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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인종(宋仁宗) 조정(趙楨): 천고제일인군(千古第一仁君)

by 중은우시 2021. 4. 17.

글: 진동만(陳東晩)

 

서언

 

중화역사 상하 5천년동안 감히 '인군(仁君)' '명군(明君)'이라 칭할 수 있는 황제는 몇 되지 않는다. 진시황은 육국을 통일하였으나 '폭군'으로 불린다. 한고조 유방은 대한의 기업을 건립하였으나 시종 '비조진양궁장(飛鳥盡良弓藏)'으로 공신들을 참살한 오점이 있다. 대당성세 '정관지치'를 실현한 당태종도 안타깝게도 현무문사변의 악과를 벗어날 수 없고, 송태조 조광윤의 '진교병변' '황포가신' '배주석병권'은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했고, 앙문억무(仰文抑武)로 대송을 약국으로 만들었다. 진정 명군, 인군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송나라의 제4대황제 송인종 조정이다.

 

비극적인 출생

 

중국의 희곡중에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라는 것이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송인종 조정이다. '이묘환태자'의 이야기는 현재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송인종 조정의 기이한 경력은 정말 가슴아프다. 송진종(宋眞宗)때 유비(劉妃), 이비(李妃)는 송진종 말년에 동시에 회임한다. 황후의 자리를 다투기 위해 유비는 계책을 써서 이씨가 낳은 아들을 껍질을 벗긴 이묘(삵쾡이)로 바꿔치기해서, 이비가 요얼(妖孽)을 낳았다고 오명을 뒤집어 씌운다.

 

송진종은 대노하여 이비를 냉궁에 쳐넣고, 유비를 황후로 삼는다. 나중에 하늘이 노했는지 유비가 낳은 아들은 요절해 버리고, 이비가 낳은 아들은 파란곡절을 겪은 후 태자가 되고, 황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송인종 조정이다. 마지막에 포증(포청천)의 도움으로, 송인종은 진상을 알아낸 다음 두 눈을 실명한 자신의 생모를 만난다. 이미 황태후의 자리에 앉아 있던 유씨는 처벌을 겁내 목을 매 자살한다. 이긋은 희극의 결과이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지 않았다.

 

마지막에 송인종 조정은 포증에 의해 '불효지죄'로 판결받고, 용포를 벗어 때린다. 그렇게 하여 이태후의 노기를 가라앉히고 비로소 자신의 생모를 황궁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이는 또 다른 희곡 '타용포(打龍袍)'의 출처이다. 한번도 자신의 생모를 보지도 못하고, 한번도 모친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를 보면 송진종 조정의 출생은 얼마나 비극인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송사에서 송인종 조정의 신세내력에 관한 기재는 희곡에서처럼 그렇게 신기하지는 않다. 다만 출생의 상황과 처지는 비슷하다. 송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송인종의 생모 이씨는 원래 유황후가 비로 있을 때의 시녀였다. 장중하고 말이 없어서 나중에 송진종의 눈에 들었고, 후궁비빈중 한명이 된다. 이비이전에 송진종의 후비들은 5명의 사내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다. 이때 송진종은 걱정으로 초조했고, 황위를 승계할 아들이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씨가 임신했을 때, 송진종을 따라 바깥나들이를 갔을 떄, 부주의하여 옥채(玉釵, 옥비녀)를 떨어뜨린다. 송진종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옥비녀가 만일 깨지지 않고 완전하다면 분명 아들을 낳을 것이다. 옥비녀를 주워보니 과연 전혀 손상이 없었다. 이 전설은 한편으로 송진종이 아들을 갈구하는 절박한 심리상태를 드러낸 것이며, 또한 송진종이 신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낳기를 바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다 믿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씨가 나중에 확실히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송진종은 중년에 아들을 얻었으니, 그 기쁨은 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송인종 조정이 눈을 떠서 자신의 모친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부황 손진종의 묵인하에, 자식이 없는 유비에게 거두어져서 길러진다. 유황후와 양숙비(楊淑妃)가 함께 길렀다. 생모 이씨는 유황후의 권세에 눌려서 그저 자신의 아들을 빼앗아 가는 것은 두눈 멀거니 뜨고 바라만 보아야 했다. 그리고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도 못한다. 만일 그랬다가는 자신에게 어떤 위해가 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친아들에게도 재난이 닥칠 수 있었따. 결국 송인종의 생모인 이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죽고 만다. 그 연유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묘환태자라는 이야기와 의심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유태후가 죽고나서야 송인종 조정은 성년이 되어 친정을 한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생모의 사적을 알았고, 자신이 유태후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일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는가.

 

등극했지만 권한이 없고, 유아(劉娥)에 관대했다.

 

건흥원년 송진종 조항이 병사한다. 나이 겨우 13살의 조정이 황위를 승계받는다. 역사에서 송인종이라 부른다. 송인종의 나이가 너무 어려, 태후인 유아가 수렴청정한다. 송인종은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황제였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은 유태후의 동의를 받아야 집행할 수 있었다.

