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적도구1986(風的渡口1986)
당헌종은 어떻게 죽었는가? 겉으로 보면,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의외사건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정교하게 기획된 모살이다. 더더욱 당시 각종 갈등이 집중적으로 폭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사한 원인으로 당헌종은 강력한 황제로서 돌연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는데, 흉수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잘 먹고 잘 살았다.
당헌종의 죽인 이는 진홍지(陳弘志)라는 태감이다. 그는 당헌종이 죽은지 15년이 지난 후, 비로소 당헌종의 손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그의 죄행을 공개되지 않는다.
나머지 공모한 자들이 책임추궁을 당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핵심은 그때도 그들의 죄행은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헌종이 시해를 당했는데, 흉수는 삼대를 지나도록 여전히 잘 살고 있었다. 당문종(唐文宗)은 진홍지의 죄행을 낯낯이 밝히면서 법에 의해 처형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는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쉬우나 뒤처리를 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신변의 태감이 황제를 죽이는 것은 그 결과를 생각지 않는다면 그다지 난이도가 큰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황제를 죽인 이후에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법의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실로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진홍지 등은 이를 실현했다. 왜냐하면 당시 당헌종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첫째, 환관집단의 내부에는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환관 한명이 황제를 감히 죽였을 때, 그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환관들이 황제를 위해 복수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그를 공격했을 것이다.
나중에 유극명(劉克明)이 당경종(唐敬宗)을 죽인다. 다만 환관들 내부에서 컨센서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다른 환관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황제를 죽이다니 정말 살고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황제가 기분이 좋아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대전이 불이 갑자기 꺼지며, 유극명등이 황제를 살해하기로 공모였고, 즉시 실내에서 황제를 죽인다. 당시 나이 18살이었다.....보력2년 십이월, 당경종이 붕어했다. 유극명 등은 조서를 위조하여 강왕(絳王) 오구(悟句)로 하여금 국사를 맡게 한다. 임인년, 내추밀사 왕수징(王守澄), 양승화(楊承和), 신책호군중위 위종간(魏從簡), 양수겸(梁守謙)은 강왕(江王)을 밭들어 황제로 옹립한다. 신책육군, 비룡병을 이끌고 유극명을 주살하고, 강왕(絳王)을 죽인다."
둘째, 조정집단은 이러한 사건에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번진(藩鎭)의 거두들은 이에 동의하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번진의 거두들은 황제를 위해 복수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조정신하들의 호응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환관집단이 아무리 대단해도, 아마 놀라서 바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사량(仇士良)이 나중에 하늘에 오를 정도로 대단해 졌지만, 역시 놀라서 스스로 병을 핑계로 물러나겠다고 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구)사량등이 교만방자하여, 조정신하들은 매일 집안이 망할까봐 걱정하며 지냈다. 간언이 올라오자, (구)사량등은 이를 겁냈다. 그래서 정담(鄭覃), 이석조(李石粗)가 정무를 맡을 수 있었고, 천자는 그들에 의지하여 스스로 강해졌다...황상은 비록 겉으로는 구사량을 존중하고 총애했지만, 속으로는 그를 꺼리고 미워했다. 구사량도 이를 느꼈다. 그리하여 늙고 병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물러나겠다고 한다. 황상은 조서를 내려 그를 좌위상장군 겸 내시감, 지성사로 삼는다."
당헌종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은 주로 3가지 역량이 몰아부쳤기 때문이다.
첫번째 역량, 또한 가장 강대한 역량인데, 자연히 반전(反戰)의 역량이다.
역사서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구든지 당헌종처럼 웅재대략의 황제를 좋아한다. 그러나 현실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당제국의 번진문제에 대하여 필자는 이 시기의 역사를 볼 때마다, 자연히 황제가 댓가를 고려하지 않고 해결했기를 바라는 편이다. 설사 수백만명이 죽더라도, 설사 천하가 동란에 빠지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한다고 본다.
문제는 정말 그 시대에 살았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그저 황제가 군사지역자치를 인정해버렸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중앙정부의 선전에서 번진의 군인과 백성들은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했지만, 번진의 인민의 생활이 정말 그러했을까? 답은 당연히 부정적이다.
