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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죽서기년(竹書紀年)>: 중국고대의 비주류 사서

by 중은우시 2019. 4. 22.

글: 지역사(知歷史)




<죽서기년>은 위양왕(魏襄王) 시대에 저술되었다. 이 시대에 여러 나라가 나타나고, 유가(儒家)는 아직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죽서기년>은 서진(西晋) 연간이고, 이 때는 <사기>가 이미 중국역사기록의 '대표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서기년>을 다시 살펴보면, 이는 말그대로 비주류사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죽서기년>은 중국고대에 유일하게 진나라때의 분서갱유에 살아남은 편년통사이다. 그것은 정통의 <좌전>, <사기>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그중 하, 상, 서주와 춘추넌국의 역사가 있다. 이들 역사에 대하여 일정한 의문을 품게 해준다.


그중 몇 가지 역사기록은 특히 중요하다:


1. 순(舜)이 요(堯)를 구금하고, 결국은 죽여버리고, 제위를 빼앗는다;'

2. 순(舜)은 요의 심복들을 대거 죽여버리고, 그들을 사흉(四凶)이라 칭하는데, 거기에는 우(禹)의 부친이 포함되어 있다;

3. 우(禹)는 하(夏)의 땅을 차지하고, 순에 대항한다. 결국 순을 격패시키고, 순을 창오(蒼梧)에 유배보낸다. 순은 창오에서 죽는다.

4. 우가 죽고, 계(啓)가 즉위한다. 익(益)은 왕위를 탈취하고자 음모를 꾸몄으나 결과적으로 계에게 피살당한다.

5. 이윤(伊尹)은 상왕(商王)을 죽이고 스스로 왕에 오른다. 나중에 피살된다.

6. 상왕 문정(文丁)은 주문왕(周文王)의 부친 계력(季歷)을 죽인다.

7. 공화원년(共和元年)은 주공(周公), 소공(召公)이 공동으로 집정한 때가 아니라, 제후국인 공국(共國)의 백화(伯和)가 주나라 천자를 대신하여 집정한 것이다. 이를 "공화행정(共和行政)"이라 부른다.


이들 내용은 바로 <죽서기년>이 가장 "이경반도(離經叛道)"한 부분이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의 이미지를 깨트려 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동시에 공자가 숭상하는 주례를 가장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현재 전해지고 있는 역사사료들을 보면, <죽서기년>의 내용이 완전히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다.


<죽서기년>에 관해서는 또 하나의 논쟁이 있다. 바로 고본(古本)과 금본(今本)의 논쟁이다. 그중 고본이라 함은 진나라때 출토된 그 버전이고, 금본이라는 것은 송나라때 완전히 사라졌다가 명나라때의 장서가 범흠(范欽)의 장서각에서 발견된 <죽서기년>이다.


고본과 금본은 내용에 일정한 차이가 있다. 다만 전체적인 내용이나 가치취항은 같다. 전통적인 유가관념에 배치된다. <죽서기년>에서 나타난 역사는 잔혹하다. 이런 가치취항은 송나라와 같이 유학사상이 성행하던 시대에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이 <사기>의 기록과 다르다고 하여 위서라 단정할 수는 없다. 어쨌든, 하, 상시대의 역사기록은 그 자체로 결핍되어 있고, 더 많은 것은 전설이기 때문이다.


<죽서기년>이 유가문화에 던진 충격이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성인'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논어>등 일련의 유가저작에서 이윤, 순, 요는 모두 유가의 도덕적 모범이다. 일단 이런 도덕적 모범이 무너지면, 유가문화의 근본이 동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의 사람들은 더 이상 유가의 충실한 신도가 아니다. 더욱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이 이경반도의 사서를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역사의 막을 열기 전에 그 진위는 정확하게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