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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나라때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를 받은 인물은?

by 중은우시 2020. 12. 18.

글: 용가독사(勇哥讀史)

 

이런 말이 있다: "생진태부(生晋太傅), 사시문정(死諡文正)"(살아서 태부에 오르고, 죽어서 문정의 시호를 받는다). 고대의 무수한 문인들에게 있어서, 사후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는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송나라는 문인을 존중한 시기였다. "만반개하품(萬般皆下品) 유유독서고(惟有獨書高)"(모든 것은 하품이고, 오로지 문관이 높다)을 부르짖던 왕조에서 몇명의 대신이 '문정'의 시호를 받았을까?

 

답안은 9명이다. 평균 34년에 한명씩 배출되었다.

 

"문정"의 시호를 받은 9명의 대신은 사망한 시간을 기준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이방(李昉), 왕단(王旦), 왕증(王曾), 범중엄(范仲淹), 사마광(司馬光), 황중용(黃中庸), 채변(蔡卞), 정거중(鄭居中), 채심(蔡沈)

 

이방은 송나라에서 최초로 '문정' 시호를 받은 대신이다.

 

자는 명원(明遠)이고, 심주 요양사람이다(지금의 하북성 요양현). 925년에 출생했다. 이방은 후당때 태어나서, 후한, 후주 두 왕조때 관직을 지냈다. 그러나 진정 역할을 한 시기는 북송이다. 송태조 조광윤은 이방의 재능과 인품을 높이 평가했고, 그를 재상의 후보자로 배양한다. 983년 그를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한다. 송태조 조광의가 즉위한 후, 여전히 이방을 신임했고, 두번에 걸쳐 그를 재상에 임명한다.

 

996년, 이방은 조광의와 함께 남교(南郊)로 가서 제사의식에 참가하였는데, 부주의하여 낙상을 입는다. 그때 이방은 이미 71세의 고령이었다. 그리하여 며칠 후 이방은 병사하고 만다. 조광의는 즉시 이방에게 '문정(文正, 文貞)'이라는 시호를 추증한다.

 

이방이후, 왕단, 왕증, 범중엄의 3명의 대신이 서거한 후 모두 '문정'의 시호를 받는다. 왕단은 1017년에 병사했으며 송진종에 의해 문정이라는 시호가 추증된다; 왕증, 범중엄은 각각 1038년, 1052년에 사망했으며, 송인종에 의해 문정 시호가 수여된다.

 

왕단과 왕증은 모두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범중엄은 겨우 부재상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범중엄의 명성은 왕단이나 왕증보다 훨씬 컸다. 그것은 범중엄이 글을 잘 썼기 때문이다. 그의 <악양루기(岳陽樓記)>는 천고에 이름을 남기고,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된다. 그뿐 아니라, 범중엄이 일으킨 "경력신정(慶歷新政)'은 북송에서 제1차개혁의 나팔을 분 것이다. 역사상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996년부터 1052년까지, 짧은 56년간 모두 4명의 '문정'이 탄생한다. 평균 14년에 1명씩 '문정'이 나왔다. 이처럼 높은 빈도는 고대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사마광은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문정은 시호로서 극미(極美)한 것이고,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는 '문(文)'은 도덕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이고, '정(正)'은 정공이위(靖共爾位)하다는 것이니 '문정'은 문인의 도덕에서 극치의 표준이라고 말하며, 고금을 통틀어 이를 이룬 문인은 아주 적다. 그러므로, 황제는 가볍게 '문정' 시호를 대신에게 추증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송신종은 사마광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송신종의 재위기간동안 단 1명의 '문정'시호도 내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송신종 이후, 북송(남송포함)의 역대황제는 '문정'시호를 추증하는데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1052년부터 1279년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227년간 모두 5명의 대신이 '문정'의 시호를 받는다. 조금 이상한 점이라면 남송은 152년간 오직 1명의 대신에게만 '문정' 시호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주희가 말년에 가장 큰 성취를 이룬 인물중 하나인 복건의 거유 채심이다.

 

사마광이 문정 시호를 신중하게 내리라는 건의를 할 때 그는 아마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죽은 후, 송철종이 '문정' 시호를 수여할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이 시호가 계속 고난을 겪게되는 것이다.

 

1086년 사마광이 병사한다. 당시 송철종은 나이가 어렸다. 고태후(高太后)가 섭정했다. 고태후는 사마광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송철종의 명의로 그에게 '문정' 시호를 내린다. 고태후가 사망한 후, 송철종이 친정을 한 후 사마광의 '문정' 시호를 박탈해 버린다. 1126년, 송휘종은 다시 사마광에게 '문정' 시호를 추증한다.

 

'문정'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뺏었다 하다니, 즐거워해야할 일인가 아닌가, 놀라워해야할 일인가 아닌가.

 

'문정' 시호는 아주 진귀하기 때문에, 많은 송나라때의 명신들도 이 시호를 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이 그들이다.

 

왕안석은 송신종때 저명한 '왕안석변법'을 시작한다. 왕안석변법은 귀족계층의 이익을 해쳤고, 그리하여 유례없는 저항에 부닥친다. 송신종이 붕어한 후, 신법에 강력히 반대하던 고태후가 수렴청정한다. 그녀는 사마광을 재상에 임명하여 신법을 폐지한다. 1086년, 왕안석이 사망하자, 그는 '태부'에 추증될 뿐, 시호는 받지 못한다. 1094년, 송철종이 친정한 후, 장돈(章惇)을 재상으로 삼고, 신법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왕안석에게 시호를 내린다. "문(文)"

 

어떤 사람은 "문"이라는 시호가 '문정'보다 높은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문"이라는 시호는 '문정'보다 아래라고 말한다. 각자의 말에는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다. 그저 생각하기 나름이라 할 수 있다.

 

소식은 왜 '문정' 시호를 받지 못했을까?

 

원래, 소식은 1101년 상주에서 사망할 때, 조정의 대사면으로 막 유배생활을 마치고 조봉랑(朝封郞)의 관직에 있을 때였다. 조봉랑은 정칠품의 관직이고, 기록관(寄祿官)으로 녹봉만 받지, 직권은 없는 관직이다. 소식은 관직이 너무 낮아서, 시호를 추증받을 자격이 되지 못했다. 하물며 '문정'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인 것이다.

 

당연히 황금은 언젠가 빛을 발한다. 소식의 명성은 죽은 후에도 갈수록 더 높아졌다. 남송에 이르러, 송효종은 소식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추증한다.

 

'문충'은 '문정' 바로 다음가는 시호이다. 안진경, 구양수, 장거정, 임칙서, 이홍장등 명신은 모두 '문정'의 시호를 받은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