번진의 선전에 따르면, 중앙정부가 손을 번진에까지 뻗으려 했고, 사악한 태감을 대량으로 낙하산으로 내려보냈으며, 각종 탐관오리들도 무더기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사실상 중앙정부가 번진에게 손을 뻗친 후, 자주 태감, 문관(탐관오리)들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배척받고, 현지의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번진을 없애기 위해, 몇년이나 전투를 벌이고도 제거할 수 없었다; 왜 모두 협상테이블에 앉아서 담판의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없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 대당제국을 인정하고, 모두 대당제국의 통일을 승인한다면, 협상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번진할거는 물론 좋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번진활거가 제국의 변방안전에 영향을 주었는가이다. 그렇지 않았다. 사실상, 하북번진이 강대해서, 거란인은 대당을 위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고대상(高大上)의 기치를 내걸고서 번진을 없애는 전쟁을 끝까지 진행했는데, 그건 또 무엇때문인가?
설사 대당의 곳곳에 무덤이 생기더라도, 하삭삼진은 없애버리겠다고 소리높여 외친다. 입을 바지가 없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가 하삭을 공격하여 없애버리는 것을 지지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소리가 아닌가.
결국 모두 대당제국의 신하이다. 모두 대당제국을 인정한다. 왜 서로 협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가.
필자가 이렇게 글을 쓰면 누군가 분명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관념으로 고대역사를 보는 것이라고. 문제는 유사한 목소리가, 당시에 주류사상에 억눌려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하여 제국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사실상, 당헌종이 죽은 후, 대당의 정책은 우경화한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제국의 부담이 너무 심했고, 그래서 보편적으로 반전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처음에 위로는 동궁부터 천하가 당헌종의 전쟁으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즉위하자마자 장병들을 휴식하게 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당헌종이 돌연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명이나 그가 억울하다고 말할 것인가.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웅재대략의 황제가 죽으면, 사람들은 아마도 편안해 졌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당헌종이 사방을 정벌하면서,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황상이 즉위한 후, 좌우와 숙위 여러 군대에 무절제하게 하사품을 내렸다. 유주, 진에서 전투를 오래 하면서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다. 국고는 고갈되었고, 지급할 돈이 없었다."
두번째 역량은 혼군(昏君)에 반대하는 역량이다.
당헌종이 혼군인가? 이건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큰 그림에서 보자면 그는 혼군이다.
왜냐하면 환관을 중용했다. 당헌종만큼 환관을 중용한다면 혼군이 아닐 수 없지 않을까? 하나, 그는 한때 환관은 군대총사령관으로 삼으려 했다. 둘, 그는 환관에게 살해당했지만 핵심은 환관의 죄책을 추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황제가 환관을 당헌종처럼 중용한 경우는 역사책을 뒤져봐도 그 하나 뿐이다.
관건은 당헌종에게 또 하나의 애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장생불로를 추구하는 것이다.
장생불로를 추구하는 면에서, 당헌종은 공전절후이다. 술사들에게 속아서, 당헌종은 한때, 술사들이 장생불로약을 찾을 수 있게 술사를 한 주(州)의 자사(刺史)로 임명하기도 했다. 당헌종의 이런 행동에 사람들은 그저 놀라서 멍해질 뿐이었다.
역사서를 뒤져보면, 장생불로를 추구한 황제는 모두 역사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사람은 죽은 것을 겁내고, 장생불로를 꿈꾸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이 모두 장생불로약을 찾았고, 당태종도 이로 인하여 죽는다. 그러나 역사서를 뒤져보더라도, 장생불로약을 찾는 황제가, 술사들이 장생불로약을 찾기 편하게 하기 위해 지방의 고위행정관리로 앉힌 경우가 있었던가?
당헌종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군왕에게 장생불로의 기회가 생긴다면, 하나의 주를 희생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신하, 백성으로서 어찌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유필(柳泌)이 황상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천태산에 신선이 모여 있고, 영초가 많습니다. 신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청컨대 관리로 임명해주시면,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상은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유필을 태주자사(台州刺史)에 임명하고, 금자(金紫)색의 관복을 하사한다. 간관이 급히 상소를 올렸다: '군주가 방사를 좋아하더라도, 지금까지 백성들을 다스리는 직위에 앉힌 적은 없습니다.' 황상이 대답한다; '일개 주의 힘으로 군주가 장생불사하게 한다면, 신하로서 좋아해야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이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유사한 원인으로, 당헌종이 죽은 후, 조정에서 공개한 사인은 바로 당헌종이 장생불로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내상시(內常侍) 진홍지가 시역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일당을 꺼려서 감히 토벌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약때문이라고 하였다. 외부인들은 그래서 알지 못했다."
세번째 역량은 후계자다툼을 둘러싼 역량이다.
