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자백년(水煮百年)
첫째, 백가반(百家飯)을 먹으며 자란 모안영(毛岸英)
모안영은 모택동과 양개혜(楊開慧) 사이의 장남이다. 1922년 10월 24일 장사(長沙) 청수당(淸水塘)에서 태어났다. 그 동탕(動蕩)의 세월 속에서 모안영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사방을 떠돌아 다닌다. 모택동은 이렇게 탄식하며 말했다: "혁명사업을 위하여, 이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백가반을 벅고, 만리길을 다녔다." 1930년 10월, 양개혜가 체포되어 협조평(協條坪) 감옥에 갇힌다. 어린 모안영은 모친과 함께 감옥 안에 갇혀 있었다. 양개혜가 처형당한 후, 모안영은 석방된다. 나중에 당조직이 그들 형제 3명을 상해로 보낸다. 1931년 4월, 지하당기관이 파괴되면서, 모안영 형제는 길거리를 유랑한다. 1936년 상해지하당은 모안영과 모안청(毛岸靑)만을 찾아내고, 그들을 소련으로 보낸다. 모안영은 모스크바레닌군정학원과 프룬제군사학원에서 차례로 공부한다. 1943년 1월에는 소련공산당(볼세비키)에 가입한다. 대학졸업후, 모안영은 중위의 계급을 받고, 소련군의 대반격에 참가한다.
1946년 모안영은 비밀리에 연안으로 돌아온다. 얼마 후, 그는 부친의 당부를 받고 시골로 가서 노동한다. 호종남(胡宗南)이 연안으로 진격하여, 모안영은 비로소 모택동의 곁으로 돌아가게 된다.
건국후, 모안영은 북경기기총창에서 당지부 부서기를 지낸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안영은 지원군에 참가하여 한국으로 간다. 1950년 11월 25일 불행히 희생된다.
둘째, 차남 모안청
모안청은 모택동과 양개혜 사이의 차남이다. 1923년 모안청은 형인 모안영과 함꼐 소련으로 가서 공부한다. 동방대학에 입학한다. 모택동은 모안영을 좋아했고, 모안청도 아꼈으며,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매번 그들이 커가는 것을 볼 때마다 열정적으로 격려해주곤 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모안청은 일찌기 중앙선전부 마르크스레닌저작번역소에서 번역업무에 종사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모안청은 어려서 머리를 다친 것과 형인 모안영이 희생당한 것에 자극을 받아 대련에서 요양한다. 모택동의 지지하에, 모안청과 소화(邵華)는 함께 북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함게 호남 고향으로 간다. 1970년 두 사람은 아들을 얻는다. 그가 바로 모신우(毛新宇)이다. 일가족은 행복하게 살았다.
2007년 3월 23일 새벽 4시 20분, 모안청은 병으로 북경에서 사망한다. 향년 84세이다.
셋째, 행방불명된 모안룡(毛岸龍)
1927년 모택동 일가는 먼저 무창으로 가고, 얼마 후 양개혜는 셋째아들 모안룡을 낳는다. 1930년 양계혜가 처형당한 후, 모안룡은 두 형과 함께 당조직의 안배하에 외할머니, 외숙모와 함께 상해로 가서 숙부 모택민(毛澤民), 숙모 전희균(錢希鈞)의 곁으로 가서 상해지하당의 영도하의 대동유치원에 들어간다. 1931년 봄, 상해지하당이 엄중하게 파괴되면서, 삼형제는 상해의 길거리를 유랑한다. 어린 모안룡은 불행히도 실종되고, 누구도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넷째,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첫째 딸
1929년 홍군이 제2차로 용암을 공격할 때, 하자진(賀子珍)은 딸을 하나 낳는다. 처음 얻은 천금이다. 모택동은 이 딸을 아주 좋아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모택동은 사람을 시켜 맡길만한 집을 찾는다. 그는 하자진에게 말했다: "아이를 맡기자.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혁명승리한 후, 우리는 다시 아이를 우리 곁으로 데려오자."
