콩경제는 여전히 자본주의시장규칙에 따라 운용된다. 홍콩정부는 여러 경제실체의 경영에 대하여 강력하게 간섭할 수 없고, 이는 홍콩이 경제번영을 유지하는 근본원인이다.

 

영국은 홍콩에 상대적으로 건전하고 공정한 법률체계를 남겼다. 홍콩사회의 기본운영에 강력한 보장을 제공한 것이다. 지금 이 법률체계는 중공의 심각한 침식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홍콩인들과 경제실체는 홍콩을 떠나고 있다.

 

중공이 해석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사유제를 주체로 하는 자본주의는 반드시 공유제를 주체로 하는 사회주의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중국대륙의 개혁개방은 사영경제의 발전을 허용하고, 경제의 고속성장을 가져왔다. 다만 여전히 공유제를 주체로 한다고 말하고, 사회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중공은 잠시 홍콩의 여러 사유제경제실체를 공유제로 개조하지 않고 있다. 할 수 없이 홍콩경제의 자본주의시장경제운용을 허용하고 국제적인 기준과 맞추도록 놔두고 있다.

 

마르크스이론에 따르면, 경제기초는 상층구조를 결정한다. 다만 중공의 화란속에 홍콩의 사유제경제는 민주자치정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중공은 추가로 홍콩정부의 대륙화를 진행한다. 경제에 대한 간여도 갈수록 많아진다. 심지어 대륙과 마찬가지로 마구잡이로 지시, 간여할 수 있다. 홍콩의 자본주의경제운용이 앞으로 왜곡될 것으로 예견된다. 홍콩의 앞날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수백만 홍콩인은 중공을 가시방석에 앉아있게 만들었다.

 

25년전 홍콩"회귀"때, 홍콩인의 최대주체는 실제로 중공정권건립후 대륙에서 홍콩으로 도망쳐온 난민들이었다. 그들중의 일부분은 "회귀"를 전후하여 홍콩을 떠났다. 현금화할 수 있는 자금은 자연히 가지고 갔다. 두 제도의 우열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찌감치 답이 나온 것이다.

 

과거 25년간, 중공의 권력귀족가족의 이익과 관련되는 사람 혹은 바지사장들이 홍콩이민의 주체가 되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자유민주쟁취를 떠들 수는 없다. 다만 정말 선택할 수 있다면, 그들중의 대다수는 아마도 홍콩의 진정한 자치를 원하지, 홍콩의 대륙화는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이민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길거리에 나서서 "23조악법"에 반대하고, "우산운동", "반송중운동"에 참여하고, "홍콩판국가안보법"에 반대하는 수백만 홍콩인은 홍콩토박이들이고, 예전홍콩난민 혹은 그 후손들이다.

 

25년전, 그들은 홍콩"회귀"때의 심정이 복잡했을 것이다. 홍콩이 식민지통치를 벗어난다는 것은 당연히 진보이다. 다만 홍콩인들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중공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를 빼앗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1997년 6월 30일 밤, 큰 비가 뿌리는 가운데, 영국은 중공에 홍콩의 주권을 이양했고, 황급히 홍콩으로 들어오려던 중공군대는 비오는 밤에 차량이 전복된 사고를 언급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실제 홍콩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홍콩 "회귀" 25년후에 홍콩인들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역시 발생했다. 전체 서방세계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서 중공과의 합작을 통한 민주실험은 실패했다는 것을 목도했다. 중공은 홍콩에서 전세계를 향해 도발한 것이다.

 

홍콩은 지금까지 중공지도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였다. 표면적으로는 마음에 없지만 "일국양제"를 말하지만, 사적으로는 온갖 방법을 써서 홍콩의 민주, 자치를 방지하고 있다. 더더구나 자유의 공기가 대륙으로 만연되는 것은 막으려 한다. 홍콩인들이 매년 자발적으로 "6.4"를 기념하는 것은 중공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중공은 수백만 군대와 무경이 있다. 그리도 더 많은 경찰과 수하가 있으며, 방대한 선전기구도 있다. 그러나 수백만 홍콩인들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중공은 홍콩의 각파세력에 각각 주인이 있고, 암류용동(暗流湧動)하며, 계속하여 홍콩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수백만 홍콩인의 자유민주를 바라는 정신역량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은 중공의 거짓말과 폭력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에 굴복하지 않았다. 홍콩인의 항쟁은 중공으로 하여금 무한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하고싶은대로 할 수도 없었다. 홍콩인들은 이미 지워질 수 없는 역사를 쓴 것이다.

 

결론

 

홍콩"회귀"의 25년간, 두 제도의 힘겨루기를 모두 보았다. 홍콩인들의 자유민주를 쟁취하기 위한 항쟁이 중공의 폭력에 탄압받았다. 다만 중공은 이 제도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 중공은 지금까지도 "일국양제"와 "항인치항"이라는 말을 버리지 못했다. 등소평이 부득이 "일국양제"를 받아들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공은 시종 세계의 앞에서 스스로의 못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진핑이 홍콩에 가서 리자차오의 취임을 성원하더라도, 홍콩정부는 아마도 그를 위해 주석단을 만들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중공지도자는 홍콩에서 군림천하의 느낌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당총서기의 신분으로 홍콩인이 "공산당을 선택했다"고 감히 말하지도 못할 것이다. 더더구나 항의하는 모습이 나올까 겁내고 있다. 공산당101년을 맞이하여 이것은 얼마나 난감한 국면인가

 

중공은 홍콩의 자유민주운동을 탄압했지만, 자유민주의 정신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더더구나 홍콩인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중공이 홍콩역사를 바꾸려고 헛된 시도를 할 때, 역사에서 스스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홍콩은 또 다른 25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중공은 제도싸움에서 철저히 패배했다. 함락된 홍콩은 반드시 광복을 찾을 것이고, 세계를 향하여 다시 한번 동방지주의 찬란한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