 

송인종이 점점 성장하였지만, 태후 유아는 권한을 내놓으려 하지 않고, 계속하여 수렴청정했으며, 송인종을 대신하여 국가대사를 처리했다. 이는 포부가 컸던 송인종을 매우 고뇌하게 만들었다. 명도2년 태후 유아가 병사하고, 1033년 송인종이 친정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의 '인종치세'가 펼쳐지게 된다.

 

태후 유아가 사망한 후 비로소 여러 신하들은 송인종 생모의 일을 아뢴다. 막 친정에 들어간 송인종은 '희비가 교차했다' 기쁜 것은 마침내 친정을 하여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슬픈 것은 한번도 자신의 생모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태후 유아는 그저 양모였을 뿐이다.

 

대신의 상소에 따르면, 태후 유아는 자신의 생모를 죽인 흉수라는 것이다. 원래 송인종 조정은 '보복'을 할 수도 있었다. 유아의 태후 지위를 없애고, 자신의 생모를 태후로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고제일인군인 그의 조치는 우리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방식은 태후 유아의 황후, 태후지위를 그대로 두고, 자신의 모친과 함께 송나라의 종묘에 넣는 것이었다. 송인종의 '인'은 이런 점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그는 '인'으로 유아를 관대하게 용서한다.

 

천고제일인군

 

송인종의 인자함은 대송왕조와 그후세의 왕조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를 '천고제일인군'이라고 부른다. 이 아름다운 명칭은 명실상부하다고 할 수 있다. 대송왕조의 제4대황제로서 지고무상의 지위를 가진 그는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그러나 송인종은 그 권한을 남용하지 않았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송인종이 매년 추결(秋决)을 집행할 때면 심리한 것을 다시 심리하고, 조사한 것을 다시 조사했다. 그는 자신의 소홀함으로 억울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송인종은 황제로서 지고무상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천지와 자연에 대하여 경외지심이 충만했다: 사료에 따르면, 송인종이 배가 고파 양고기구이를 먹고 싶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항상 궁중의 일을 따라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가 저녁에 양고기구이를 먹으면, 백성들이 매일 양을 잡아 먹을 것이라 생각하여 꾹 참는다.

 

다음 날 곁에 있던 시종이 왜 사람을 시켜 가져오라고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송인종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일시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게 되면, 많은 살륙을 불러올 수 있고,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어기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천지와 자연에 경외지심을 가졌다. 이런 황제는 너무나 적다. 송인종은 인자함이 골수에까지 미쳤다. 그는 짐승에게까지도 인자함을 베풀었다. 이는 대송 백성들의 홍복이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한번은 송인종이 어화원을 산보하다가 목이 말랐다. 그런데 따르는 시종이 부주의하여 물을 가져오지 않았다. 보통의 황제라면 분명 크게 화를 냈을 터이다. 분노하여 죽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송인종의 방식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송인종은 시종을 질책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시종에게 가서 물을 가져오라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어화원에서 궁전은 거리가 멀어서, 시종이 다녀오느라 고생할 것이라 여겼기 떄문이다. 그래서 갈증을 참고 궁전으로 돌아와서 비로소 물을 마신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황제가, 모든 일에서 자신의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고, 먼저 다른 사람의 마음과 결과를 신경쓰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송인종의 인자함은 동물이나 시종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다. 대송왕조의 대신과 문인들에게는 더더욱 관용을 베푼다. 나라의 인사와 국가대사를 결정할 때, 송인종은 항상 조정의 공의를 거쳐 결정했다. 절대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송인종은 자신이 총애하는 장미인의 백부 장요좌(張堯佐)를 선미사(宣微使)로 임명하고자 했다. 먼저 재상들과 상의한 후, 조정의 공의에 붙인다. 그런데 가장 먼저 어사 포증(포청천)이 반대하고 나선다.

 

포증은 '철면무사(鐵面無私)' '강정불아(剛正不阿)'의 인물이다 누구에게든지 할말은 다했다. 송인종에 대하여도 포증은 전혀 자신의 원칙을 양보하지 않았고, 자신의 어사로서의 권리를 행사했다. 포증은 송인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파격적인 발탁입니다. 장요좌의 명성이나 공로는 전혀 그런 직위에 걸맞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조카딸이 미인의 귀한 자리에 있다는 공적 뿐입니다. 국가에는 아무런 공헌이 없습니다. 포증이 이 말을 할 때 비분강개하여 격앙되어 있었고, 말할 때는 침을 튀겨 침이 송인종의 얼굴에까지 튀었다고 한다. 그러나, 송인종은 그저 소매로 얼굴을 가려 포증의 침이 튀는 것을 막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결국 그 인사를 포기한다.