다섯째, 실종된 모모(毛毛)
1932년 11월 하자진은 복건 장정에서 둘째 아이를 낳는다. 사내아이였으므로, 모택동은 그를 양개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과 같은 항열을 써서 이름을 모안홍(毛岸紅)이라고 짓는다. 당시 하자진은 이질이 걸려 있었고, 모택동은 유모를 구해서 아이를 맡긴다. 유모는 아이를 '모모'라고 불렀다. 장정이 시작된 후, 모택동 부부는 상의를 해서, 아이를 남여서 유격활동을 계속하는 모택담(毛澤覃)과 하이(賀怡)에게 맡긴다. 금방, 서금(瑞金)과 소비에트구는 국민당의 손에 들어간다. 모택담은 소식이 새어나갈까 겁을 내어, 어린 모모를 비미리에 서금의 한 경위원의 집으로 보낸다. 그후 모택담도 희생되고, 어린 모모의 행방은 그후 알 수가 없게 된다.
여섯째, 조산아
1933년 하자진은 다시 임신한다. 그 해, 홍군은 초토화공격에 대응하는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자진은 임신한 몸으로 홍군을 따라 서금에서 옮겨간다. 당시 생활조건이 아주 어려웠고, 하자진은 몸이 허약했다. 결국 조산을 하게 된다. 이 사내아이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요절한다.
일곱째, 찾을 수 없었던 일곱째 아이.
1935년 2월 하순, 홍군이 장정중에 귀주 백묘족의 한 마을에 도착한다. 하자진은 딸을 하나 낳는다. 여기까지의 길도 멀고 힘들었다. 이 어린아이에 대한 처분방법은 단 하나였다. 즉 현지의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나중에 하자진은 온갖 방법을 서서 찾으려 했지만,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당시 나중에 찾을 수 있도록 물건을 남겨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모택동은 하자진이 아이를 보낸 것을 알고는 찬동해서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혁명을 하는 것은 후대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을 위해서는 부득이 다음 세대를 버릴 수밖에 없다."
여덟째, 아명이 교교(姣姣)인 이민(李敏)
1936년 겨울,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후, 하자진은 딸을 하나 낳는다. 등영초는 안고서 영아에게 말한다: "정말 어린 교교이구나!" 옆에 서 있던 모택동은 등영초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서경잡기>의 "문군교호(文君姣好), 미색여망원산(媚色如望遠山), 검제상여부용(臉際常如芙蓉)" 거기에서 뜻을 따와서 이름은 '모교교'라고 짓는다. 1937년 10월, 하자진은 소련으로 가서 병치료와 공부를 한다. 1940년 4살된 교교는 연안에서 모스크바로 간다. 1947년 교교는 소련에서 모택동의 곁으로 돌아와서 학교를 다닌다. 모택동이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은 이민(李敏)이다. 이씨성은 모택동이 당시에 쓰던 가명인 이득승(李得勝)에서 왔고, 외자 이름 '민'은 <논어>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 "군자욕눌어언(君子欲訥於言), 민어행(敏於行)"
아홉째, 이국에서 객사한 아홉째 아이
하자진은 모스크바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사내아이를 하나 낳는다. 이는 모택동의 아홉째 아이이다. 아이가 10개월이 되었을 때, 감기에 걸렸고,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해서, 폐염으로 발전한다. 제때 구해주지 못해서 요절하고 만다.
열째, 막내딸 이눌(李訥)
1940년 8월 강청이 낳았다. 1953년, 이눌은 북경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에서 공부한다. 1959년 북경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고, 1965년에 졸업한다. 이 시기에 모택동은 그녀의 성장에 아주 관심이 컸다. 여러번 그녀에게 서신을 보내고, 끈기있게 그녀를 좋은 말로 끌어 준다. 부친으로서 모택동의 서신은 글자 한자 한자가 모두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했다. 막내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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