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덕항(王德恒)
송휘종의 장녀로서 그녀도 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일생은 너무나 비참했다.
북송원부3년(1100) 정월, 송철종 조후(趙煦)가 붕어한다.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 향태후(向太后)의 극력지지로 당시의 단왕(端王), 사공(司空), 소덕창덕군절도사(昭德彰德軍節度使)이었던 송휘종이 즉위한다.
송휘종이 등극한 후, 향태후가 군국대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던 궁녀인 정씨(鄭氏)를 송휘종에게 보낸다.
정씨는 송휘종이 즉위하기 전에도 자주 향태후의 명을 받아 그를 모신 바 있다. 지금은 정식으로 송휘종의 완의(婉儀)가 되었다. 그 해애 딸 조옥반을 낳는다. 그녀는 송휘종의 장녀이다.
북송 건중정국원년(1101) 정월, 향태후가 사망한다. 송휘종이 친정을 시작한다. 조옥반은 덕경공주(德慶公主)로 봉해진다. 당시 나이 1살이다.
북송 숭녕원년(1102) 십일월, 완의 정씨는 현비(賢妃)에 봉해진다. 1년후에는 숙비(淑妃)로 승진하고, 다시 1년후에는 귀비(貴妃)로 승진한다. 지위는 송휘종의 본부인인 현공황후(顯恭皇后) 왕씨(王氏) 바로 다음갔다.
모친 정귀비의 지위가 오름에 따라, 덕경공주 조옥반도 다시 가복공주(嘉福公主)에 봉해진다.
북송 대관2년(1108) 구월, 왕황후가 사망한다. 2년후, 정귀비가 황후에 봉해진다.
북송 정화원년(1113) 윤사월, 송휘종은 공주라는 명칭을 제희(帝姬)로 바꾼다. 그리하여 가복공주 조옥반의 봉호는 가복제희가 된다.
나중에, 가복제희 조옥반은 다시 가덕제희(嘉德帝姬)로 고쳐 봉한다. 그리고 송휘종의 지시에 따라 좌위장군(左衛將軍) 증인(曾夤)에게 시집간다.
증인은 가덕제희 조옥반의 첫번째 남편이다. 송나라의 공주는 왕공대신과 통혼하는 전통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관료자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아무런 그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렇기는 해도 증인은 가장 행운아인 부마라 할 수 있다.
송휘종이 권신 채경(蔡京), 환관 동관(童貫)등을 기용하여 조정이 혼란에 빠진다. 백성들도 도탄에 빠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하에서, 송휘종은 금과 연합하여 요를 공격한다. 연운십육주를 되찾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에서 연이어 패하고, 오히려 금나라에 허약한 본질을 드러내게 되어, 금나라는 요를 멸망시킨 후 대거 남하한다.
북송 선화7년, 금 천회3년(1126) 십이월, 금군이 변경으로 쳐들어 온다. 어쩔 줄 몰라하던 송휘종은 황위를 황태자이자 개봉목(開封牧)이던 조환(趙桓)에게 양위한다. 조환은 송휘종을 교주도군태상황제(敎主道君太上皇帝)로 모신다. 정황후는 태상황후(太上皇后)가 된다.
북송 정강원년, 금 천회4년(1127) 십이월, 금군이 변경을 함락시킨다. 송휘종과 송흠종 조환은 서인으로 폐해진다.
북송 정강2년, 금 천회5년(1127) 삼월, 송휘종, 송흠종 및 후비, 왕공대신 수천명이 금군에 의해 북방으로 압송된다. 조옥반도 거기에 포함된다. 역사에서 정강지변(靖康之變)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송휘종, 송흠종의 여러 비빈, 딸들은 금나라에 능욕을 당한다. 조옥반도 금태종 완안오걸매(完顔吳乞買)의 적장자이자 내외제군붙도통(內外諸軍副都統)인 완안종경(完顔宗磬)의 첩이 된다.
완안종경은 조옥반의 두번째 남편이다. 그는 신분이 고귀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강제적인 성격이므로, 조옥반 내심의 고초는 충분히 상상이 될 것이다.
남송 소흥2년, 금 천회10년(1132) 좌부원수 완안종한(完顔宗翰), 우부원수 완안종보(完顔宗輔)등이 금태종으로 하여금 금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적손(嫡孫)인 완안단(完顔亶)을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에 책봉해달라고 요청한다. 금태동은 부득이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완안종경은 국론홀로발극렬(國論忽魯勃極烈)이 되며, 황위계승자격을 잃게 된다.
남송 소흥5년, 금 천회13년(1135) 금태종이 사망하고, 암반발극렬 완안단이 즉위한다. 국론홀로발극렬 완안종경은 상서령(尙書令)이 되고 송국왕(宋國王)에 봉해진다. 이어서 태사(太師)가 된다. 조정의 원로라 할 수 있다.
송국왕, 태사, 상서령 완안종경은 남송과의 의화(議和)를 주장한다. 그러나 금태조의 서장자, 태부, 국론좌발극렬 완안종간(完顔宗幹)은 남송을 공격하자고 주장한다. 쌍방의 갈등이 점점 커진다. 금희종 완안단은 최종적으로 완안종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남송 소흥9년, 금 천권2년(1139), 금희종은 모반죄로 완안종경을 죽인다.
완안종경이 죽은 후, 조옥반은 궁으로 들어가서, 금희종의 후궁비빈중 하나가 된다.
금희종은 조옥반의 세번째 남편이다. 완안종경과 마찬가지로, 국치가구(國恥家仇)는 시종 조옥반의 심병이었다. 게다가 금희종의 원부인 도평황후(悼平皇后) 배만씨(裴滿氏)는 교횡발호(驕橫跋扈)했다. 그래서 조옥반의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남송 소흥10년, 금 천권3년(1140), 조옥반은 40세의 나이로 우울하게 죽는다. 그녀의 굴욕적인 일생이 끝난 것이다. 그녀는 나중에 부인(夫人)에 추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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