당헌종 시대에 비교적 난감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현종의 본부인은 곽자의(郭子儀)의 손녀인데, 곽씨세력이 너무 커서, 당헌종은 그녀를 황후에 앉히지 않았다. 당연히, 당헌종은 다른 여자를 황후로 삼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곽자의의 손녀는 귀비(貴妃)의 신분으로 후궁의 우두머리가 된다.
유사한 원인으로, 곽씨집안의 외손이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황위계승자가 되어야 하지만, 곽씨 외손의 계승권은 계속 안정되지 못했다. 당헌종은 수시로 다른 아들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당헌종의 가장 가까운 심복인 환관은 더더욱 분명하게 이 다른 아들이 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토돌승최(吐突承璀)는 은총은 특별히 많이 받았다. 혜소태자가 죽고, 후계자 논의를 할 때, 토돌승최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풍왕(灃王)을 지지하여,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했다. 당헌종이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게 한다."
사실상 당헌종이 모살된 후, 흉수는 당헌종이 총애하던 그 아들 및 그를 지지한 태감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중위 양수겸과 여려 환관인 마진담(馬進潭), 위원소(韋元素), 왕수징등은 함께 태자를 옹립하고, 토돌승최와 풍왕 운(惲)을 죽인다."
그렇다면, 당헌종을 모살한 막후주모자가 곽귀비와 곽씨외손일까? 그건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문제는 당헌종이 죽은 후, 곽귀비는 태후가 되고, 곽씨외손은 황제가 된다. 다만 당헌종 모살에 가담한 흉수는 계속 잘 살았다는 것이다. 갈수록 잘나갔다.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목격한 사실이다.
관건은, 황제도 좋고, 태후도 좋다. 어떤 태감을 제거하려면 그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빌릴 수 있는 역량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문종이 왕수징을 없애려고 하였을 때, 구사량을 발탁하여, 직접 왕수징을 없앴다. 나중에 구사량은 잘 나갔지만, 당무종이 압박을 가하자, 할 수 없이 스스로 사직을 청해야 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당헌종의 죽음과 곽귀비가 관계가 없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최소한, 흉수가 당헌종을 모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곽귀비, 곽씨외손이 뒷처리를 잘 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동호(董狐)가 조순(趙盾)이 진령공을 모살하였다고 말할 때 한 말과 같다. 네가 말해봐라. 진령공을 모살하지 않았다고? 그럼 네가 진령공을 살해한 흉수를 잡아서 죽여라. 지금 네가 대권을 장악했는데, 진령공을 살해한 흉수는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이전보다 더 잘 살고 있지 않은가? 네가 막후 주모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누가 믿을 것인가?
그리고, 이런 모순의 배후에는 불교문제도 있었다.
여러 해동안의 삭번전쟁으로 대당제국의 기반은 거의 무너졌다. 그래서 당헌종은 종교세력을 이용하여 재물을 긁어모으려 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돌연 누군가 상소를 올린다: 한 절에 부처사리가 하나 있는데 30년에 탑에서 한번씩 꺼낸다. 일단 나오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그래서 황제께서 그것을 장안성으로 맞이하여 며칠간 공봉(供奉)해달라.
"공덕사(功德使)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봉상(鳳翔)의 법문사(法門寺)에는 부처손가락사리가 있다. 전해지기로 삼십년에 한번 연다. 열먼 세상이 풍성하고 사람이 평안해진다. 내년에 여는 해이다. 이를 맞이하십시오.' 십이월, 경술삭, 황상은 중사(中使)와 승려를 보내 이를 맞이했다."
그리하여, 당헌종은 이 부처손가락사리를 장안성으로 모셔온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보려고 모였다. 그리고 앞다투어 돈을 내어 보시했다. 어떤 사람은 집안 재산을 모두 바치기도 했다.
"중사는 부처사리를 맞이하여 경사로 온다. 황상은 궁중에 삼일간 두고, 여러 절로 보냈다. 왕공대신과 백성들은 이를 보려고 와서 보시를 했다. 부족할까봐 겁을 냈고, 어떤 사람은 집안 재산을 모두 내놓았다. 그리고 팔에 향불을 붙여 공양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는 대량의 돈을 모은다.
종교세력이 크게 일어난 후, 통치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제1종 방법. 엄격하게 탄압하는 것이다. 종교조직은 대량의 재력, 물력, 인력을 차지한다. 그리하여 중앙정부의 세수를 감소시키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제2종 방법. 종교세력과 협력하여 이익을 공유한다.
