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은 어떻게 넷째아들로 당국공(唐國公)을 승계하였을까?

by 중은우시 2021. 5. 1.

글: 최찬성공(璀璨星空)

 

수나라 대업14년(618년),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수양제 양광을 시해한다. 비록 이때의 수나라는 양광의 허튼 짓으로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지만, 양광이 피살되기 전에 천하의 군웅들은 여전히 수양제를 정통 천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반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스스로 나서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연 부자도 비록 일찌감치 할거할 생각을 가졌지만, 타격을 피하기 위해 수공제(隋恭帝)를 황제로 옹립하고, 일방적으로 양광을 태상황으로 선포한다.

 

수양제 양광의 피살로 천하의 군웅들은 정통황제가 이미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속속 자립한다. 이연은 수나라때 당국공이었으므로, 새 왕조를 건립할 때 국호를 당으로 정한다.

 

이연의 당국공이라는 작위는 승계한 것이다. 이연에게는 원래 3명의 형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여 넷째인 이연이 형들을 제치고 당국공의 작위를 승계한 것일까?

 

서위팔주국(西魏八柱國)

 

이 모든 것은 당국공의 기원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대의 주류역사서술에서는 북위 효문제의 개혁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이다. 다만, 고금중외 그 어떤 개혁도 조용히 진행된 적이 없고, 모두 진통과 동탕을 가져왔다. 효문제의 한화개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효문제가 사망한 후, 북위조정은 개혁후유증으로 여러번의 동탕을 겪는다. 통치자의 무능에 정권의 부패까지 더하여 북위조정은 이들 사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할 수 없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북위조정의 권위를 더욱 떨어뜨렸다. 이 모든 것은 북위 영태후(靈太后)가 권력을 장악한 기간동안 정점에 달한다.

 

영태후는 야심은 있으나 아주 무능한 여인이었다. 영태후는 후세의 무측천과 마찬가지로 여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기실 사람에게 이상이 있고 추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전제는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능한 영태후가 야심만 팽창하다니,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비극이다.

 

북위 효명제의 재위기간 영태후는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시기가 성숙했다고 여기고 효명제를 살해한다. 그러나, 영태후의 이런 행위는 병주군벌(幷州軍閥) 이주영(爾朱榮)의 반대에 부닥친다. 이주영은 '근왕구가(勤王救駕, 황제를 보위하고 구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낙양으로 보내어 영태후와 그녀가 옹립한 허수아비황제를 살해한다. 동시에 북위조정을 대거 숙청한다.

 

그후 북위는 무질서한 상태에 빠진다. 결국 동위와 서위 두 나라로 분열된다. 비록 두 개의 위나라는 모두 자신이 북위의 정통계승자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이 두 위나라의 황제는 모두 권신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허수아비들이었다. 그중 서위의 사실상의 최고통치자는 대군벌 우문태(宇文泰)였다.

 

당시의 중원은 '삼국정립'상태였다. 북방에는 서위와 동위가 있고, 남방에는 남량(南梁)이 있었다. 이 삼국 중에서 서위의 실력이 가장 약했다. 그래서 난세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강대한 무장역량이 필요했다. 소위 "사나이 한 명은 돕는 사람이 셋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문태 한 사람의 힘으로 서위의 무장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그리하여 이호(李虎, 이연의 할아버지)등 6명의 장수가 두각을 나타내어 서위조정의 중요한 군사적 대들보가 된다.

 

그러나, 서위의 국면이 안정되자, 우문태는 점점 이호등 6명의 장수에 대하여 거리끼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난세이므로, 서위조정은 여전히 "업성의 세력(동위)이 나를 망하게 하겠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국면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우문태는 이들 장수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문태는 절묘한 방안을 생각해 낸다. 우문태는 이호등 6명의 장수를 자신 및 서위황족을 대표하는 인물 1명과 같이 동시에 "주국(柱國)"에 책봉한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유명한 "서위팔주국"이 나타난다. 주국의 지위는 재상보다 높다. 그러나 지위는 높지만, 실권이 없다. 후세의 송나라 절도사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일종의 명예직이다. 서위의 주국은 우문태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이 이빨빠진 호랑이가 된다. 주국이 되었지만 실권을 잃었다.

 

당국공세가

 

서위의 우문태가 죽은 후, 우문가족은 서위괴뢰정권을 종결시키고 북주(北周)왕조를 건립한다. 북주를 열기 전에 이호는 이미 죽었다. 그러나, 북주조정은 이호가 살아 있을 때, 우문가족을 보좌한 공로가 현저한 점을 기려서 이호를 당국공에 추봉한다. 비록 이호가 살아 있을 때는 당국공의 예우를 받지 못했지만, 이호의 아들 이병(李昞)은 북주조정의 책봉으로 당국공의 작위를 승계하게 된다. 그래서 명목상으로 말하자면, 이호가 제1대 당국공이지만, 사실상은 이병이야말로 제1대 당국공이다.

 

이병에게는 적출의 아들이 모두 4명 있었다. 순서대로 말하자면 장남이 이징(李澄), 차남이 이담(李湛), 삼남이 이홍(李洪), 사남이 바로 이연(李淵)이다.

 

TV드라마 <독고천하>에서는 이연의 생모인 독고씨가 이연에게 적자의 신분을 주기 위하여, 계책을 세워 이병의 적장자인 이징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왔다. 진실한 역사에서 이징은 병으로 죽었다. 이징 외에 이병의 차남과 삼남도 모두 일찌감치 죽었다. <구당서>의 기술에 따르면, 이징이 죽었을 때,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남북조때 사람들은 조혼하는 것이 보편적인 풍습이었으므로, 이징은 분명 어려서 죽었을 것이다.

 

당연히 세 명의 형이 차례로 죽은 것에 대하여 이연은 그다지 기억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병이 살아 있을 때 이연의 세 형은 차례로 죽었고, 이병이 죽었을 때, 이연은 겨우 7살짜리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7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세명의 형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남아있기 힘들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병이 죽은 후, 북주조정은 북주의 법도에 따라, 이연으로 하여금 당국공의 작위를 계승하게 한다. 이때 이연의 세 형중 한 명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이연은 작위를 승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친과 형들이 차례로 죽은 것으로 인하여 이연에게는 힘든 어린 시절을 겪게 한 동시에 그는 당국공이라는 작위를 그저 주운 셈이 되었다. 여러해 이후 대당의 황제가 된 이연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행운으로 여겼을까, 불행으로 여겼을까. 아니면 여러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생겨났을까?

 

이연이 당국공의 작위를 계승하기를 전후하여, 북주조정은 동탕의 길로 들어선다. 동탕과정에서, 많은 북주의 귀족은 정치투쟁에 말려들어 결국은 멸문당하기도 하고, 역사로 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국공은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북주의 잔혹한 정치투쟁을 피해갈 수 있었다. 여러해 이후, 이연이 대당을 여는데 고귀한 바탕이 된다.

 

어쨌든 운명은 이렇게 기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