 

군권지상의 봉건왕조에서 이는 황제에 대한 대불경이다. 황제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는 행동이다. 다른 황제였더라면, 포증은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목위의 머리가 날아갈 뿐아니라, 멸족의 결과까지 올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송인종은 인자하게 참는다. 그렇게 하여 대송왕조의 명신을 배출하게 된다. 패도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억누르지 않고, 권력로 사람을 압박하지 않고, 권세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다. 이는 '구오지존'인 황제로서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중성봉월(衆星捧月), 군신동치(君臣同治)

 

송인종은 인정을 베푼 좋은 황제이다. 더더구나 '인재'를 아낀 좋은 지도자이다. 인재를 좋아하는 것은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과 같았다. 먼저 그는 국가를 잘 다스리려면, '군신동치'해야 하고, 반드시 좋은 인재를 가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의 안목은 독보적이었다. 송인종은 과거를 중시하여 대송왕조를 전성기로 끌어올린다. 대송왕조의 '앙문억무'의 방력과 역사는 더더욱 문인의 천하를 만든다. 송인종때 '중성봉월, 군신동치'의 문인천하를 이루고, 송인종의 '인종성치(仁宗盛治)'로 천하가 태평하여 성세를 이루게 된다.

 

당송팔대가중 6명이 송인종때 나타난다. 대문호 소식, 소순, 소철, 삼부자는 모두 송인종의 발탁으로 명성을 떨친다. 왕안석, 사마광, 구양수, 증공, 송제, 이들 문단의 거성들도 송인종의 총애를 받아 문단의 패업을 이룬다. 부필, 한기, 문언박, 범순인, 이들 명신들도 그의 손에 의해 발탁된다. "위천지입심(爲天地立心), 위생민입명(爲生民立命), 위왕성계절학(爲往聖繼絶學), 위만세개태평(爲萬世開太平)"의 장재(張載)도 송인종이 직접 골라 중용한 명신이다.

 

심괄, 소송, 채양, 문동등은 송인종이 과거를 통해 발탁하여 중용한 인재들이고, 명신 포증(포청천)도 송인종이 고른 인재이다. 송인종은 더더욱 포청천의 청렴함을 이루게 해주었고, 그를 성세의 명신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그가 권력을 겁내지 않고 강정불아, 철면무사한 기개를 이룰 수 있게 해주었다.

 

안수, 범중엄등 명신도 송인종때 성장하여 대송왕조를 이끌었다. 종세형의 종가군, 요나라가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 했던 적청도 모두 송인종이 발탁 중용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송왕조의 강산을 지켰다.

 

그래서 송인종때 비로소 진정한 '군신동치'가 이루어졌다. 나머지 왕조에서는 그저 구호에 불과했다. 진정한 '군신동치'를 이루려면 군주에게 얼마나 큰 흉금과 기백이 있어야 할 것인가. 후세황제들 중에서 그 누구도 이를 해내지 못한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

 

송인종은 운이 좋았다. 그의 대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군신동치로 인종성치의 태평성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송인종은 불운했다. 그가 불행한 점은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뜻을 이어받을 자식이 없었다. 중년에 이른 조정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복왕(濮王) 조윤양(趙允讓)의 열셋째아들 조종실(趙宗實, 나중에 이름을 趙曙로 개명하니 즉 송영종이다)을 황궁으로 데려와 조황후(曹皇后)에게 기르게 하고 태자로 확정한다. 다만 보원2년 묘비(苗妃)가 아들 조흔(趙昕)을 낳은 후 송인종 조정은 다시 조종실을 궁에서 내보낸다.

 

그러나, 얼마 후 묘비가 낳은 황자 조흔이 요절한다. 송인종은 삼일간 통곡했고, 그 뒤에 후비가 낳은 황자도 모조리 요절한다. 송인종 조정은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고, 게다가 연이어 아들 셋을 잃는다(조흔, 양왕 조방, 형왕 조희). 조정내외에서도 후사 문제로 걱정이 컸다. 재상 한기와 대신 포증, 범진, 사마광등이 계속 권하여, 송인종 조정은 가우7년 팔월 조종실을 정식으로 황태자에 봉한다. 이름을 서로 고친다. 당초 송인종이 이런 결정을 할 때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유감스럽게 세상을 떠나다

 

가우8년 이월, 송인종 조정은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한다. 삼월 이십구일, 종인종 조정은 변경의 복녕전에서 붕어한다. 향년 54세이다. 시호는 신문성무명효황제이고 묘호는 인종이다. 십월, 영소릉에 묻힌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송인종 조정이 붕어했다는 부고를 요나라조정에 알리자. 연경의 사람들은 원근을 가리지 않고 모두 통곡했다고 한다. 요도종 야율홍기도 송나라사신의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며 말했다: "사십이년동안 병혁(兵革)을 몰랐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를 위해 의관총을 만들어 애도하겠다." 그후 요나라의 역대군주는 모두 '송인종의 어진을 조상처럼 모셨다'

 

사망하고 나서 타국의 군주가 이렇게 애통해하게 만들다니, 아마도 역사상 송인종이 유일할 것이다. 이를 보면 송인종의 인자함은 산과 강을 건너 다른 나라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일 것이다.

 

결론

 

재위42년, 양송시기를 통틀어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인 송인종은 태평성대를 열었고, "여민수양(與民修養)", "여국수양(與國修養)"으로 역사를 이룬다. 그는 대송조의 강산을 이루고, 일대명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완성시켜주지 않았다. 10년만 더 재위했더라면, 그에게 자신의 아들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얻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북송말년의 '정강지치'의 비극도 발생하지 않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