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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5천년 중국역사에 왜 "중국"이라는 명칭을 가진 왕조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by 중은우시 2018. 10. 26.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중국은 세계4대문명고국중 하나이다. 5000년의 문명사를 지니고 있다고 자랑한다. 다만, 역사상 중국에서는 어느 왕조도 '중국'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중국'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서주(西周)초기 청공기 "하존(何尊)"의 명문(銘文)이다: "여기택자중국(余其宅玆中國), 자지피민(自之避民)"


중국의 대칭으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화하(華夏), 중화(中華), 중하(中夏), 중원(中原), 제하(諸夏), 제화(諸華), 신주(神州), 구주(九州), 해내(海內)등


한어의 '중국'이라는 단어는 가장 먼저 서주의 경기지역을 가리켰다. 나중에 황하유역, 황하중하류의 중원지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뀐다. '중국'은 천하의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에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다. 이런 관념은 청나라말기까지 계속된다.


고대중국은 대외적으로 교류가 있었고, 가장 유명한 것은 일본이다. 당나라는 일본과 교류가 많아서, 일본유학생이 중국으로 왔었다. 고대일본은 중국을 항상 '당(唐)'이라고 칭했다. 804년, 일본승려 공해(空海)가 일본견당사를 따라 중국으로 와서 불교를 배우고, 불교에서 한역(漢譯)된 "지나(支那)"를 가져가서 중국에 대한 존칭으로 쓴다. 그래서 일본은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다.


"지나"라는 말은 원래 멸시하는 뜻이 아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고인도이다. 고인도는 하나의 지역이고 하나의 독립된 국가는 아니었다. 현장(玄奘)이 인도지구로 경전을 가지러 갔을 때, 범문(梵文)의 "진(秦)"자를 "지나(支那)"라고 번역했다. "지나"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마가지나(摩訶至那)"가 된다. 인도는 중국을 "마가지나"라고 불렀다. 그것도 존칭이다.


고대중국은 "비단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및 유럽과 교류했다. 고대 페르시아제국과 유럽의 일부 국가는 중국을 "사국(絲國)"이라고 불렀다. 고대그리스와 로마는 중국을 "Serica"라고 불렀는데 역시 "사국(絲國)"이라는 뜻이다.


명나라이전까지, 러시아는 소국이었다 수도 모스크바는 '마을'급 수준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사이에는 요나라(거란)가 있었고, 고대러시아는 중국을 '거란'이라고 부른다. 유럽의 일부 국가는 고대에 중국을 '거란'이라고 불렀다. 모두 다른 나라로 가는 일이 적고,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가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긴다. 외국의 이름을 모두 아무렇게나 불렀다. 많은 명칭은 도대체 생각도 못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중국"의 개념은 비록 일찌감치 형성되었지만, 어느 왕조도 스스로를 중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어느 왕조도 모두 자신의 정통(正統)을 강조하기 위하여 왕조의 명칭이 모두 "타칭'이었다. '자칭'이 아니었다. 한(漢)왕조의 명칭은 초한전쟁때 항우가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위"는 한헌제가 조조를 '위왕(魏王)'에 봉했기 때문이다; 유비의 '한(漢)'은 그저 전왕조를 모용한 것이다; 손권의 '오(吳)'는 손권이 일찌기 '오후(吳侯)'에 봉해졌었기 때문이다; 진(晋)은 사마소가 '진공(晋公)'에 봉해졌었기 때문이다; 수(隋)는 수문제 양견의 부친인 양충(楊忠)이 일찌기 '수국공(隨國公)'에 봉해졌었기 때문이다; 당(唐)은 당고조 이연의 조부인 이호(李虎)가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었기 때문이다; 송(宋)은 송태조 조광윤이 송주절도사(宋州節度使)를 지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상, 원, 명, 청의 3개 왕조만이 '타칭'의 전통을 깨고, '자칭' 왕조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원나라는 몽골인들이 나중에 문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역경>의 "대재건원(大哉乾元)"에서 '대원(大元)"이라는 국호를 따서 스스로를 '대원'이라 명한다. 명청 두 왕조도 전왕조를 본따서, 스스로 '대명', '대청'이라고 불렀다. 왕조명명의 규칙이 이때부터 바뀐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자칫 스스로를 '중국'이라고 명명할 뻔했다.


주원장이 신왕조를 건립했을 때, 국호를 '대중(大中)"이라고 정하려 했었다. "중(中)"은 바로 중국의 뜻이다. 그리고 국가의 법정화폐도 만드는데, "대중통보(大中通寶)"라고 불렀다.


1361년, 주원장은 정식으로 '대중통보'를 주조한다. 왕사신은 <지남우담>에서 이렇게 적었다: "명태조가 처음 천하를 안정시키고 국호를 정하는데, 대중으로 하고자 했다. 나중에 하늘에 기도를 하고서 '대명'이라는 국호를 얻는다. 그래서 당시의 돈 중에 '대중통보'가 있다."


1368년, 왕조가 정식건립될 때, 주원장은 '대중'을 포기하고 왕조명칭을 '대명'으로 한다. 나중에 발행한 돈도 "대명보초(大明寶鈔)"라 한다.


'대중'이라는 명칭은 아주 좋다. 주원장이 왜 이것을 버리고 대명을 썼을까? 김용의 <의천도룡기>에서는 주원장이 '명교'와 관련이 있어서, 국호를 '대명'이라고 했다고 적었다. 이것은 소설가의 창작이다. 그저 헛소리로 생각하면 되고, 진짜라고 여겨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