어느 방법이 정확한다. 그건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당헌종은 불교를 존중하였고, 그의 손자인 당무종은 극력 불교를 탄압했다.
당무종이 불교를 얼마나 심하게 탄압하였을까? 우리는 단지 한 가지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역사상 불교탄압을 심하게 한 황제는 4명이다. 즉 전설상의 삼무일종(三武一宗)이다. 당무종은 그 중 한 명이다.
불교를 반대하는 역량은 아주 강했다. 그래서 당헌종이 불교를 존중하는 방식은 확실히 여러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온다.
이런 배경하에서, 한유(韓愈)는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황상은 역사서를 많이 읽은 분입니다. 역사상 불교를 신봉한 황제를 보십시오, 누구 하나 좋은 결말을 맺은 경우가 없습니다. 양무제는 일심으로 불교를 믿었지만, 결국 굶어죽었습니다. 결국 이런 봉건미신은 남을 해치고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 부처를 믿지않으면 반드시 인과응보가 따른다고 하는데, 저는 부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응보를 받는지 보고 싶습니다!"
당헌종은 그가 이렇게 말하자 불같이 화를 낸다. 이게 황제에게 말하는 태도인가. 불교를 믿으면 좋은 결과가 없다고. 네가 부처를 믿지 않으니 어떤 응보를 받는지 보고 싶다고. 내가 지금 부처를 대신하여 너에게 보응을 내리겠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말리는 바람에 당헌종은 화를 삭이고, 한유를 조주(潮州)로 유배보내는 선에서 끝낸다.
그러나, 진정한 핵심은 부처사리를 맞이하는 일은 819년 정월이다; 당헌종이 언제 비명에 죽었는가? 바로 820년 정월이다.
나중에 당의종(唐懿宗)도 다시 부처사리를 맞이하려 한다. 누군가 이 일을 꺼내서 말한다. 결국 당헌종이 부처를 믿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보라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당의종이 부처사리를 맞이하려는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당의종이 말한다. 내가 직접 부처사리를 보겠다. 그러고 죽더라도 나는 받아들이겠다.
"봄, 삼월, 계사일, 황상이 칙사를 보내 법문사에서 부처사리를 맞이하게 한다.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당헌종이 부처사리를 맞이하려는 것은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말까지 한다. 황상은 말한다: '짐이 살아서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당연히, 그 후에 극적인 일이 발생한다. 당헌종은 부처사리를 맞이하려다가 1년후에 비명에 죽었는데, 당의종은 더욱 참혹했다. 그는 부처사리를 맞이하려고 했는데, 겨우 두달 후에 돌연 병사한다.
황제가 부처사리를 맞이하려 할 때마다 신하들은 황제를 말린다. 그때 이런저런 말을 하지만, 결국은 이런 뜻이다. 네가 계속 그러다가는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비록 말은 완곡하게 하지만 그 뜻은 결국 이런 것이다.
유사한 원인으로, 당헌종은 말리는 자를 죽이려고까지 하였고, 당의종은 내가 부처사리를 살아서 본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쌍방이 이 정도로 싸운다는 것을 보면, 내부에 숨어 있는 이익다툼이 얼마나 격렬했을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순에 앞에서 언급한 3가지 모순이 더해졌다. 당헌종의 끝이 좋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 놓인 당헌종이 모살당한 것이 우연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당헌종이 죽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얘기할 때, 필자는 이런 말을 한다. 생각해봐라. 자신의 생명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황제가 살아있다고 해봐야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가 이전에 아무리 대단했더라도, 그것은 예전의 일이다. 이후에도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당현종이 예전에 그렇게 대단했지만, 나중에 그는 재삼 패배하여 결국은 치매증에 걸린 것같이 되지 않았던가.
전통적인 역사의 각도로 역사를 보면, 모두 거고임하(居高臨下)로 역사를 논한다. 그래서 통상 황제의 잘못, 실수를 찾는다. 객관적인 원인을 분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분석하는 것은 실제로 의미가 없다. 당사자가 무슨 문제에 닥쳤을 때, 그는 여전히 어찌해야할지 모르게 된다. 각종 큰 이치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관리가 되어야 하는지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이치에 맞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문제에 부닥치면, 여전히 어떻게 해아할지 모른다고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큰 이치는 너의 눈앞에 닥친 곤란을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너의 앞에 닥친 압력과 무력감은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네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어떻게 된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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